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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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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화동에서 태동하다기획특집 시리즈 - ②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임시정부 유적지에서 본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의지를 재조명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집 시리즈. 이번 호에서는 중국 상하이를 방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현장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의미를 짚어보았다. 

Contents
     1. 조선의 독립국임을 선언하노라”
 ▶  2.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국 화동에서 태동하다
     3.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염원이 서려있는 곳, 충칭

독립의지를 알리고자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 

1919년 3월 1일 일어난 3·1운동은 거국적이고 거족적인 비폭력 시위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우리 민족은 일본의 통치에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추진할 지도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이에 상하이(1919.4.11)를 포함한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 수립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던 중 독립운동가들은 1919년 9월 11일 블라디보스토크, 고려공화국 등 곳곳에 흩어진 조직을 통합하여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 
기자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지난 달 상하이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했다. 기자가 들렀던 상하이 신티앤디 마땅루에 위치한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부터 1932년까지 사용한 청사로 당시 한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석고문 주택을 임대하여 사용했으며 상하이 내에서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활동했다는 사실을 교민들의 설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날 현장에서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만큼 한국 취재진들과 관광객들의 관심도 컸다. 

100년 전 임시정부의 기본정신은 ‘민주공화제’

임시정부 청사에 들어서니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3층 구조의 청사를 볼 수 있었지만 실제 사용했던 공간은 단칸방 한 곳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곳 청사는 두 차례의 복원공사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 선생의 집무실 및 각 부처 장관의 집무실 등은 한 국가의 정부의 청사라고 보기에는 대체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설립 당시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안창호를 내무총장 그리고 이동휘를 군무총장으로 추대했다. 그와 동시에 ‘임시의정원’이라는 오늘날 국회와 같은 기관을 만들어 작은 단위이긴 하지만 각부 조직을 만들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임시의정원의 임시헌장 제1조가 현행 헌법 제1조와 같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500년의 왕조국가가 불과 10년도 못되어 정체 변화의 선언을 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이라고 역사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군사, 외교,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의 주요 활동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상하이 히어로 역사연구회 이명필(51) 대표는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국제적인 문제로 부각시켰던 김규식 선생의 활동과 독립자금을 만들기 위해 미국의 오렌지 농장에서 땀 흘렸던 이민자들의 노고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라며 한국인들이 이들의 희생도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 요인 암살을 시도했던 김구 선생의 민족주의 정신과 독립을 위한 투쟁 그리고 충칭에서 창설된 한국 광복군에 대한 자료들도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윤봉길 의사 항거 후, 10여 차례 임정 청사 이동

중국 상하이에서 시작된 임시정부는 인력과 자금부족, 일제의 감시와 탄압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을 비롯한 파벌싸움, 이념갈등으로 대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10여 차례나 정부 청사를 이동하며 험난한 여정을 하게 되는데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첫 이동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사건이다. 이에 취재진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루쉰공원(당시 홍커우공원)으로 이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전승기념식에서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단상에 폭탄을 투척했다. 당시 중국의 장제스 주석은 “8억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해냈다”며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곳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 김민정(상하이 복단대 1) 씨는 “윤봉길 의사의 항거 현장에 와보니 윤봉길 의사가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했는지 알 수 있고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다”며 소감을 전했다. 이튿날 방문한 항주 임시정부 청사에도 독립운동가들의 활약, 특히 58억원의 현상금이 걸린 김구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미국인 피치 목사와 중국인들의 독립운동 지원활동이 자료화되어 일제에 항거한 그때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이 어떠했든지 독립을 위한 이들의 희생과 평화에 대한 염원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가장 큰 기반이었음이 분명하다.   
고정연 차장대우 jyko@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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