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지평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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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지평리 전투
연재 전적지 탐방 시리즈 - ②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8.2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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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후 3년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위기를 넘겼다. 이번 호에는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전세를 역전시킨 2대 전투로 불리는 양평군 지평리 전투 전적지를 찾아가 보았다. 

Contents
     1.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을 지켜낸 다부동 전투
 ▶  2.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지평리 전투
     3.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한 격전지, 백마고지

중공군 개입 후 38선 이남까지 후퇴한 유엔군

“내가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탄피가 없는 집이 없었어요. 우리 집 마당에도 가마니로 묻혀 있었어요. 이곳에서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지평리에서 만난 주민의 말이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구 소련과 중공군의 지원을 받으며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고자 수백 대의 탱크, 장갑차, 전투기를 앞세워 기습 남침하였다. 무방비 상태였던 우리군이 연전연패하며 후퇴하는 가운데 전투지원 16개국을 비롯한 60개 회원국 190만여 명의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다. 상황은 곧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다부동 전투의 승리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제3차 세계대전 발발우려에도 불구하고 북진하여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10월 말 26만 명의 중공군과 맞닥뜨렸다. 이후 패배를 거듭하며 38선 이남 지역까지 퇴각하여 1951년 1월 4일엔 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되었다. 중공군은 그 해 2월 중앙선 열차가 통과하는 교통요충지인 양평군 지평리를 점령하고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의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지평리가 함락되면 중공군이 부산까지 밀고 내려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기적의 전투가 지평리에서 펼쳐졌다.

적군 격파로 반격의 기회 만든 지평리 전투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미 2사단을 주축으로 유엔군 5천 600여 명이 중공군 5만여 명을 물리치며 한국전쟁의 판세를 역전시킨 전투이다. 당시 유엔군은 전쟁에 개입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후퇴와 패배를 거듭했었다. 그러나 지평리 전투에서 놀라운 화력과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첫 승리를 거둬 서울을 재탈환하고 38선 일대를 다시 확보하게 되었다.   
지평리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 내는 데는 유엔군 지휘관들의 뛰어난 리더십과 활약이 있었다. 고지가 아닌 얕은 구릉에 진지를 구축해 산비탈을 오르는 중공군을 시야에 확보한 창의적 전술을 구사한 미 2사단 23연대장 프리먼(Paul Freeman) 대령의 전술은 미 육사 교본에도 수록되어 있다. 또한, 피리와 나팔 등을 불면서 몰려오는 중공군의 기세에 아랑곳 않고 사이렌을 울리며 총검과 개머리판을 휘두르며 백병전을 펼쳤던 대대장 몽클라(Ralph Monclar) 중령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외에도 크롬베즈 특수임무부대, 800명의 중공군을 섬멸한 미 공군의 네이팜 탄 폭격 등 연합군의 사주방어와 강력한 후방지원에 중공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평리 전투 기념관의 정운학 관리실장은 “2월 지평리 전투에서는 중공군이 5천 명, 3개월 후 용문산 전투에서 1만 7천 명이 전사하자 유엔의 소련대사는 6월에 정전협정을 제의하고 7월에 회담을 시작했다. 지평리 전투는 정전협정의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라고 말했다.

고귀한 희생 속에 지켜진 자유의 소중함

지평리 전투 기념관(양평군 지평면)에 들어서니 당시 전투 상황과 참혹한 전장의 모습들이 생생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전투에 참여한 101명의 국군 중 현재 생존한 3인의 사연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카투사 마크를 달고 당시 프랑스 대대에 배속돼 195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력(戰歷)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에서는 훈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기념관에서 자원봉사자로서 지평리 전투 경험을 전하고 있는 이정훈(85) 참전용사는 “피난을 가던 중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자는 마음에 이곳에 들어왔다가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지평리 청년 120명이 전투에 참전했는데 이제는 38명밖에 남지 않았다. 너무나 참혹한 전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덕분에 이런 세상을 살 수 있어 얼마나 좋은가! 국가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이 꼭 알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국군 장병들의 희생과 유엔군 참전용사들의 피흘림으로 지켜진 이 나라 대한민국. 국가의 소중함이 점차 잊혀지고 있는 요즘, 정전 64주년을 맞아 지평리 전투 기념관은 전쟁의 참혹함과 더불어 자유의 소중함을 되새겨 주고 있다. 
송미아 기자 miaso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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