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개혁의 역사_1
상태바
1. 종교개혁의 역사_1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4.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여로보암의 죄

여로보암의 죄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타락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전적으로 자신의 자격이나 수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삼으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왕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왕위를 지켜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전혀 없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도 없어서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율법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 차례씩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나라가 둘이지만 한 민족이며 신앙이 같은 관계로 여로보암의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제사를 드리러 간다.
그때 여로보암은 깊은 근심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에 자주 가다 보면 백성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넘어가서 자신을 반역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왕위도 잃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강제로 못 가도록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사단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주었다. ‘이곳에 성전을 지어주면 되겠구나!’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에 제사 드리러 가지 못하게 막을 목적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단과 벧엘에 산당을 지었다. 즉, 거짓 성전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거짓 교회의 모형이다.
그런데 이 일이 왜 그렇게 악한 죄가 되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들의 생애를 기록하시면서 악한 왕들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서...” “여로보암의 죄에서...”라고 표현하셨다. 즉, 모든 악한 왕들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오늘날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진 도덕적인 가치기준으로는 여로보암이 그렇게 악한 짓을 한 것이 없어 보인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죽었을 때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퍼했다(왕상 14:18)는 사실을 보면, 백성들은 여로보암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그러므로 내가 여로보암의 집에 재앙을 내려 여로보암에게 속한 사내는 이스라엘 가운데 매인 자나 놓인 자나 다 끊어버리되 거름을 쓸어버림같이 여로보암의 집을 말갛게 쓸어버릴지라.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왕상 14:10,11) 하나님께서는 아주 강한 내용으로 저주하셨지만, 백성들은 안타까워하면서 위로한 것이다. 즉, 여로보암의 타락, 범죄가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악이지 백성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큰 죄악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다분히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기준으로 타락하고 변질된 교회나 목회자를 분별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교회나 목회자를 분별할 때는 도덕적, 윤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고 ‘영적인가? 성경적인가?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회가 운영되는가?’를 분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영적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냥 모양만 경건하면 영적인 것으로 여긴다. 영적인 것 자체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적인가 하면 성경적이지도 않다. 교단별로 그들이 만든 교리들에 의해서 설교가 만들어지고, 그 교리에 의해서 신앙의 집이 지어진 것을 본다. 사람들을 만나서 상담을 해보면 그들 마음 안에 신앙의 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리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목회자가 세워지는 것이나 교회의 여러 직분자들이 세워지는 과정도 성경적이지를 않다. 교회의 일들이 결정되고 집행되는 일, 또한 헌금이 드려지고 사용되는 과정 역시 성경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다. 교회의 여러 일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 인간의 방법에 의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아, 기독교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제는 한국에서 교회, 목회자 등이 부패와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여로보암 왕이 타락한 왕들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의 모습이 열왕기상 12장에 나오는 여로보암의 산당과 너무나 똑같다. 여로보암의 산당을 살펴보면 한국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서 한국 교회가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새롭게 변화를 입는 길도 보일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여로보암의 산당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계획하고...

여로보암이 산당을 만든 진짜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아마 여로보암은 백성들에게 “이제 성전이 가까이 있으니 더 자주, 가깝게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했을 것이다. 사단이 거짓된 교회와 목회자를 세워서 그들을 통해서 하려는 일은 참된 교회에 나가서 정확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 교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교인들이 믿음의 확신이 없어서 죄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정죄함 가운데서 신음하고 있는데도 ‘자기 교회, 본 교회’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두고 있다. 그들이 복음을 들으려 하면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막아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폐쇄성을 면치 못해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여로보암의 산당이 무너져서 모든 백성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듯이, 복음을 막는 거짓 종교의 세력들이 무너져서 많은 사람들이 주께 돌아와야 할 것이다.

산당에 금송아지 우상이 있다

성전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조건, 곧 거룩함이다. 하나님께서 각종 귀한 재료로 정교하게 만든 건축물이나 예술 작품 안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거룩함이 갖추어진 곳에 임하신다. 성막, 성전, 교회의 공통점은 ‘거룩함’이다. 그 거룩함이 갖추어지지 않았거나 거룩함이 훼손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닌 것이다.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더럽혀진다. 그때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군사들을 통해서 헐어버리고 에스라 선지자를 통해서 새롭게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본다.
여로보암이 세운 산당에 백성들이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받으시리라는 마음으로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제사를 받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악 가운데서 드린 제사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가면서 그냥 열심히, 간절히, 정성스럽게 하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정성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를 받으시고 그 의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원한 속죄를 깨닫지 않고서 자신의 죄 가운데서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을 말한다.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신앙인을 말하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산당이 왜 만들어졌는가? 자기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마음에서,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불신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나오듯이 여로보암 자신이 자신을 위한 염려를 품고 있었더니 금송아지와 거짓 산당이 나왔던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당을 찾아나오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진 영원한 속죄와 거듭남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도해 주지 못하고,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해 주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 오히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감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로보암처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 머물러서 자족하고 자긍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레위인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예전에 성경의 이 부분을 읽을 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어떻게 금송아지를 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렇다고 백성들이 속을 수 있는가? 그런데 성막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성막이나 성전 안에 일반 백성들은 들어갈 수 없고 레위인만 들어갈 수 있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성전 안이 정확하게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고 그저 법이나 절기나 규례를 따라서 적당하게 제사를 드려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들은 그냥 위에서 그렇다 하면 그런가 보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로보암이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서는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울 수 없었다. 레위인들도 산당의 제사장으로 일하고 싶지 않았고, 여로보암도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레위인들은 모두 유다로 옮겨간다. 또한 뜻을 오로지 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도 레위인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가버린다(대하 11:16). 이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영적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본래 제사장은 레위인만이 할 수 있다. ‘레위’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연합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과 연합된 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보통 백성으로, 즉 하나님과 연합되지 않은 자들을 제사장으로 세워서 백성들의 신앙을 미혹했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목사로 세움을 입는가? 각 교단별로 교육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일반적으로는 신학교, 신학대학원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위한 고시를 보고 또는 논문을 제출해서 안수를 받는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한 젊은 청년이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목사로 안수를 받기까지 어느 과정에도 분명하게 거듭남을 확인하는 과정,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속죄를 깨닫도록 하는 과정이 없다는 것이다. 그냥 보통 백성들로 제사장을 삼듯이, 성실하거나 열정이 있는 사람, 즉 인간적인 조건에 의해서 세움을 입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이 무엇을 가르치겠는가?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가르칠 뿐이다.
제사장이란 죄인과 하나님을 화목시켜주는 사람이다. 제사장들은 대속죄일에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릴 때에 먼저 자신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린 후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사를 드린다. 그렇듯이 먼저 내가 내 모든 죄를 사함받은 은혜를 입었어야 남들에게도 전해 줄 것이 아닌가?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이 구스 내시의 질문을 받고 정확하게 복음을 전해 주어서 거리낌 없는 믿음을 갖게 해주었듯이 말이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행 10장),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를 자세히 풀어서 전해 주었듯이(행 18장). 그래서 먼저 목회자들은 보통 백성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하나님과 연합된 자들이어야 할 것이다.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의 유사품이 있다. 식품이나 공산품 등 셀 수 없이 많다. 그런데 물질적인 유사품들은 진품만은 못해도 그런대로 쓸 만한 것들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모조품이 더 좋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절대로 모조품이 용납되어선 안 되는 영역이 있는데, 그건 바로 신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니까 지금 자신들이 타락한 신앙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겉으로는 비슷하니까 잘 모른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행위에 익숙하다. 그래서 행위가 비슷하면 잘못된 줄을 모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제사요 예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단절된 것은 보이지 않고 종교적인 형식은 보인다. 그래서 종교적인 행위가 비슷하면 그냥 속아 넘어간다.
여로보암이 왜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는가? 백성들의 미혹을 고정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절기들에 맞춘 행사들이 백성들의 마음을 자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나님과 단절되었는지, 하나님이 나의 신앙을 받으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자신이 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자족해하고 있는가?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십일조 및 헌금을 드리고, 또는 불우한 이웃을 돕는 등 나름대로 선한 일을 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는 것과 여로보암의 산당에서 하는 것이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된 것이고 여로보암의 산당에서의 모든 행위는 여로보암의 계획에 속아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자기만족만 주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자기가 자기의 행위에 스스로 만족해하
는 사람들은 여로보암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