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약속을 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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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의 약속을 본다면
창세기 21장 8절 ~ 21절 - 2017. 9. 17. 주일 오전예배 설교 - 680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9.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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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경 이야기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 하는데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은 자신이 소경인 사실을 전혀 모를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소경인 어린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도 전부 자기와 같다고 생각하고 같이 뛰놀며 지냈습니다. 어느 날 학교 갈 나이가 되었는데 그날도 친구들과 놀려고 옆집에 가서 친구를 불렀습니다. “경수야, 놀~자.” “경수 없다.” “경수 어디 갔어요?” “학교에 갔다.” 
오후에 그 소경인 아이가 학교에 다녀온 경수와 같이 놀다가 경수에게 물었습니다. “경수야, 왜 학교에 혼자 갔니? 나도 함께 데려 가지.” “너는 학교 못 간다.” “왜?” “너는 소경이잖아.” “내가 소경이라고? 소경이 뭔데?” “너는 앞을 못 보잖아.” “너는 보니?” “응, 나는 앞을 봐.” “보는 게 뭔데?” “보는 게 있어. 눈을 뜨고 보는 거야.” 어린 소경은 자신이 소경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엄마, 보는 게 뭐야? 친구들이 나를 소경이라고 해. 어떤 게 소경이야?” 그 아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소경이라고 하네. 내가 못 본다고 하는데 도대체 본다는 게 뭐야’ 하며 궁금했습니다.

신비한 영적 세계

여러분, 어린 소경이 눈을 떠서 보기 전에는 그 소경에게 본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 어린 소경은 ‘나는 소경이래. 도대체 보는 게 뭐야’ 하며 아무리 본다는 것을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이 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두 눈이 있어 눈을 떠서 보면 산도 보이고, 나무도 보이고, 꽃도 보여” 하며 소경에게 설명할 수는 있지만 보이는 걸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신비한 영적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사람과 영적이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은 현저하게 차이가 납니다. 영적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몇 십 년 살다 떠날 가장 낮은 육체의 요구를 따라 삶을 다 허비하고 소진합니다. 육체가 ‘먹고 싶다. 마시고 싶다. 즐기고 싶다’라고 요구하는 것에 매인 종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신비한 영적 세계를 아는 사람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인다는 말씀처럼 영으로써 자기 육신의 소욕을 이깁니다. 

믿음의 세계가 있지만

육에 속한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삶에 대해서 하등의 잘못을 모르지만, 영적인 신비한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육에 속하여 육신의 종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불쌍해 보입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육신의 소욕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영적인 사람은 육신에 끌려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안에 예수님이 계셔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신비한 세계를 보는 눈이 뜨여져서 아름답고 고귀하며, 사랑이 넘치는 세계에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합니다. 육신에 속하여 육의 세계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살지?’ 하며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세계가 있지만 믿음을 갖는 사람이 있고, 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 믿음 없는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육체를 이끌어

지난 부활절 예배시간에 미국에서 온 김윤옥 자매님이 암에서 나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암으로 죽어 가다가 저와 통화하면서 점점 몸이 좋아졌습니다. 저는 김 자매님과 통화할 때마다 제가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의 영혼을 깨우고 죽어 있는 심령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김 자매님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서 그의 영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 영은 암을 이겼습니다. 그것이 정말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금도 제 휴대폰 안에는 그 자매님이 보냈던 메일이 저장되어 있는데 그 메일을 읽어 보면 자매님의 믿음이 자랄수록 그의 말과 생각, 그리고 몸의 힘이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육체의 힘과 지혜, 능력 이상으로 우리 마음에서 나오는 신비한 세계가 우리 육체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자동차에 가솔린을 넣듯이

한번은 그 자매님이 항암치료를 하면서 식욕이 떨어져 전혀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이젠 안될 것 같아요. 죽을 것 같아요.” “자매님, 왜 그러세요?” “밥을 거의 못 먹었어요. 항암치료 받느라고 몸이 많이 약해졌고, 입맛이 없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어요.” 저는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살고 싶은데 입맛 없다고 밥을 안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환자가 병을 이기려고 약도 먹는데, 김 자매님은 입맛이 없어 밥을 못 먹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자매님, 자동차는 입맛 없어도 가솔린 넣으면 움직입니다. 자동차에 가솔린 넣는다고 생각하고 입맛 없어도 그냥 드셔 보세요. 힘이 나요.” “아, 그렇네요.” 김 자매님은 그날부터 음식을 탁자 위에도 놓고, 책상 위에도 놓고, 방에도 놓은 후 보이는 대로 음식을 먹고 억지로 씹어 삼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밥맛이 돌아오고 몸도 좋아졌습니다. 종종 아무리 죽어가는 환자라도 생각 없는 사람은 ‘난 죽어도 못 먹어’ 하며 음식을 먹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제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행하는 김 자매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슈퍼컴퓨터와 연결하면

여러분, 성경에는 믿음이 금보다 귀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 그런데 만일 우리가 믿음을 하나씩 배울 때마다 1억 원을 받는다고 하면, 아마 하루에 믿음을 열 개씩 배우려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실제 믿음이 우리 마음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면 천만금보다 귀합니다. 김 자매님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을 때, 친정 식구들은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회의를 하고 여동생에게 돈을 모아 주며 미국으로 가서 언니 김 자매님을 간호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김 자매님의 마음속에 분명한 믿음이 생기니까 암에서 나았습니다. 
저는 자주 슈퍼컴퓨터에 비유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서버인 슈퍼컴퓨터 안에 우리 선교회에 관한 정보를 넣어두는데 그것을 관리해 주는 회사가 따로 있고,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서버에 접속하여 정보를 가져옵니다. 요즘에는 와이파이(Wi-Fi)를 통해 접속하면 서버에서 무엇이든지 뽑아 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슈퍼컴퓨터와 같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이 연결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소망, 기쁨, 평안, 능력, 지혜, 권세 등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이때 믿음이란 내 컴퓨터를 슈퍼컴퓨터인 서버와 연결할 때 입력하는 비밀번호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마음을 연결해 줍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땅’의 의미

창세기 1장을 읽어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하며 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처음엔 그냥 땅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지만 한참 읽다 보니 그 땅이 바로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라는 말씀처럼 사람을 흙(땅)에 비유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30번 정도 나오며, ‘땅’이라는 단어는 15번 나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고 계시는 구나’라고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땅이 어두울 때 빛을 보내시고, 땅이 혼돈할 때 잡아주시고, 땅이 공허할 때 채워주시고, 땅이 고독할 때 꽃을 피워 열매 맺게 하셔서 아름다운 땅으로 바꾸시는데, ‘하나님이 나도 그렇게 이끄시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런 하나님의 신비한 세계를 알고 싶었습니다. 이런 저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면서 예전의 삶을 살고 싶어도 살 수 없게 만드시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잠비아 청소년부 장관의 경우

지난 IYF 한국월드문화캠프에 잠비아 청소년부 장관이 참석하셨습니다. 그분은 IYF를 통해 청소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교육방법을 배우러 한국까지 오셨습니다. 캠프 기간에 복음을 듣고 구원받으신 후에는 그 청소년부 장관이 잠비아 정부에서 IYF 직원처럼 일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잠비아를 방문했을 때는 국빈 대우를 받도록 외무부에서 제 일정을 관리하도록 하셨습니다. 잠비아 정부로부터 아주 좋은 대지 5만 4천 평을 기증받고 그곳에 IYF 마인드교육센터를 건축하면서 건축기술학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잠비아 대통령과 면담을 통해 IYF 건축기술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에게 자격증을 주고, 세계 최고 잠비아 구리광산회사에서 그들을 채용할 계획입니다. 처음에 신입생 30명 모집 공고를 했는데 90명이 접수해 입학 시험 2시간 전부터 대기하면서 입학 시험에 성실히 임했습니다. 잠비아 청소년부 장관이 구원받기 전에는 IYF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가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 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불신으로 낳은 아들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저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난 아들을 못 낳을 거야. 너무 늙었어. 사라도 경수가 끊어졌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아? 이건 불가능해!’ 하며 절망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난 너무 늙어서 불가능하다’라는 사단의 음성이 더 설득력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에게도 자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사라는 “하나님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나의 여종을 통해서라도 후손을 얻어야 하지 않겠소?”라고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식을 나을 수 없다는 형편이 훨씬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는데 그것은 사라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 생각을 따라간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여종 하갈을 통해 얻은 이스마엘과 같이 살고 있었는데 14년 후에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을 낳았습니다. 한 아들은 불신으로 낳은 아들이고, 다른 아들은 믿음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이삭이 자라면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가 “여종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아요!”라고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비록 여종을 통해 얻은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아들이라 내쫓기가 싫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말할 수 없는 근심과 염려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쫓았습니다.

바로 옆의 샘물을 볼 수 없어

하갈은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가다가 물이 떨어지자 방성대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 21:17~18)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까 그가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 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아들에게 마시도록 했습니다. 하갈은 눈이 어두워서 바로 옆에 있던 샘물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곳은 ‘브엘세바’인데 ‘맹세의 샘물’이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자기가 지금까지 먹어왔던 가죽부대의 물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샘물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주셨는데 그것을 볼 만한 눈이 없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눈을 밝혀 주시면 

여러분, 로마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매”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에 제가 도미니카 목회자 모임에서 구원에 대해 말씀을 전하면서 “나는 의롭다”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던 목사님들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들 가운데 한 분이 저에게 “박 목사님은 죄 안 짓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도 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롭다고 하십니까?” “나는 다른 것은 잘 모르는데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기 때문에 의롭습니다.” “어느 성경에서 의롭다고 했습니까?” “노아는 의인이요.(창 6:9)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6)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이렇게 성경 여러 곳에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들에게 “하나님이 재판장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면 의로운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지만 그들의 눈에는 죄인이란 말씀만 보이니까 그 교회 장로님이나 교인들에게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혀 주시면 신기하게도 로마서 3장 24절의 우리를 의롭다 하신 말씀이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욕하는 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눈이 가려진채 신앙생활을 하니까 기도원에 가서 밤새도록 엉엉 울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내 죄가 눈처럼 희어졌다’라는 말씀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 임하면서 우리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예전처럼 살지 않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 창세기 21장에서 하갈은 왜 울었습니까? 가죽부대 안의 물이 떨어져서 울었습니까? 아들 이스마엘이 죽을 것 같으니까 울었습니까? 아닙니다. 하갈은 눈이 어두워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눈을 밝히시니까 바로 옆에 있던 샘물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보는 세계가 전부는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 눈이 밝아지고 보는 시야가 넓어지면서 우리의 삶도 달라집니다. 그렇게 우리 눈이 밝아진다면,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해도 그 어려움을 도우실 하나님이 옆에 계신 것을 볼 수 있으니까 울 필요가 없겠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진 사실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진다면 어떻게 감히 죄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인이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죄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혔지만 우리 죄를 씻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 죄인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본다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이 없으니까 하나님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리라. 저 하늘의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약속을 주셨지만 깊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난 아들을 못 낳을 거야. 이건 불가능해!’ 하며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은 것이 오늘날 이스마엘의 조상입니다. 불신으로 인한 모든 것은 믿음으로 하는 일을 항상 막는 일만 합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이스마엘 때문에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겪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사라처럼 불신을 가지면 재앙과 고통, 슬픔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이 우리의 눈을 밝혀서 물이 없어서 죽을 위험에서 건져주는 샘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눈이 어두우니까 진짜 생명의 말씀이 있는 성경을 읽지 않게 되고, 또 성경을 읽기는 읽어도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지 못하니까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아침, 우리 마음의 눈이 뜨여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본다면 하갈이 샘물을 발견하고 기뻐했듯이 아무리 배고픔과 목마름, 더위가 있어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보이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돈이 아닌 하나님이 전부가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밝고 복된 삶으로 바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눈이 밝아졌을 때

사랑하는 여러분,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그려져 있고 인간의 마음도 그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더럽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처럼 하루아침을 시작합시다. 우리 삶에 말씀으로 빛을 주셔서 어두움을 이기고, 슬픔과 죄악을 이기고, 불행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웃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십시오, 말씀을 들으십시오. 듣고 또 듣고 들으십시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밝아집니다. 우리 눈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이끄실지 보이면서 믿어지면 말할 수 없는 은혜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 2017. 9. 17.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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