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말씀을 가까이할 때 마음 안에 소망과 행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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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씀을 가까이할 때 마음 안에 소망과 행복이
사도행전 15장 1절 ~ 21절 - 2017. 3. 12. 주일 오전예배 설교 - 653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3.1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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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5장을 읽으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5장의 이야기는 실제 초대교회 당시에 발생했던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는데, 하나님이 특별히 ‘이방인의 때’를 주셔서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귀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자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에서는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침을 전했는데, 그들은 구원받은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그들도 율법을 지키고 모세의 법을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다시 예루살렘교회에서 논의했지만 역시 서로 다른 의견으로 오랫동안 다투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분쟁

사도행전 15장에서 논란이 되었던 이 문제는 우리에게 성경 속에 있는 가장 깊은 영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죄를 지어서야 되겠느냐? 선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열심히 주를 섬겨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일차적인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것은 교회에서 인간의 행위적인 면, 즉 율법의 행위를 다시 강조하게 만드는 사단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방인들도 구원받고 교회에 들어 오면 마땅히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는 주장이 있었던 반면에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도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런 분쟁은 예루살렘교회나 안디옥교회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상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더구나 오늘날 구원받은 형제자매 가운데 이런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애매한 상태로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율법을 지키자’는 것과 ‘선하게 살자’라는 주장을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는 주장을 들으면 논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레’

지난 번 저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피지에 갔다가 피지 감리교회의 대표 지도자를 만나서 ‘요한 웨슬레’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영국인 요한 웨슬레는 배를 타고 미국으로 선교를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어느 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배에서 만났던 모라비언들과 계속 모임을 가졌었는데 런던 알데스게이트의 작은 교회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주석)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죄 사함에 대한 확신을 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요한 웨슬레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설교와 전혀 다르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영국의 모든 교회에서 요한 웨슬레가 증거하는 복음을 비난하고 그를 영국 교회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도록 법으로 막았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영국 교회 안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니까 말을 타고 다니며 두 사람만 모여도 전도하였고 마상에서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레에게 ‘마상의 전도자’라는 대명사가 붙었고, 그는 세 사람 이상만 모여도 집회를 하여 ‘옥외 집회의 전도자’라고 불렸습니다. 점차 그를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아지면서 오늘날의 감리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레가 힘 있게 복음을 전했던 성령 충만한 역사가 감리교회에서 이어지지 못하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자 감리교회 내에서는 “요한 웨슬레는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우리도 새벽 5시에 일어나자. 요한 웨슬레는 구제에 힘썼다. 우리도 구제를 해야 한다” 하며 인간이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들어간 신앙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후세에 성경학자들은 그런 일이 있은 뒤 감리교회가 급격히 타락했고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서서히

여러분,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처음 얼마 동안은 정말 기쁘고 행복해서 잠도 오지 않고 성경이 깨달아지면서 계속 감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구원받은 사람의 삶이 서서히 육으로 빠져들게 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구원받아서 모든 죄가 씻어졌으니 이전보다 더 방탕하게 되고 태만해질 수 있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죄 사함을 받았어도 아무렇게나 죄 짓고 살면 안되지 않느냐? 구원받기 전에 우리가 죄를 짓고 악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의 힘 외에 그 어떤 돈이나 정치적인 권력, 수단 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가서는 안됩니다. 즉 교회 안에서는 어떤 목사의 주관이 예수님의 주관보다 강하게 역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진리가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씨’

베드로전서에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으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거듭나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여자가 결혼하여 남편의 씨를 받아서 아기를 낳으면 영광스럽고 복된 일이지만  그 여자가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 아기를 낳은 거라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아기가 태어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느 씨에서 왔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신앙과 접촉시켜 이야기하면, 우리 마음은 원래 악하고 더러운데 그 마음으로 우리가 ‘선하게 살자. 또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각오와 결심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씨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씨를 받아서 아기를 만드는 힘이 나오듯이 구원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씨인가?

여러분, 혹시 말씀을 들었을 때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마음이 만들어지거나,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삶이 달라지는 일을 경험해 본적 있습니까? 어떤 여자가 아기를 낳을 때 그 씨가 누구의 씨냐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근본이 말씀이라면 기쁨과 소망을 주고 싶고, 전도하고 싶고, 주님을 섬기고 싶고, 남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생각은 모두 하나님의 씨, 즉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웨슬레가 세운 감리교회가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점차 세속화 되면서 ‘요한 웨슬레는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어. 우리도 다섯 시에 일어나자. 요한 웨슬레는 구제를 했어. 우리도 구제하자’라는 말은 ‘말씀’입니까 ‘의지’입니까. 예, 인간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말씀을 읽지만 여전히 어려운 형편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야겠다’ 또는 ‘열심히 노력해서 잘 살아야겠다’라고 각오하거나 결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여자가 결혼해서 1년, 아니 5년이 지나도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씨를 받아서 아기를 낳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서 만들어지는 새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요한복음 1장에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1~13) 하며 이는 어떤 혈통이나 육정, 사람의 뜻으로 생기지 않고 말씀에서 나온 순수한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 스스로는 아기를 만들 능력이 없지만 그 여자가 결혼하여 남자의 씨를 받아들이면 새로운 아기가 탄생하듯이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보여 질 때가 옵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거나 빗겨가질 못하는데, 믿음이 적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어릴 때 도둑질을 했지만
 
제가 어릴 때 순학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녁마다 동네 친구들과 그 집에 모여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밤이 깊어지면 도둑질을 했습니다. 겨울에는 주로 곶감 매달아놓은 것 훔치기, 여름에는 과수원에 가서 참외밭 습격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둑질을 해도 남들처럼 하지 않고 아주 착하게 도둑질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외밭에 들어가더라도 절대 그냥 들어가지 않고 발로 더듬어서 참외 순을 밟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참외를 하나 따먹는 것보다 참외 순 밟는 것이 농부들에게는 훨씬 큰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교회를 다니던 제가 17세 나이에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 30분 전에 종 치는 일을 제가 했고, 종을 치고 나면 목사님 사택으로 가서 “목사님 주무십니까? 새벽기도시간입니다” 하며 목사님을 깨워드렸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오늘 저녁엔 순학이네 가지 말아야지’라고 각오하고 결심했지만 항상 저녁에는 순학이네 집에 가 있었습니다. 
제가 구원받은 후에는 신기하게도 저도 모르게 순학이네 집에 가지 않고 그 시간에 집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압곡동이나 장팔리에서 사역할 때 참 많이 굶었고, 겨울이 너무나 추워서 겁이 났지만 하나님이 그런 어려움을 모두 이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구원받기 전과 전혀 다른 제 모습은 어떤 혈통으로나 육정, 사람의 뜻, 즉 인간의 의지나 각오,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으로 새벽에 기도를 드리는 것과 하나님의 이끌림이 아닌 ‘내가 기도를 해야지’ 하며 어떤 내 의지로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율법과 은혜의 법

여러분,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당시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의 교회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다가 ‘이방인의 때’를 주셔서 이방인들도 구원받는 역사가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주님께로부터 돌아서면 당연히 죄를 짓게 되므로 그들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율법을 주고 모세의 할례를 받도록 하는 게 ‘옳다. 그르다’라는 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이런 싸움은 계속 되어 왔고 우리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두 개의 법이 서로 대립하는데 하나는 ‘율법’으로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 실제 사람들이 지킬 수 없는 법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키려 노력하고 지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한 법은 ‘은혜의 법’으로 사람들이 도둑질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각오와 결심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마음에 말씀이 있으면, 성령의 인도함으로 도둑질이나 거짓말 등 죄를 짓는 일이 싫어지게 됩니다. 

어디서 온 것인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 성경 말씀대로 기쁘게 복음을 전하고, 도둑질이나 살인, 간음하지 않고 살면 참 좋은데, 자꾸 세상으로 끌리고 육신의 쾌락을 좇아 음란하고 방탕한 삶을 살게 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란 문제가 생깁니다. 이때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 법을 적용시키려는 사람들을 ‘행위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가 기쁘고 즐겁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은 영적인 것이지만,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작용하지 않는데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하기 위해 의지나 노력, 결심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사단 그리고 우리

여러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고 그 다음은 사단입니다. 사단은 하나님보다 약하지만 인간보다 강하므로 우리가 의지와 각오로 사단인 죄와 싸우면 반드시 무너지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이기려면 하나님과 동맹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면 죄를 쉽게 이길 수 있지만 우리의 각오나 결심으로 죄를 아무리 이기려 수고해도 악한 영, 사단이 우리를 끌면 아무 힘없이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거룩한 것만 있지 어떤 악이나 더러움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 선한 이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선한 행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고 가득 채울 때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가 저지를 죄악과 불의를 이기고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힘

우리가 구원받은 후 귀한 역사도 일어나지만 종종 세상의 유혹을 받거나 죄악에 빠져서 우리 마음이 잘못된 곳으로 이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냉정하게 우리의 생각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내가 죄에 빠졌어. 구원받았는데 악을 행했어. 그럼 나를 다시 악에서 건질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인가? 나인가?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다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정확히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수 있는데 그 말씀이 우리를 죄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깊이 깨닫지 못할 때는 우리가 죄 속에 자꾸 빠지니까 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보다 훨씬 더 지혜롭고 강하며 간교해서 우리를 속여 죄악으로 망할 일인데 쾌락이 있을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주일에 예배드릴 때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지만 세상에 속하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음란하고 악한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걸 우리가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새로운 마음의 세계

구원받은 후 기쁘고 복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기쁨은 하나도 없고 고통과 슬픔, 괴로움만 있다고 합시다. 그럴 때 우리는 기뻐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으로 말씀이 들어와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가 한 평생 갖지 못했던 새로운 마음의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우리가 죄를 이길 힘, 복음을 전할 힘, 이웃을 사랑할 힘, 욕망을 이길 힘을 잃어버리게 될 때 비참해지고 욕망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게 되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는 어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우리가 혼자 처리하려고 애썼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우리에게 크고 작은 문제가 아무리 많이 생겨도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을 보내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평화롭고 복되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호박이 열리는 과정처럼

어린 시절에 담장이나 울타리 사이로 자라는 호박 넝쿨을 보면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어 있습니다. 벌과 나비들이 수꽃에 앉아 꿀을 빨아먹고 꽃가루를 암꽃에다 전달해 주면 호박이 열리는데 비가 와서 벌이 없으면 직접 붓으로 수꽃 가루를 묻혀 암꽃 가루에 발라줍니다. 그럼 얼마 후 암꽃 꽃봉오리 아래에 호박이 자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선한 삶은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있는 악을 제하고 새롭게 할 때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생깁니다. 
여러분, 혹시 구원을 받았지만 육에 속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스스로 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말고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하나님은 아름답고 선하며 행복하고 소망이 넘치는 마음을 말씀에 넣어 두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할 때 우리 마음에 소망과 행복, 그리고 평안과 기쁨이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2017. 3. 12.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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