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 vs 자기 자신을 믿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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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 vs 자기 자신을 믿는 자
[사도행전 14장 8절 ~ 18절] 2017. 2. 19. 주일 오전예배 설교 - 650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2.25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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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 경기에 참가한 손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에 미국에 있는 제 손자가 학교에서 레슬링을 했는데 이겼다며 그 경기 영상을 보내왔습니다. 손자의 키가 180㎝가 훨씬 넘는데 저는 작은 화면으로 보니까 그런지 누가 제 손자인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지 간에 제 손자가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번씩 저 자신을 돌아보면 ‘내가 어떻게 목사가 됐나’ 싶어서 우습기도 하고, 형제자매들이 “목사님! 목사님!” 하면, 속으로 ‘내가 무슨 목사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번은 제가 아내에게 “당신, 좀 더 나이 들면 힘이 없어져요. 지금부터 운동을 좀 해요”라고 했더니 아내는 운동하기 귀찮으니까 “어지럽다. 다리가 아프다” 하며 이유가 많습니다. 귀찮아도 남편이 하는 얘기를 좀 들어주면 좋을텐데 듣지를 않습니다. 저 같으면 죽은 셈치고 남편 말 한번 들어줄 텐데 그걸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저도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지 않고 있는 저 자신을 봅니다. 저도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가 끄는대로 끌려가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저는 형편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가끔씩 ‘내가 무엇을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이것 좀 잘했다’라고 생각하면 꼭 하나님이 불편해 하시며 간섭하셨습니다. 이런 일을 한 번, 두 번, 여러 번 경험하면서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는 걸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단은 제 마음에 끊임없이 ‘난 그렇게 뛰어나진 않지만 잘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도록 계속 속삭입니다. 
한번은 권오선 목사님이 성남교회에서 사역할 때 딸이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했는데, 퇴원하는 날 우리 부부가 권 목사님 가족을 성남까지 승용차로 태워다 주었습니다. 세곡동에서 성남으로 가는 도로에는 중간 중간에 횡단보도가 있었는데, 인적이 드물었습니다. 처음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에 적색등이 켜져서 저는 차를 세웠지만, 다른 차들은 신호를 위반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때 ‘나는 목사니까 교통신호를 잘 지켜’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횡단보도 앞에서 또 적색등이 켜져서 저는 차를 세웠지만, 다른 차들은 또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까지 그런 일이 반복되자 저는 어느새 ‘교통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통 법규를 위반하면서 
 
그러다 성남경찰서 앞에서 분명히 녹색등을 확인하고 진입했는데, 경찰이 저를 부르더니 신호 위반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호 위반 아닙니다. 제가 들어설 때 녹색등이었습니다”라고 주장하면서 경찰과 티격태격했습니다. 나중에는 경찰이 제게 “아저씨, 잘못했다고 한번 해봐요”라고 말해서 “제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겠는데 분명히 저는 녹색등에서 진입했습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그 자리에서 30일 면허정지에다 벌금 3만 원 스티커를 발부한 후 버스를 타고 도망치듯 가버렸습니다. 
종종 운전을 하다보면 도로에서 교통경찰과 다투는 사람들을 봤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그렇게 제 마음을 간섭하셨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경험으로 ‘우리가 잘했다’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도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해야지 싶지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둔해도 이건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원주로 가는 길에

수십 년 전, 우리 가족이 원주로 가다가 생긴 일입니다. 그 당시 원주 가는 길은 2차선이고 중앙 분리대가 없어서 추월을 하려면 중앙선을 넘어가야 하는데, 관광버스 한 대가 우리 차를 바짝 따라오면서 비키든지 아니면 빨리 가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저는 제한 속도가 80㎞인 2차선에서 90㎞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뒤에서 뭐라고 하든지 계속 달리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라이트를 켜면서 우리 차를 아주 가까이 밀어붙였습니다. 제가 피할 만한 곳으로 갔었는데, 마침 커브길이어서 건너편 차가 우리 차선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으면 뒤에서 오는 버스와 부딪힐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마주오는 차와 부딪힐 것 같아 그날 ‘난 죽었다’라는 심정으로 핸들을 돌려 가까스로 차를 피하고 가슴이 너무 떨렸습니다. 그래서 차를 갓길에다 세웠습니다. 잠시 후 뒤쫓아오던 버스가 앞서가기에 ‘저 버스 운전사 그냥 안 두겠다’며 바짝 뒤쫓아 갔습니다. 한참 따라가니까 버스 운전사가 차를 세우기에 저도 차를 세웠습니다. 

 버스 운전사와 언쟁을

모범운전이라는 완장을 찬 운전사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제게 “도대체, 운전을 왜 그렇게 합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너무 화난 나머지, 제가 목사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란 사실을 잊은채 “왜 안전거리 안 지켰어요? 당신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요”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들이받지 않았으면 안전거리 지킨 거 아니요?”라고 답했습니다. “무슨 소리에요? 2차선 도로에서는 80m, 4차선 도로는 100m! 차간 거리, 교통법규에 나와 있는데 모범운전사가 그런 법규도 몰라요? 돈으로 모범운전사 땄지요?” 하며 다시 소리질렀습니다.
우리 애들은 겁이 나서 승용차 안에서 벌벌 떨고 있고, 아내는 “여보, 저 차에 당신 설교 들은 사람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요”라며 말렸지만 제게는 그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 좀 가만히 있어. 우리 애들과 내가 죽을 뻔했어!”라며 한참 고함을 쳤습니다. 버스 안내양까지 내려 말렸는데, 그때 갑자기 ‘너는 하나님 믿는 목사잖아’라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벌여 놓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정말 난감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경험 있으세요? “예.~”(함께) 정말 마무리가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제가 운전사에게 “큰소리쳐 미안한데, 잘 가십시오”라고 사과를 했습니다. 그분도 제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갔습니다. 제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형편없는 인간이 됐을 텐데, 예수님이 제 마음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셨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하면서 루스드라라는 곳에 갔습니다. 그곳에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본 적이 없는 자라”(행 14:8) 하는 태어나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하고, 남에 의해서 이끌려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이 설교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에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행 14:9) 믿음이라는 것은 마음 안에서 형성된 것인데, 그가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믿음을 가진 것을 바울이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입니다. 
또 마가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네 명의 친구들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침상을 들고 그 집 지붕을 뜯어내고 예수님이 서 계신 방에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을 달아 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냐면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마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봤습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 왔을 때 ‘중풍병이 안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면 절대로 지붕을 뜯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는 ‘예수님 앞에 나가면 병을 고치겠구나!’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 계집종의 믿음

우리가 주일날 아침에 교회 와서 이렇게 한 시간 말씀을 듣는데, 이 말씀이 믿음으로 여러분 마음에 자리잡는 것과 믿음 없이 그냥 말씀이 머리에 남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아만 장군 이야기를 귀가 아프도록 여러 번 들었고 읽기도 했습니다. 나아만 장군 집에 있는 그 계집종에게 믿음이 없었더라면 포로로 잡혀온 그 자체가 불행이어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기한도 없이 한평생 종노릇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왜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 포로로 잡혀 왔지? 도대체 하나님은 살아 계신 거야?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하며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 계집종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마음과 가까워지면서 계집종의 마음속에 있던 절망이나 슬픔,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그 계집종의 마음에 ‘이 일이 슬픈 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 이 일을 복으로 바꾸실 거야’ 하며 소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남보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면
 
만일 우리 자신이 남들보다 잘났고, 옳은 사람이며 무언가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면 ‘나’라는 존재가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내 생각이 점점 커지면 사람들은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기를 무척 싫어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 말씀이라도 내 생각에 맞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맞지 않은 부분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말씀이 내 생각과 달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난 도로교통법을 잘 지켜. 난 운전을 잘해, 난 성실하게 목회를 잘해”라고 생각하면 서서히 그 생각이 세워지고 견고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 내가 옳은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루스드라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바울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 하나가 마음속에 들어가 믿음을 일으켰습니다.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행 14:10) 이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자기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까? 

그른 사람이 되면 어떤 일이? 

여러분, 신앙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는데 내가 볼 때 안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말씀 그대로 순종하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른 사람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열왕기하 5장에 나아만 장군에게 계집종이 말합니다.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가면 문둥병이 낫습니다.” 그 말을 할 때 만약 나아만 장군은 자기가 옳은 사람이면 계집종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문둥병에서 나아 보려고 많은 의사를 찾아가 보았지만 고치지 못했기 때문에 계집종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옳은 사람이 되면 자신을 믿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이 옳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각과 다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를 믿는 사람입니다. 

왜 내가 포로가 되었을까? 

나아만 장군의 계집종은 형편만 본다면 포로로 잡혀와 종살이 하는 모습이지만, 그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믿어 소망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전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계집종에게 믿음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왜 나를 포로 되게 하셨는가?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 주시려고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에게 이스라엘 선지자를 찾아가면 문둥병에서 낫는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 낫고 아람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아마도 나아만 장군은 군 장성회의에서 “여러분, 아시는 분은 아셨겠지만 나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문둥병을 감춰보려고 애쓰고 냄새 날까봐 향수도 많이 뿌리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잡아온 계집종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 선지자에게 가서 문둥병이 나았습니다”라며 간증할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를 낫게 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장성들에게 “진급을 하려면 반드시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의 사고 수준이 훨씬 앞서기 때문에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계집종 한 사람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믿음의 터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무서운 표범

옛날 아프리카 정글에 추장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추장은 아이들이 새끼 표범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건 표범이야. 이 표범이 크면 사람을 해치게 돼. 그래서 죽여야 돼”라며 창을 들고 표범을 찔러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추장님, 표범을 살려 주세요. 이 표범에게 고기를 먹이지 않고 죽만 먹였어요. 그래서 아주 순해요.” “안돼, 죽여야 돼.” “추장님, 표범한테 앞으로도 죽만 먹일 테니 제발 죽이지 마세요.” 추장은 사정하는 아이들을 보며 너무 섭섭해 할까봐 표범을 살려줬습니다.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추장님은 괜히 그러셔. 죽만 먹여서 이렇게 순한데.”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세 아이들과 표범이 산언덕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제일 앞서 가던 아이가 돌을 밟으면서 굴러 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길을 돌아가는 동안 표범이 먼저 뛰어 내려갔습니다. 아이가 넘어지면서 무릎을 다쳐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 표범이 그 피를 혀로 핥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범이 피 맛을 느끼면서 잠자고 있던 야성이 솟구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피를 핥는 것이 아니고 빨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만족이 안되어 결국 아이 가슴을 찢고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마저 잡아먹었습니다. 표범이 죽만 먹을 때는 그 야성이 덮여져 있어서 순해 보였지만 표범이 피 맛을 보게 되면서 본능이 깨어나 잔인한 표범으로 변했습니다.

육신의 욕구가 숨어 있다가

우리 마음에도 죄의 속성인 육신의 쾌락, 욕망 그런 것들이 잠자고 있다가 기회가 되면 빠르게 우리 삶을 육신으로 끌고 갑니다. 이런 육신의 욕구가 우리 자신을, 날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께 드리고 싶고, 우리 생명을 드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잡아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되면 마지못해 교회에 가는 형식적인 교인으로 만들고, 성경 한두 절 읽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예전에는 형제자매들이 가난해도 자신이 가진 전부를 복음을 위해 드리는 귀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이정도 선교사님이 오셔서 코트디부아르 교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안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남편의 월급 전부와 아내 월급의 절반을 복음을 위해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그 후 그 부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받는 것을 보면서 많은 형제자매들이 똑같이 복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만 축복 받은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루스드라에서 전할 때 나면서 앉은뱅이인 사람이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앉은뱅이가 되어 멸시받고 헐벗고 어렵게 살았던 그였는데 바울이 전하는 말씀이 마음에 들어와 오랫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그 영을 깨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그렇구나. 내 죄가 이렇게 사해지는구나. 내가 거룩하구나. 내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네. 그럼 이 앉은뱅이도 고치겠구나. 그 전능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한 그 앉은뱅이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기니까 얼굴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치시는 주님이 동일하게 우리 속에 일하고 싶어하십니다. 

바울의 말씀을 받아들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세계를 만드시길 원하십니다. 앉은뱅이는 못 배우고 멸시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 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여 믿음대로 역사해서 그의 삶을 복되고 영광스럽게 만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흘러가 육신에 빠져 먹고 사는데 급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마음에 주님의 말씀이 들어와 지배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우리 삶을 열매 맺는 귀중한 삶으로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 2017. 2. 19.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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