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관원장의 꿈에 내포된 영적인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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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관원장의 꿈에 내포된 영적인 의미는?
[창세기 40장 9절 ~ 23절] 2017. 1. 8. 주일 오전예배 설교 - 64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7.01.13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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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부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힘이 생기고 그 힘이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사단의 음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도둑질 하지 않고, 간음 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 아내는 결혼하기 전에 어떤 나쁜 짓을 했다”라고 남편에게 이야기하는데 만일 남편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바로 그 순간 아내를 의심하게 되면서 결국 부부 사이가 파탄이 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믿는다면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그래? 나는 아내와 10년을 살았어. 누가 내 아내를 더 잘 알 수 있을까? 내 아내는 완벽하지도 않고 허물도 있지만, 나는 아내를 그런 여자로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 너,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니 아주 대담하고 나쁜 놈이네. 내가 너 같이 나쁜 놈이 하는 말을 내 아내보다 더 믿는다면 바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도 죄인데
 
신앙의 세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우리가 도둑질이나 간음, 살인은 죄로 여기지만 두려움을 죄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1장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8:8)라며 두려워하는 것은 큰 죄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난해질까 봐 두려워 도둑질을 합니다. 그리고 여자를 강간한 남자는 붙잡힐까 봐 두려워 그 여자를 살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정확하게 믿는 믿음이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 마음에 없던 하나님을 모실 수 있고,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당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기쁨과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으로 암을 이긴 자매님
 
그동안 제가 자주 말씀드렸지만 미국 켄사스시티에 사는 김 자매님은 작년 12월 25일 댈러스 겨울캠프에 오셔서 암에서 나은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2008년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2015년에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저와 여러 번 통화를 하면서 말씀을 듣고 믿음을 얻어 병에서 깨끗이 나았습니다. 
한번은 그 자매님이 항암치료를 하면서 식욕이 떨어져 음식을 먹을 수 없을 때 제게 전화했습니다. “목사님, 이젠 안될 거 같아요. 밥을 못 먹어요.” “자매님, 왜 밥을 못 먹었죠?” “입맛이 없어요.”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자매님, 자동차는 입맛 없어도 휘발유 넣으면 움직입니다. 입맛 없어도 드셔 봐요. 힘이 나요.” “아, 그러네요.” 약 1주일 지나니까 자매님은 밥맛이 돌아오고 몸도 좋아졌어요. 또 한 달쯤 지나서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이번에는 안될 것 같아요.” “왜요?” “위경련이 일어나서 못 견디겠어요.” “자매님, 암환자만 위경련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도 위경련 일어나지만 죽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러네요.” 
그 자매님은 저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제가 말하는 대로 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서 자매님에게 “어떻게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믿고 안 믿고 따질 상황이 아닙니다. 암으로 죽어 가는 상황에서 목사님이 해 주시는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바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매님은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런 상태에서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참 많은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씨에 비유한 하나님의 말씀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시길 원하십니다. 베드로전서를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씨로 비유한 것인데 그 씨를 가마니에 넣어 창고에 두면 일 년이든 백 년이든 그대로 있거나 썩어 없어져 버리지만 만일 그 씨를 땅 속에 묻어 흙을 덮어주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줄기가 생겨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편의 씨를 받아들이면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듯이 하나님의 말씀, 즉 씨가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새로운 마음의 세계를 만드는데, 하나님과 똑같은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만듭니다. 그러면 그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관원장 2명의 꿈 이야기
 
오늘 읽은 창세기 40장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왕 앞에 술과 떡을 들고 나아가 드리는 일의 관원장이니까 출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0장 1절에는, “그 후에 애굽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 주 애굽왕에게 범죄한지라”라고 기록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왕 앞에 죄를 짓고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있었는데 마침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이 그 감옥에 요셉을 가두자, 요셉을 만난 후 자신들이 꾸었던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은 똑같이 꿈을 꾸었는데 꿈의 해석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해 술 맡은 관원장의 마음과 떡 굽는 관원장의 마음을 정확하게 그린 것입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듣고 “당신은 삼 일 안에 왕이 당신을 불러서 전직을 회복하고 술 맡은 관원장이 되겠습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의 꿈도 비슷해 보이는데 전혀 다르게 해석했습니다. “당신은 사흘 안에 왕이 당신의 목을 베서 나무에 매달 것입니다. 새들이 공중에서 날아와 당신 고기를 뜯어먹습니다.” 여기 떡 굽는 관원장의 꿈에서 흰 떡 세 광주리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서 포도나무 세 그루인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꿈에 나타난 영적 의미
 
저는 창세기 40장을 계속 읽으면서 이 꿈을 생각하는 동안 제 마음에 영적인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은 술잔을 가졌지만 그 안에 술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그 앞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래서 그 즙을 짜서 왕에게 드렸더니 바로가 그 잔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흰떡 세 광주리 위에 각종 구운 식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바로 앞에 갔는데, 바로가 그것을 받지 않고 공중의 새가 먹어버렸다는 겁니다. 
이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과 저주하는 마음을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바로의 잔에 채울 게 없어서 포도나무에게서 꽃이 피고 열매가 익은 것을 보고 그 즙을 바로의 잔에 갖다 드렸다고 했는데 이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는 자기가 잘한 것이나 선한 것, 못한 것, 악한 것을 전혀 보지 않고, 포도나무가 왕 앞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히브리서 10장에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하며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만을 받으시기 때문에 포도나무 세 가지는 요셉이 해석한대로 사흘 안에 전직을 회복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길들이면
 
사람의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야생마처럼 제멋대로 달려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 방탕한 삶을 살다가 결국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말을 길들일 때, 처음엔 힘이 들지만 일단 길들여 놓으면 먼 길을 갈 수도 있고 유용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쉽진 않지만 어린아이 때부터 마음을 조금씩 길들이기 시작하면 말을 길들여 사용하는 것보다 백 배, 천 배 아니 만 배는 더 유익합니다.
저는 아들이 어렸을 때 저에게 “아빠, 사탕!” 하면 사탕을 사주었습니다. 또 “아빠, 아이스크림” 하면 그것을 사주었습니다. 제가 어느 날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아들이 어릴 때는 사탕과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하겠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아빠, 사탕! 아이스크림!” 하진 않을 것입니다. 아들이 열한 살 정도가 되면 “아빠, 롤러스케이트”라고 할 것이고 열다섯 살이 되면 “아빠, 스마트폰!”, 스무 살이 되면 “아빠, 자동차!”라고 할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욕구도 함께 자랍니다.
 
욕구를 다스리는 법
 
제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점점 커지는 아들의 욕구를 다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나중에 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아들이 뭐라고 할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아들은 아마 “에이, 나는 목사 안할 거야. 우리 아빠는 돈을 못 벌어. 아빠는 정말 무능해! 난 돈을 많이 벌 거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의 욕구가 자라는 것에 대해 조금씩 자제하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아빠, 사탕!”이라고 해서 사탕을 사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아빠, 사탕!” 할 때는 “오늘은 안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계속 저에게 사탕을 사달라고 조릅니다. “아빠~” “안돼!” “아빠~아” “안돼! 네가 대통령이 되도 네 마음대로는 다 할 수 없어. 세상 일을 네 마음대로만 하려고 하면 너에게 큰 문제가 생겨.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참는 법을 길러야 돼!” 이렇게 아들이 원하는 것 중 몇 가지는 일부러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들은 차츰 자기를 다스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닐때
 
오래 전 아들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다른 친구들은 주말에 모여 좋은 차를 몰고 스키를 타러 갔습니다. 친구들이 다녀와서 제 아들에게 “영국아, 스키 정말 재밌었어. 너도 같이 가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아들은 미국의 한 교회에서 지냈는데, 친구들과 함께 스키 타러 가고 싶었지만 주일에 예배도 드려야 하고 차량 운행과 청소도 해야 해서 갈 수 없었습니다. 주말에 스키를 타러 간 친구들은 주말 내내 스키를 타고 놀다가 월요일에는 학교에 가야 하는데 “스키 너무 재미있다. 우리 이번 월요일은 수업 빠지고 스키 탈까?”라며 월요일에도 스키를 탑니다. 스키가 너무나 재미있어서 그 다음에는 화요일까지 스키를 타고 수요일에 학교를 갑니다. 
드디어 졸업식 날에 모두 졸업장 봉투를 받았습니다. 아들의 봉투 안에는 졸업장이 들어 있었지만 친구들 봉투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졸업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들이 졸업장을 들고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 어려서부터 제 욕구를 자제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덕분에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 
 
여러분,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어느 날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은 ‘내가 술 맡은 관원장이 되었는데 거드름 피우고 왕을 소홀히 여긴 죄로 감옥에 왔구나. 내가 한 일이 내게 좋아 보이고 잘될 것 같았지만 결국 나를 망하게 했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만 내가 믿을 수밖에 없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술 맡은 관원장과 똑같이 감옥에 들어왔지만 ‘난, 잘할 수 있어. 난 뛰어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니까 흰떡 세 광주리를 덮을 만한 자기 방법과 길이 있었던 겁니다. 흰떡 되신 예수님이 좋긴 하지만 그 예수님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자기 눈에 보이는 제일 위에 각종 구운 식물을 놓아서 예수님을 덮어 버리고 자기가 그 위로 올라선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처럼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교회 안에 두시고 사마리아 여자의 마음과 같은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 여자는 지금까지 방탕하게 살면서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고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자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자신이 틀린 사람이 되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만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수분이 필요해서 목이 마르면 물을 먹고 싶은 증세가 일어나므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라는 말씀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은 사마리아 여자 자기 생각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발견하여 변화를 입었습니다. 
 
포도나무와 흰떡 되신 예수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분석해 보면, 거기에는 포도나무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잘한 것은 전혀 없고 포도나무와 그 소산만 들고 바로 앞으로 나아가길 원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저도 제가 잘했다는 생각을 하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지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정말 무익하고 더러운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결과는 술 맡은 관원장처럼 저주를 받고 멸망 받을 짓만 했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한 것은 다 버리고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 하신 것만 들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떡 굽는 관원장은 자기를 자랑할 게 많아서 흰떡 세 광주리 되신 예수님 위에 자기 것을 올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아침 냉정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술 맡은 관원장과 같습니까? 아니면 떡 굽는 관원장과 같습니까? 혹시 떡 굽는 관원장처럼 하나님이 내게 귀한 일을 하셨지만 ‘그래도 나는 잘한 게 있어. 흰떡 위에 올려놓을 구운 식물들이 있어’라는 마음을 갖고 계시진 않습니까? 자신이 잘하는 사람이 되면 교만해져 교회와 하나님의 종이 시들해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무시하게 되고 예수님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떡 굽는 관원장처럼 멸망하는 길을 걷게 됩니다. 
이튿날이면 왕의 잔칫날인데 감옥 앞에 있을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두 가족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아내는 아이들에게 단정하고 깨끗한 양복을 입히고 손에 꽃다발을 들고 “오늘 아버지께서 나오신다. 가보자” 하며 감옥 앞에서 얘기하며 기다립니다. 감옥 문이 열리면서 아이들이 “아버지! 아버지!” 하며 달려가 끌어안고 웃으며 이야기합니다. 한편 떡 굽는 관원장의 가족들은 감옥 문 앞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아버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교도관을 따라갔습니다. 나무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데 아내는 차마 아이들에게 보일 수 없어서 눈을 가렸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주님과 다른 생각을 한 결과 때문에 자신에게나 가족들에게 절망과 슬픔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주님 앞에 겸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 혹시 떡 굽는 관원장처럼 ‘난 이런 선을 행했어. 이렇게 정직했어. 교회에 충성했어. 이것을 제일 꼭대기에 올려놓아야 해’라는 마음을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정말 싫어하십니다. 이제 그런 마음을 버리시고 ‘나는 무익해. 저주를 받고 멸망 받을 사람인데 예수님이 값없이 죄를 씻어 주셨어’ 하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어 주님을 높일 때 술 맡은 관원장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시지, 떡 굽는 관원장 같은 사람에게는 섬김을 받으려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구원받았다고 하는 형제자매들이 점점 작은 유혹에도 넘어가 주님을 섭섭하게 하고, 쉽게 자신을 죄악에 내어주고 방탕하게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는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 바랍니다. 예수님만 높이시게 되길 바랍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영광스러운 왕을 섬기는 그 귀한 직분을 얻은 것처럼 우리가 무익한 자가 되어서 주를 섬기고 영광스러운 그 자리에 함께 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 2017. 1. 8.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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