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론자였던 내가 목사가 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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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였던 내가 목사가 되다니…
믿음의 선진들(Ⅵ)/ 리처드 범브란트(上)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9.04.26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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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으로 지낸 젊은 시절

나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생후 1년이 되기도 전에 고아가 되어 어린 시절부터 기쁨을 모르고 자랐다. 14살이 되었을 때는 여느 공산주의자들처럼 확고한 무신론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에게 해롭다고 생각하고 종교에 대해 증오를 가졌다. 또한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설교가 내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신론이 내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견디다 못해 어느 가톨릭 성당에 들어갔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처럼 무릎을 꿇고 그들이 하는 말을 따라서 기도를 했지만 나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것은 나를 무척 슬프게 했다.
그 후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나는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당신이 계신다고 가정한다면 당신을 믿는 것은 내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에게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당신의 의무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고

어느 날 루마니아에 있는 1,200여 개의 마을 중 한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 마을의 어떤 목수는 내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열정적으로 환대하며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목수가 “죽기 전에 유대인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늙고 병들어 유대인을 찾아 떠나갈 수 없으니 한 사람을 우리 마을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던 것이다.
예전에도 호기심에 성경을 몇 번 읽어보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죄로 물든 나의 삶에 비해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니 눈물만 날 뿐이었다. 나의 인품이나 성격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나와 내 아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복음을 전했고, 신교와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극단적 정통보수의 성향을 지닌 나치가 몰려와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가 매를 맞기도 했다. 나치가 주는 신체적 고통은 컸지만 뒤이어 공산주의자들이 가지고 올 고통에 비하면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무서운 고통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후에 다가온 더 큰 시련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다음에 계속〉


정리/ 정민승 기자 mins8003@good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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