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요셉처럼 주를 섬기며 사는 복된 삶을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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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요셉처럼 주를 섬기며 사는 복된 삶을 살아야
[창세기 45장 1절 ~ 15절] 2022. 2. 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899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2.02.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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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요셉 이야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우리는 창세기의 요셉에 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요셉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자신들을 찾아온 요셉을 보고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버렸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게 됩니다.
제가 한번은 애굽으로 끌려가는 요셉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손발이 묶인 채 나귀를 탄 상인들에게 끌려가는 요셉. 굶주리고 목이 말라도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고 신발도 다 벗겨져 맨발로 걸어가야 하는 그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까요.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항상 함께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

요셉은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갔다가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쳤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을 전옥에게 신임을 얻게 하셨습니다. 또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게 하시고 그 일로 말미암아 바로의 꿈까지 해석하게 되면서 드디어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이 총리가 된 후 바로의 꿈을 해석한 대로 애굽 땅에 7년 풍년과 7년의 흉년이 왔습니다. 하지만 애굽은 요셉 덕분에 이를 대비해 창고에 양식이 가득했습니다. 이에 각 나라에서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형들 또한 양식을 구하러 애굽으로 올 것을 알고 그들을 구원해 함께 살 계획까지 이미 마음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관점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새롭게 성경 말씀을 볼 수 있게 합니다. 저는 1976년에 선교학교를 시작해 지금까지 선교 학생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셀 수 없는 성경 말씀들이 제 마음속에서 부딪히면서 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볼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중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똑같은 성경이라도 서로 다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에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출 19:5~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언약 즉 율법을 온전히 지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착각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 28:15~19)라는 신명기 말씀처럼 율법은 지키면 복을 받지만 어기면 저주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을 어겨왔으면서도 앞으로 잘 지키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며 여전히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한 비유를 들어 이 부분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 10:30~36)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여러분, 여기서 강도 만난 자를 구원하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즉 강도 만난 자를 구해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사는 자신이 사마리아인처럼 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관점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우리의 정확한 위치 

여기서 강도 만난 자는 율법을 어겨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우리는 사마리아인에게 긍휼을 입어야 하고 그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인데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마리아인이 되려는 것은 하나님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른 관점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인간적인 생각으로 흘러갑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거역했으면서도 자신이 잘한 게 있다고 생각하고 또 잘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구원자의 위치에 두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이지 그의 구원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긍휼을 입고 은혜를 입어야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뭘 해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단은 이 땅의 수많은 기독교인 특히 성경을 가르치는 인도자들을 속여서 잘못된 가르침으로 마치 우리가 남을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모습

여러분, 성경에는 구원자와 피구원자로 나눠져 있는데 우리는 강도 만난 자처럼 피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강도 만난 자가 구원을 받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사마리아인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손끝만큼이라도 우리의 것이 더해지면 그것은 참된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인데 내가 일하지 않고 값없이 받는 것이 은혜입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45장에서도 요셉은 은혜를 베푸는 구원자이고 형들은 은혜를 입는 자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은혜를 입기 위해 한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요셉을 구덩이에 던지고 상인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고 그 형들이 양식을 사러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들이 찾아왔을 때 자신들의 죄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풀어주고 은혜를 베푼 것 또한 요셉이었습니다. 전부 요셉에 의해 된 것이지 형들이 무언가를 해서 된 것은 없습니다.

형들을 위하는 마음

요셉은 양식을 사러 온 형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도망가면 결국 그들의 가족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요셉인 것을 숨기고 시므온을 가둬 놓고 양식을 주면서 요셉의 친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형들이 가나안에 돌아간 뒤에 양식이 다 떨어지자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요셉은 비로소 형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리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형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온 마음으로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5~8) 분명 자신을 죽이려 하고 상인에게 팔아버린 형들을 미워해야 하는데 요셉은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형들이 그동안 자신으로 인한 부담을 다 내려놓고 한 가족으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요셉이 그들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를 다니던 시절

우리는 요셉의 형들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면 우리 마음에 행복과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 죄악 속에서 살았고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해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구원을 받고 난 후 죄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제 삶을 이끄셨습니다. 
1962년 10월 7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제 모든 죄가 사해진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문제는 교회 목사님, 장로님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는데 저 혼자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받은 후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그동안 배운 것이 말씀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죄인으로 알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했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저녁, 성가 연습을 마치고 제가 앞으로 나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가대 청년들이 모두 깜짝 놀라며 우리도 죄가 있는데 어떻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느냐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 저는 죄 사함의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고만 이야기하고 다녔습니다. 한 달쯤 지나자 제 소문이 교회에 퍼지게 되면서 목사님이 저를 교회에서 소외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따돌림을 받으면서 교회에 다니기 어려워지던 때에 마침 외국인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선교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선교사들이 본 한국교회

제가 선교학교에 들어갈 당시 한국에 약 520명의 외국인 선교사님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거듭난 선교사님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는 성도들이 열심이 있어 부흥이 잘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거듭난 사람들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이 모여 2주간 금식기도를 하며 현지 목회자를 양성하는 선교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제가 그 학교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는 거듭난 성도의 교제가 있었고 말씀이 너무나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당시 선교학교 기상 시간이 6시였는데 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담 밑에서 무릎을 꿇고 2시간 동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끌고 계신 것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선교학교를 마친 후 다른 동기들은 불러주는 교회가 있었는데 저는 오라는 곳이 없어 경남 합천의 압곡동이라는 시골 마을에 들어가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너무나 가난한 마을이라 굶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제가 그 마을에서 9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많이 굶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살아 일하시는 것을 너무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교학교의 시작 배경

압곡동에서 지낸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손을순 자매님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자매님의 남편은 시각장애인이고 아이들 셋을 키우며 정말 어렵게 사는 분이었는데 구원을 받으시고 삶이 얼마나 변하는지…, 나중에는 그분 남편이 구원받고 주변에 구원받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 군 제대 후 1969년부터는 김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여름마다 어린이 성경학교 강사를 모집해 전국의 교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교회에서 저를 부흥회 강사로도 초청했습니다. 보은 장로교회, 산청군 생초교회, 진천감리교회, 성주 이곡교회 등 제가 잊을 수 없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보은 장로교회는 제가 대전을 들를 때마다 찾아가 성도들과 신앙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고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들의 신앙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죽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 평생 복음 전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려고 했는데 그런 일들을 보며 구원받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양육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76년에 대구에서 우리 선교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누가 봐도 우습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그곳에서 우리 사역자들이 배출되고 복음 전도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의 마음을 알지 못해

오늘 읽은 말씀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난 장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형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분명 요셉에게 형들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있어야 하는데 요셉의 마음 어디를 봐도 그런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형들을 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저주하거나 망하게 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은혜를 입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던 형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하나가 되기를 원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형들은 요셉의 마음을 알고 하나가 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요셉이 정말 간곡하게 형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지만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니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창 50:15)라며 걱정을 하게 됩니다. 그런 형들을 보며 요셉은 눈물을 흘립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 50:21)라고 이야기하며 형들을 위로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를 범한 악한 인간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된 삶을 사는 방법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요셉의 마음을 모르는 형들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시면 어떻게 하지? 나를 저주하시면 어떻게 하지? 나를 어렵게 하시면 어떻게 하지?’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정말 허물이 많고 부족하며 연약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마음껏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은혜를 입은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죄와 허물을 은혜로 다 덮으셨습니다. 그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복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그 사랑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은혜를 입어야 하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복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가운데 악을 행하지 아니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다 더럽고 추하고 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누가 은혜를 입습니까? 죄를 지은 사람, 악을 행한 사람, 더러운 사람, 추한 사람, 율법을 어긴 사람, 이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복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입는 것은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도 아니고 전도를 잘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족함이 없도록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는 주님의 은혜 앞에 담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심판이 끝났고, 저주가 끝났습니다. 이제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형들은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말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우리가 악을 행했지만 결국 하나님이 모두 선으로 바꾸셨네. 이제 우리가 뭘 해야 하지? 그래 요셉과 마음을 같이 해야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음을 같이하는 것, 즉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한 복을 베푸시고 여러분의 가족들이 거듭나도록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이 놀라운 복을 우리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다 받을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전합시다. 
또한 요셉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도 요셉처럼 모든 일을 주님이 주신 것으로 받으며 주를 섬기는 삶을 삽시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복되게 하시고 우리 장래를 다 책임지는 예수님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나와 주의 은혜를 입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
- 2022. 2. 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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