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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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뀌어야
2006.9.24 주일 낮 설교 요약- 121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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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을 읽어보면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예수님의 족보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이 복음의 말씀을 전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을 받아들여 복을 받고 은혜를 입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심판을 받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성경을 읽을 때는 그냥 줄거리만 알았는데, 이제는 점점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읽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왜 이렇게 됐을까?’ 하고 생각을 하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알 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그냥 삼켜버리면 소화가 안 되고 병이 됩니다. 이로 꼭꼭 씹어서 침을 섞어 삼켜야 그것이 소화가 되면서 우리 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조금씩 묵상해보면 ‘아, 이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구나. 이 이야기는 바로 나를 가리키는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듭니다.
성경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성경을 읽다 보면 내 마음의 모습이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이렇기 때문에 환란이나 문제가 내게 왔구나’ 하는 것을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사단의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어그러지고 죄악에 물든 세계가 있고 그것과는 다른 예수님의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세계, 즉 하나님의 귀한 섭리와 뜻을 발견하기 전에는 ‘나’라는 사단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보다 지능이 훨씬 높기 때문에 늘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그런데 욕망, 음란, 명예를 미끼로 끄는 사단을 따라가다 보면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한때는 잘되는 것 같다가도 절망 속에 빠지면서 세상을 떠날 때엔 결국 실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사단의 궤계보다 높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마음에 받아들이면 사단의 궤계에 빠져들지 않게 됩니다.

의지로 하는 신앙

마태복음 25장에 양과 염소를 나누는 내용에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런데 의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마 25:37~38)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으면서 ‘아, 그러면 지극히 작은 소자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병들었을 때 도와주고, 굶주릴 때 먹여주는 이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겠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입니다. 의지는 감각을 가지고 의식을 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야

하지만 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은 의지와 상관없이 되어지는 일입니다. ‘숨을 쉬어야지’ 하고 결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 즉 결심이나 각오를 믿습니다.  ‘내가 이제 나그네를 도와줘야지. 병든 사람을 돌보아줘야지.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줘야지’ 하면서 인간에게서 나오는 의지로 교회에 나가고 연보를 하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국화가 꽃을 피우려고 결심해서 피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피는 것입니다. 마치 국화나 장미가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는 것처럼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으면 ‘음란한 마음이 일어나지만 간음하지 말아야지’, ‘내가 가족을 사랑해야지’, ‘주일예배 참석해야지’ 하고 의식하지 않아도 마음이 평안해지고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과 내 의지나 결심에서 나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의지는 무너질 뿐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제자들에게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했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의 의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날 밤 닭 울기 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렸습니다.
내가 옥에 갇힌 자를 돌보아주려는 마음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습니까? 모든 인간의 마음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해 사단이 제공해주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 미움과 더러움, 음란과 가증함 등 갖가지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의 많은 목사님들이 사람의 의지를 일으키는 설교를 합니다. “우리는 충성해야 합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야 복을 받습니다.” 사람들의 각오나 결심으로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힘이 있겠습니까? 아무 힘없이 무너질 뿐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기독교인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습니까? 사람들이 기독교인 하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듭니다. 동네에 예배당이 들어서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집값 떨어진다고 다 반대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인들의 마음은 악하고 추한데 자꾸 선을 행하라고 하니까 위선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악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웃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위선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교회가 호의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는 마음을 비워야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과 오른쪽에 있는 자들의 대화를 살펴보세요.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내가 굶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다.” “어느 때에 그렇게 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 ‘앞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해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실제로 나그네를 한번 대접해 보십시오, 그게 쉬운가. 나그네가 목욕을 자주 했겠습니까, 머리를 자주 감았겠습니까? 발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겠습니까? 한두 번 하다가 ‘나는 못하겠다. 때려치우자’ 다 그렇게 됩니다.
병든 자를 한번 돌봐줘 보세요, 끝이 있는가. 한두 번 넘어 몇 번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다음부터는 지쳐버려요. 옥에 갇힌 자에게 한두 번 찾아 가다가 “저 녀석은 옥에 갇혀야 마땅해. 인간 안 돼. 저런 인간을 내가 어떻게….” 인간이라면 그런 마음이 들어요.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가지고 해야 합니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것은 인간적으로 나를 높이는 교만한 마음이고 결국 그 사람은 실패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차근차근 성경을 이야기해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면 잘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그 마음을 전부 비우는 일을 하나님이 하십니다.

달란트를 받은 세 명의 종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종들을 불렀습니다. 한 종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금 다섯 달란트는 굉장히 많은 돈입니다. 다른 한 종에게는 금 두 달란트를 주었고, 또 다른 한 종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왜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줬을까? 성경은 즉시 그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 25:15~16)
이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금을 받은 세 사람의 마음의 자세가 보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왜 다섯 달란트를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은 한 달란트 받는데. 이 사람은 주인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기뻐하는지 그 마음을 살펴서 아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살핀 종은  

사람들은 성경을 깊이 읽지 않기 때문에 성경에 비춰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모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그냥 그렇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신문의 여론 조사에서 서울에는 중산층이 25% 정도 되는데, 서울시민의 70%가 자기는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대요. 자기가 보는 기준과 실제가 너무 다른 것이지요.
신앙의 세계에서는 이런 오류가 더 많습니다. ‘술 끊으면 되지, 주일 지키면 되지, 죄 안 지으면 되지, 기도하면 되지, 성경 읽으면 되지, 십일조 내면 되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자기를 믿는 마음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찾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도 자기가 원하는 길이나 생각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인의 마음을 살폈습니다. ‘주인이 왜 다섯 달란트를 줬지? 주인의 마음은 틀림없이 이거로 장사를 하라는 거야. 장사를 해야지.’ 그래서 바로 가서 장사를 한 거예요. 주인의 돈, 즉 주인의 능력을 가지고 가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마음을 살필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따라 사는 종이지요. 다른 종에게 일을 맡기면 평안하고 즐거워도, 그 종에게 맡기면 자기의 생각대로 일을 하니까 주인이 안 줄 수는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 줄 때 한 달란트만 준 것입니다.

달란트를 땅에 묻고

종들이 받은 돈을 어떻게 했습니까? 16절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장사를 했다고 말하지 않고 17절에서 “그같이 하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한 것이 아니라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을 따라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늘 주인에게 기쁨을 주면서 다섯 달란트나 받았는데, 나는 왜 두 달란트밖에 못 받았지? 나도 힘도 좋고, 키도 크고, 나이도 먹었는데. 저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잘 지켜보자.’
이 사람은 주인의 마음을 모르지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가서 장사하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이 장사를 하네.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 하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의 마음을 배워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자기를 믿으니까 주인이 어떻게 하는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또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달란트를 뭐하라고 나에게 주나? 이까짓 것, 귀찮다. 주인이 올 동안에 도둑 안 맞게 묻어나 두자.’ 달란트를 땅에 묻어 놓고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이 종은 자기 생각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이 이 이야기를 왜 하셨습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신앙이 참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고, 쉽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신앙만큼 쉬운 게 없다고 봅니다. 신앙이 어렵다는 것은 자기가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1장에서 28장까지 모두 문제가 있더라고요.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도르가가 살아나는 역사도 있지만, 핍박으로 감옥에 가고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또 배를 타고 가다가 파선이 되고 풍랑을 만나고 독사에게 물리는 등 어려운 일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그 많은 문제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다 정리가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는 말씀처럼.
그러고 난 뒤에 우리 선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 복음을 증거할 때, 기성교회에서 우리를 이단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교도소 전도를 하려고 하면, 교도소 직원 가운데 기성 교인들이 있어서 우리를 막았고, 군부대 전도도 마찬가지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책을 출판할 수 있게, 방송을 할 수 있게, 또 교도소나 군부대 전도를 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선교회에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나 문제가 닥쳐도 그냥 넘어가는 문제가 없도록 다 해결되었습니다. 제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세계 안으로

그런데 교회에 와 있으면서도 마음은 교회와 하나가 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하나 되지 않으면 교회의 역사나 하나님의 역사가 그 마음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교회와 마음이 하나인 사람은 교회가 아플 때 같이 아픔을 느끼고 교회가 기쁠 때 같이 기뻐합니다. 그 사람에게는 교회의 복과 은혜가 함께해서 주와 하나가 되고 한 몸이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이 되어서 너무나 은혜롭게 해결됩니다. 이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형제 자매 모두가 저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이 다 목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나처럼 복음을 위해 전세계를 다니며 살 수는 없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분도 있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분도 있고 운전을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예수님의 세계 속에 들어가 있듯이 여러분도 예수님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여러분이 당하는 무슨 문제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위선된 삶 속에서

여러분, 주인을 섬기는 종은 금방 주인의 마음을 압니다. 그처럼 우리는 성경에서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나의 장래를 계획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계획한 장래는 너무 초라하고 옹색하고 부끄러운 것이었지만 예수님이 계획한 장래는 너무 귀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장래를 향한 나의 소망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내 마음은 거짓되고 추하고 음란하고 정말 더럽기 때문에 이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려고 각오해도 또 더러움이 나타나고 미움과 어리석음이 나타나고 음란과 가증된 것이 나타나서 늘 위선적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더러우면서 깨끗한 척하고 사랑하는 척하면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마음을 낮추시고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더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제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저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이 무너지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세계가 제 앞에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리석고 지혜가 없지만 예수님을 안 후에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살 수 있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못 믿고 자신을 믿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에게 ‘너는 잘났어. 너는 똑똑해. 너는 할 수 있어’라고 속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열심히 하려는 생각 속에 젖게 되면 하나님은 내 속에 아무런 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십니다. 내가 얼마나 미련한 인간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여러분, 제가 저 자신을 보니까 너무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서 제가 저를 고친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삐뚤고 악한 성격을 고칠 자신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바르게 살면 되겠구나. 성경대로 살면 되겠구나. 죄 안 지으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할 수 없는 나’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쳐다보면서 ‘이 박옥수, 이 더럽고 야비하고 나쁜 놈아!’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정말 제가 악하고 더럽고 어리석고 미련한 인간임을 알았기 때문에 제 자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성경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A형의 피를 B형의 사람이 받을 수 없듯이, 내 기준이 서 있으니까 다른 논리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내 기준이 무너지면서 주의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그날부터 제 삶을 다 버리고 제 생각을 다 버리고 주님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믿는 삶에서 벗어나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여러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발견하면 다섯 달란트 받은 자처럼 주인의 마음을 살피게 될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뭐라고 하든지 내가 하던 대로 살면 되지’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사회 구조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중시하고 혼자 살 수 있는 그런 생활구조가 되어 가면서 남에게 고개를 숙일 일이 적어집니다. 요즘은 이웃 없이도 잘 사니까 자기를 믿고 자기 위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의 마음을 알아서 장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교만해서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 오면 그대로 주면 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말했습니다. “은행에 갖다 주면 이자라도 받을 수 있는데 내 재산을 손해나게 했구나.” 결국 그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주의 마음을 받아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인간은 다 악하고 거짓되고 더럽습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신앙을 가지려면 내가 충성해야 하고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불신하고 회개했을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일어나면서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든 예수님의 문제가 되어 너무나 복되고 은혜로운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얻으십시오. 나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마음으로 바꾸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을 주장하시면 절대 실패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 2006.9.24 주일 낮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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