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절망 속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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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절망 속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2006.9.17 주일 낮 설교 요약- 120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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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저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떡은 먹으면 소화가 되기 때문에 하루도 못 되어 없어지는데 예수님이 주신 생명의 떡은 한번 받아들이면 결코 주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떡을 먹고 나면 다시 먹고 싶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후, 내 영혼에는 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계셔서 주님께로부터 나오는 새 마음을 경험할 수 있어 너무 감사했습니다.

교도소에도 복음이

우리 선교회에서는 교도소에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도소에도 대부분 기성교회 장로, 집사인 분들이 간부로 있으면서 우리를 강하게 막아서 실제로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러던 중 1988년 2월 말에 어떤 분이 저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박옥수 목사님이시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수원교도소의 교무과장인데 교도소에 한번 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수원교도소에 가서 그 교무과장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극동방송에서 하는 제 설교를 들었답니다. 그 방송을 듣고는 제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6개월이 지난 뒤 교도소에 오는 우편물을 검열하다가 재소자에게 보내온 ‘기쁜소식’지를 통해 제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하더군요.

재소자들이 구원받아

수원교도소에 가서 그 과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과장님이 저한테 제의했습니다. “박 목사님, 우리 교도소에서 집회 한번 할 수 있겠습니까?” “예, 하지요.” 그래서 3월 1일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교도소에서는 외부인들이 재소자들과 만날 때는 반드시 교도관들이 입회를 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교도소 안의 재소자들이 다칠 수도 있고 또 재소자들이 외부인들을 납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회를 하기로 한 날이 ‘삼일절’이라서 공휴일인데도 교무과 직원들이 전부 출근해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교무과장님이 교무과 직원들에게 이야기해 보겠다고 하시더니 그대로 추진되어 그날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일집회를 했습니다. 그때 거기에 참석한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희가 교도소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 문을 열어주신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날부터 제가 ‘수원교도소 교무과장’이란 별명을 얻었습니다. 언제든지 가면 과장님이 자기 자리를 내주면서 재소자를 상담하라고 합니다. 교무과장이 하는 일이 실제로 그런 일인데 제가 교무과장 노릇을 몇 년 했습니다.
그러면서 수원교도소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많이 일어나고 그들 가운데 지금은 선교사가 되고 ,전도자가 되고, 또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볼 때 너무나 감사합니다.

어려울 때 주님이 떠오르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을 보면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도저히 하실 수 없는 일이다’ 하는 일들이 제 삶속에 굉장히 많이 있어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하나님이 제 마음의 세계를 말씀으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너무 놀랍습니다.
제가 심장이 나빴을 때나 위장이 안 좋았을 때, 웬만하면 그냥 지나가다가 아주 심각하다고 느껴질 때는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다가 마지막에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마치 두부를 만들 때 콩물에 간수를 부으면 아무것도 없던 물속에서 두부 덩어리가 떠오르듯이, 처음에는 이런저런 문제로 어려움, 고통, 근심으로 생각이 복잡하다가도 생각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서서히 떠오르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내 마음 안에 있는 모든 문제를 다 삼켜버리십니다.
처음에는 근심과 절망, 두려움과 염려로 시작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면 하나님만이 마음에 남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원망과 절망, 슬픔의 노래를 토해야 할 입술에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 하는 말만 남게 됩니다.
근심이나 두려움도 힘이 있지만,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싸움을 붙였을 때 하나님을 이기는 근심이나 두려움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마음에 두려움이나 근심이 없는 게 아니지만 그것들이 나를 삼키려고 하다가 내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일어나 나중에는 하나님 한 분만 남게 됩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하면

여러분, 그 하나님이 오늘 여러분의 마음 안에서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만들어 주셔서 당신을 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정욕과 욕망, 미움과 고통을 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가 마음이라는 귀한 그릇에 그러한 것들을 담게 했습니까? 그것은 악한 영, 사단이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4)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지만, 말씀으로 우리 마음 안에 임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하는 말씀은 말씀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그때부터 그 말씀이 쉬지 아니하고 다른 생각들과 싸워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사단의 역사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역사와 사단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사도행전 16장도 그런 이야기입니다. 귀신들린 여자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귀신들린 여자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피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계속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에 와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 16:17)
저는 귀신들린 사람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면 두렵고 섬뜩했지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그 귀신보다 훨씬 힘이 세다는 걸 느끼니까 이젠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 “난 너하고 안 싸워. 내가 뭐하려고 너하고 싸워. 예수님께 싸워 달라고 하지. 너 예수님 이길 수 있어?”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귀신들린 사람의 기가 꺾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 너무 놀랍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란

보통 장로교회에 나가면 처음에 영접기도를 시킵니다. “주 예수여, 내 마음에 오시옵소서. 믿습니다” 하면 예수님 영접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를 속여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의 피로 눈처럼 희게 씻어놨는데도 “예수님이 네 죄를 사했어. 그래도 너는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야”라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단이라고 오해하며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두려움과 절망을 주어서

바울이 귀신들려 점하는 여종에게서 귀신을 내쫓았습니다. 그 여종이 점을 잘 치니까 주인의 수입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여자에게서 귀신이 떠나면서 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단은 그것을 이용해서 주인의 마음을 충동해서 바울을 고발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단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만 이런저런 형편을 어렵고 두렵게 만들어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행 16:19~24)
귀신들린 여자에게서 귀신을 쫓아준다고 이렇게 때릴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사단은 그 여종의 주인이나 저자에 있는 관원들이나 무리의 마음에 들어가서 충동질을 합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귀신을 쫓아내어 그 영혼을 살렸는데…’ 하는 마음을 주어 그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지워버리고 실망과 절망 속에 집어 넣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떠오르면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하기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엔 그도 힘을 잃었을 것입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기절했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매를 맞고 옷이 찢겼을 때, 손발이 착고에 채워졌을 때, 그리고 감옥에 던져졌을 때, 감옥문이 쾅 닫혔을 때 바울의 마음은 틀림없이 절망, 근심, 고통,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예전에 아무것도 모르고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었지.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지’ 하면서 바울의 마음속 깊이 감춰두었던 하나님이 떠오르면서 고통과 근심, 염려와 두려움을 다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밤중쯤 됐을 때, 바울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의 귀에 들렸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기쁨과 영광이 충만한데 사단은 여러분의 마음을 어두움과 악, 거짓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죄를 짓지 말아야지.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근심하지 말아야지’ 하면 점점 더 근심이나 두려움이 차 오릅니다.                 여러분이 확실히 죄사함 받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기억할 때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이나 근심, 어두움과 같이 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 안에 서면 근심이나 두려움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하나님만 남게 됩니다. 지금 바울 안에 그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감옥 속의 찬미와 기도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행 16:25) 24절까지는 절망이 바울의 마음을 덮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 사람이 매를 맞는 것은 부당하다. 이사람은 로마시민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한다”며 바울을 돕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근심과 슬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좋아져서 근심과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하십니까? 바울은 형편이 좋아져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한 것이 아닙니다. 형편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여전히 감옥 안에 있었고, 감옥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손발은 착고에 묶여 있었고, 상처는 쓰리고 아팠습니다. 그는 그런 형편 속에서 하나님을 떠올렸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마음 가운데 충만하게 있는 동안에 슬픔과 근심, 두려움이 떠났던 것입니다.
바울의 찬미와 기도가 그 마음 안에서 흘러나와 감옥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그것이 다른 죄수들의 마음에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 감옥 안이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형편을 바꾸는 일을 기적적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흔들리면서 문이 다 열렸고 쇠고랑이 다 풀렸습니다. 할렐루야!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면서 너무 놀라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그 하나님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어려움을 당할 때 정신을 못 차리고 어려움 속에 빠져있기만 했는데, 한 번 두 번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이 어려움을 통해 주님이 일하시고 주님이 선으로 바꾸실거야’ 하는 마음이 자꾸 일어났습니다.

전도자들이 변화되고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대덕수양관에서 금식기도회를 하기 위해 우리 전도자들이 모였습니다. 사실 저는 이번 여름수양회를 하면서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우리 전도자들이 너무 육신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이 복음을 지킬 전도자들이 왜 그럴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너무 부족해서 선교회를 도저히 인도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들어 시험이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저를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마음을 돌이키겠습니다.” 그래서 9월 5일까지 회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 지난 3일 동안 전도자들이 마음에 있는 어두움과 추한 것들을 다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자 한 명 한 명이 변하고 성령에 이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사도바울은 어려움을 계속 겪으면서도 “하나님이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매로 맞고 돌에 맞고 파산하는 이런 일을 당케 하신 것은 나를 의지하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사역자들은 감옥에 간 일도 없고, 매 맞아 죽은 경우도 없고, 파선한 일도 없고, 어려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자기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지혜와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니까 전도자들이 자꾸 세속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3일 동안 기도하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정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의 악을 고하면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제가 마치는 시간에 “이것은 시작이지 다 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근신하고 그렇게 하자”고 하면서 우리 마음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하나님이 해결하실 수 없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하나님을 바라고 생각할 때, 먼저 여러분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솟아오르면서 하나님이 근심이나 염려를 다 이겨주십니다.
형편이 아직 그대로일지라도 여러분 마음 안에 하나님이 견고하게 서면 곧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구원을 받고 또 그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면서 빌립보에 교회가 탄생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사단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사단은 예수님을 실망시키려고 사랑하는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가룟 유다에게 팔게 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람이라면 “유다야, 하나님의 아들인 나를 보면서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베드로, 네가 나를 부인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외로이 못 박히실 때, 고통스럽고 절망스럽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내게 왜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렸습니다. 돌무덤에 넣고 인봉하고 군병들로 지키게 했습니다. 사단은 그 이상으로는 예수님을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잠잠히 기다리셨습니다. 장사한지 사흘이 되는 날 새벽에 사단이 한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뒤엎어 버렸습니다.
세상에는 아직 사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사단이 어떤 일을 하든지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은 그것을 다 뒤집어서 그것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 안에 있고 그 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구원을 받고

내 죄가 사해졌다는 사실을 감각이나 생각으로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내 행동이 좋아졌으니까 내 죄가 사해졌겠구나. 내가 악하니까 내 죄가 사해지지 않았구나. 내 마음이 뜨거우니까 주님이 역사하시겠구나’라는 생각으로 구원을 판가름하지 마십시오. 사단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판가름 짓게 해서 구원을 혼돈시키는 것입니다. 구원은 그것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사했다면 사해진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술을 먹고, 강도짓을 하고, 간음을 하고, 살인을 하고 무슨 일을 해도 그건 여러분의 일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뒤엎지는 못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죄가 사해졌다고 하시면 사해진 것입니다.

약속과 말씀을 신뢰할 때

사도바울은 감옥에서 매를 맞아 등이 찢어지고 피가 나고 고통스러워도 ‘이 고통이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쫓아낼 수 있겠나. 이 고통이 하나님을 잠재울 수 있겠나’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지금 이런 형편이라도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형편을 뒤집기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할 수 있었고, 그 믿음대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
그것처럼 형편을 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연약한 것을 보지 마십시오. 원래 여러분은 연약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추한 것을 보지 마십시오. 아담의 후손은 다 추합니다. 여러분이 음란하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육신 속에는 음란이 있고 거짓과 악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모양을 보지 말고 더러운 누더기 입은 탕자를 깨끗하게 하신 아버지처럼, 더러운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끗하게 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신뢰할 때 믿음이 서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그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제 어려움을 인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자꾸 떠올리고 묵상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짐을 지십니다. 결국 마음 안에 하나님 한 분만이 거하시면서 형편도 바꾸어 주시고 우리 마음에 주를 찬양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실 줄을 믿습니다.

- 2006.9.17 주일 낮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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