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시작은 내안에 선(善)이 없음을 발견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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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시작은 내안에 선(善)이 없음을 발견할 때
2006.8.20  주일 낮 설교 요약- 116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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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형제 이야기

깊은 산속에 토끼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토끼 형제는 너무 사이가 좋아서 동생이 형을 거슬러 본 적이 없고 형도 동생을 섭섭하게 한 적이 없었어요.
너무 가물어서 먹이가 없던 어느 해, 형 토끼가 동생 토끼에게 얘기를 했어요. “동생아, 내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가서 먹을 걸 좀 구해 올 테니까 너는 여기에 있어.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위험하거든.” 그리고는 먹이를 구해 와서 동생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토끼 형제가 배가 부르니까 심심해졌습니다. “동생아, 우리 게임하고 놀까?” “형님, 무슨 게임이요?” “내가 사람들 사는 동네에 가보니까 사람들이 종종 ‘싸움’이라는 게임을 해. 너무 재미있어 보이던데 우리 그 게임 한번 해보자.” “그래요, 형님.”
도토리 하나를 가지고 싸움을 했어요. “동생아, 네가 도토리를 가지고 있어.” “네, 형님.” 형이 싸움을 걸었어요. “야! 도토리, 그거 내꺼야! 이리 내!” “예, 형님 가지세요.” “싸움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까 네가 달라고 해봐.” “형님, 도토리 이리 줘요!” “이거 내꺼야! 안 줄 거야!” “그러면 형님 가지세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니까.” 다시 형이 동생에게 싸움을 가르쳤어요. 그런데 하루 종일 가르쳐도 싸움이 안 되는 거예요. 결국 그 형제는 싸우지 않고 오늘까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성경을 통해 마음을 보면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망이 있고 자기 주관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싶으면 눈으로 안 보이니까 내시경이나 초음파로 검사를 해봅니다. 그것처럼 마음의 세계도 성경을 통해서 비추어 보면 마음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이 정리되어 복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IYF 학생들을 전세계에 단기선교사로 내보낼 때 훈련 과정을 거칩니다. 저는 훈련할 때 그들에게 영어를 비롯한 그 나라말을 배우거나 그 나라의 정치나 경제에 대해 배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나라에 가서 정말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그것을 이길 만한 힘이 있다면 그러한 것들은 전혀 문제가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제나 과학, 의학에 대해서는 알지만 자기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도바울’의 신앙 세계

여러분, 사도바울이 경험한 신앙의 세계와 제가 경험한 신앙의 세계는 비교가 안 됩니다. 사도바울이 경험한 신앙의 세계는 깊지만, 저는 이제 겨우 한 걸음씩 내딛는 정도밖에 안 되니 어떻게 그의 그 깊은 영적세계를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서 사도바울이 쓴 글을 읽으면 ‘바울의 마음이 여기에 도달했구나!’ 하는 것을 조금씩 알 수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좀더 내려가면 21절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한 법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그 전에 몰랐던 사실, 즉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신앙상담 하기 전에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람들을 분류하자면 A 유형을 ‘나는 악뿐이고 선한 게 하나도 없다’, B 유형을 ‘나는 선뿐이고 악한 건 하나도 없다’, C 유형을 ‘나는 악하긴 해도 때때로 선할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D 유형을 ‘나는 참 선한데 어쩌다 악을 행할 때도 있다’라고 했을 때 어느 쪽인지 질문하면 대부분 C나 D에 해당된다고 대답합니다. ‘나는 악하지만 선할 때도 있지, 악뿐이진 않아’ 그렇게 생각해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는 선한데 어쩌다 실수해서 악을 행하기도 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선(善)은

여러분, 신앙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은 여기서부터 구분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나름대로 선한 일을 했다고 내세울 만한 일이 있을 겁니다. 사람은 선만 행하기도 어려운 것처럼 악만 행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사도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불쌍한 고아를 도와준 것, 거지에게 돈을 준 것, 가난한 이를 도와준 것은 선이 아닙니까? 여러분, 그게 선이라고 한다면 내 속에 선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도바울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까? 바울은 말합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내 속에는 근본 선이 없기 때문에 선을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 속에 선이 있으면 선을 행하게 되지만, 선이 없고 원함만 있으니까 선을 행하는 것 같다가 얼마 못 가서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전체가 금으로 만들어져야 금반지지, 구리에 금을 입힌 것은 금반지가 아니라 도금한 구리반지인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선은 마음에서 계속해서 나와야지, 악한 마음을 누르고 참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모든 것이 무너져야

사단은 그것을 선이라고 속여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가르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잘해서 천국 가려고 하지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날 위하여 모든 일을 이루어 주셨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내 모든 것을 다 무너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경남 사천에 교회를 개척할 때, 우리는 처음에 건물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골이라 건물이 없으니까 건물세가 너무 비싼 거예요. 그래서 예배당을 못 얻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싼 집을 사서 예배당을 지으면 좋겠다’ 싶어서 집을 알아보니 집값은 뜻밖에 싸더군요. 그래서 넓은 집을 한 채 사서 예배를 드리다가, 어느 날 그 집을 헐고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진짜 좋은 기와집이었지만 그것을 헐지 않으면 예배당을 지을 수가 없으니까 그 집을 포크레인으로 다 때려부수었습니다. 기와도 깨고 벽도 무너뜨리고 지붕도 다 무너뜨리고 평평한 땅을 만든 뒤 거기다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우리에겐 선(善)이 없어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선을 행하면 신앙의 집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시작합니다.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죄 안 지으면 되지. 술 안 마시면 되지. 착하게 살면 되지. 율법 지키면 되지.” 그러나 여러분이 한두 번 정도는 남을 도울 수 있지만 완벽한 선은 절대로 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수많은 돈을 들여서 외국에서 석유를 사다 씁니다. 원유가가 1달러 올라가면 우리나라에서 석유 값으로 1억불이 지불돼야 한다고 합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때 우리나라는 유전개발에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대요. 그런데 옆 공장에서 흘린 기름이 들어갔던 것인지 그 다음에는 아무리 캐도 석유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어디를 뒤져도 석유가 안 나오는 것을 아니까 산유국이 석유 값을 올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사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 속에 선한 것이 없으면 아무리 선을 행하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너무너무 고달픕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을 해 본 사람들은 ‘아!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쉬워집니다.

하나님만이 선한 분

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여러분, 이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하나님이 인간들을 굽어 살피시면서 선을 행하는 자가 있는가 보셨는데 한 명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난 착하게 살았는데’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 나름대로의 선이지 진정한 선은 아닙니다. 금반지가 없는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싶은 마음에 가짜 반지라도 사서 끼듯이, 선이 없으니까 선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 많은 목사님들이 “여러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니까 많은 교인들이 사랑하려고 선을 행하려고 진실하려고 애쓰고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오셨을 때

저는 거듭나기 전에 장로교회를 다녔는데 제가 지옥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삶이 너무나 추하고 더러우니까요. 저녁마다 친구들과 모여서 화투치고 노름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도둑질하다가 새벽에 교회에 가면 너무나 가책이 되니까 “주여,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빌었습니다. 그런 삶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제 속엔 선이 없으니까 악에게 이끌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너무 추하고 더럽고 악한 인간임을 깨달았어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구나.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를 깨닫고 제 자신을 불신해 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 마음에 들어오셨어요.
저녁마다 친구들에게 가면 나쁜 짓을 하니까 ‘가지 말아야지’ 그렇게 각오해도 안 됐는데, 어느 날 거기에 안 가고 집에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선하게 살려고 할 때는 안 됐는데 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 안에 들어오시니까 노력하지 않아도 제가 자연스럽게 선해지고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과 8장의 차이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말하는 신앙의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7장은 내가 선한 일을 행하려 하고, 내가 율법을 지키려 하고,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7장 마지막에서 바울이 깨닫습니다. “내 속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라.” 내 속에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내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익하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할 때는 곤고합니다. 잘 안 되니까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사도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사망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 몸에서 끊임없이 죄의 소욕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한 샘에서 두 종류의 물이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서 죄의 소욕이 나오면 거기서는 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선이 아닙니다.
바울은 7장에서 자기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접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8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이 나옵니다. 내 모든 것을 접어버렸을 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십니다. 나는 선을 행할 수 없지만 선하신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자리를 잡으시니까 나도 모르게 내 삶이 선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나의 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하고 정말 다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

신앙은 내가 할 수 없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신앙을 거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충성해라. 선을 행해라. 사랑해라. 열심히 해라. 주를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없다고 증거합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4)
여러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이나 음란한 마음은 사망이야. 하지만 내 생각 중에 진실한 것은 사망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육신의 생각 전부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선을 행하려 노력해도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여러분, 우리는 현재 육신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은 사망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생각은 다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우리 속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원수이고 사망이고 더러운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 우리는 사단에게 속아서 내가 선을 행하면 선한 줄로 여깁니다.
여러분 가운데 선을 행하려고 애쓰고 노력한 분이 있다면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저는 ‘아, 나는 안 되는구나!’ 그 사실을 깨달으니까 예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일을 하시도록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롬 8:9)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는 영이 아니라 육입니다. 성령이 들어오기 전에도 착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도 진실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고, 선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교육계 인사 두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들은 신앙은 없지만 제게 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가 그 중 한 분한테 “앞으로 우리가 IYF 대학을 설립하려고 하는데 우리 대학을 좀 맡아서 이끌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했어요. 그분은 하나님을 안 믿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목사인 저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실하고 교양이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을 만났어요. 그분하고 이야기할 때도 ‘야, 이분은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도 너무 선하구나. 어느 경지까지는 도달한 분이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인간이 볼 때는 너무 아름답지만 그래도 사람은 껍데기만 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 중심이 선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행하는 선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선은 다릅니다.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영이 없으면 육으로 끝나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선한 일을 해도 멸망이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롬 8:10~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그러니까 진정한 선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고, 또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마음으로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으로는 어떤 일을 해도 육신에 속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더럽고, 악하고, 가증하고, 멸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아도 자신이 선을 행하거나 연보를 많이 하거나 기도를 잘하면 신앙이 될 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알면 너무 쉽습니다. 내가 선을 행할 수 없고, 내가 의를 행할 수 없고,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면 내가 하려고 하는 신앙을 다 포기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술을 끊게 해 주시고 도박을 멀리 하도록 해 주시고 마음의 죄를 내쫓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시는 것이라야 진실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은 실패

저는 제가 하는 모든 것이 실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일이나, 내 신앙이나, 내 가정이나, 모든 것을 자신이 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 예수님이 내 인생을 이끌어나가실 때와 내가 내 인생을 이끌어나갈 때가 비교가 안 되고, 예수님이 우리 교회를 이끌어나가실 때와 내가 인도할 때가 비교가 안 되며, 예수님이 내 노후를 맡아 주장하실 때와 내가 준비할 때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하다가 부족하면 예수님의 도움을 받는  것인 줄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참된 신앙을 하려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포기되어야 합니다. ‘아, 나는 이래서 안 되는구나’ 하고. 사르밧 과부는 남은 빵 한 조각을 자기가 먹어도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 그것을 포기하고 가루통의 기적에 기대를 두었습니다.
그것처럼,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진짜 나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를 버리면 그때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분이 일하시면 선을 행하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기도하는 것도, 성경 읽는 것도 너무 즐겁습니다. 예수님이 내 마음을 주장하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너무 평안하고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관하는 삶

오늘 아침, 여러분 모두 자신이 선을 행하려 하고, 잘 믿으려는 마음을 포기하십시오. 그래서 안 됩니다. 한번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하려는 마음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 당신이 술을 끊게 하시면 끊겠습니다. 당신이 의를 행하게 하시면 의를 행하겠습니다. 당신이 우리 가정을 새롭게 하시면 새롭게 되겠습니다. 당신이 내 죄를 씻으시면…’ 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모든 것이 예수님께 달려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 예수님이 주관했을 때, 그때 여러분은 정말 형통하고 복되며 은혜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하는 모든 삶을 끝내시길 바랍니다. ‘주님, 주님이 오셔서 내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주님이 오셔서 내 인생을 새롭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주님께 맡깁니다’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으로 말미암아 참된 은혜를 누리고 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2006.8.20  주일 낮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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