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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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고
2006.8.13  주일 낮 설교 요약- 11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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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들과 신앙교제

수양회를 하는 동안 저희 전도자들은 오전, 오후에 모여 신앙교제를 합니다. 전도자들 가운데는 믿음으로 사는 분도 많지만 전도자가 되어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사는 분이 있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습니다.
2주 전 금요일에 전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우연히 원주에 있는 김동성 목사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동성 목사가 원주에서 사역하고 있지만 제 마음에 편안함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중·고생 캠프가 진행되고 있는 충북 영동 송호 솔밭에 말씀을 전하러 갔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아침식사를 마쳤는데 김목사가 따라와서 교제를 청하길래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김목사가 원주에서 사역하고 있지만 제 마음에 쉼이 없다는 말에 대해 자기는 한 번도 원주에서 사역하고 있는 것이 잘못됐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내가 원주에서 사역을 못하면 어디에서 해야 할까? 상주에서는 할 수 있겠나? 그것도 아니라면 더 작은 진천에서는 어떻게 하겠나? 내가 이 선교회에서 사역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여기 있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스스로 거처를 정하지 않아

제가 김목사에게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김목사, 자네와 내가 다른 점이 바로 그거야. 자네는 자네가 판단해서 떠날 만하면 떠나고, 이렇게 할 만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할 만하면 저렇게 하지만, 난 아직까지 내가 내 거처를 정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김천에서 대구로 사역지를 옮길 때도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는 걸 보았어. 대구에서 사역할 때 처음에는 아주 어려워서 서울에 있는 어떤 형제가 찾아와 서울로 올라오면 집도, 차도 제공해 주고 생활도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나는 서울로 갈 수 없었어. 하나님이 나를 대구에 보내셨기 때문에 다시 대구를 떠나라는 분명한 인도를 받기 전까지는 내가 떠날 수가 없었어.
그 후 1984년에 서울로 올 때도, 또 대전으로 내려갈 때도, 다시 2004년에 서울로 올 때도 분명한 예수님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에 왔지, 내가 종인데 어떻게 내 거처를 스스로 정할 수가 있나?
돼지우리에 가라고 하면 돼지우리에 가야 하고 산으로 가라 하면 산으로 가야하지 않겠나? 사실, 지난 가을 인도 오리사에 갈 때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나 오리사에서 복음을 전하다 죽는 것이 주의 뜻이면 가는 것이지, 어떻게 내가 내 거처를 결정해?”

신앙교제 이후

김목사가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마음이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김목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1975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학생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아버지 장례 때 불상에게 절한 그 죄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복음을 듣던 그날, 복음이 제 마음 안에 들어와서 죄의 두려움을 다 내쫓아 주었습니다. 그날 불상 앞에 절한 죄에 대해 참된 씻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 후 단 한 번도 죄에 대해 가책을 느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구원받은 지 30년이 넘었지만 저는 정말 죄에서 자유로웠고 편안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내 죄만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내 삶 전체를 책임지셨습니다. 그런데 내 죄를 사한 것은 믿었기 때문에 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지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늘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잘하려고,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잘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날 김동성 목사가 믿음을 얻고 자유로워지는 것을 봤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

그 다음 주, 제가 가야대학교에서 수양회 강사로 말씀을 전했는데, 김목사가 그곳으로 왔더군요. 제 방에 오더니 “목사님, 오늘은 제가 와야 할 차수가 아니지만 말씀을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하면서 간증을 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제가 성도들 앞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간증을 했습니다. 박목사님과 선교회는 제가 원주에서 목회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 시간부터 이 교회의 목사가 아닙니다. 저는 목사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만 가지 생각이 자기 마음을 잡아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그런 생각에서부터 참된 자유를 얻었답니다. 예배를 마친 후 형제 자매들이 와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육신적이고 인간적이었던 삶을 고백하면서 분위기가 너무 뜨거웠답니다.
김동성 목사가 구원은 받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죄에서는 자유로웠지만 자신의 생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해 고통을 겪었는데, 그 속에서 벗어나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저 형제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능력으로 살아 일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생각 속에 잡히면

저는 성경을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서 성경 속에 있는 마음의 세계가 점차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인데도 어떤 생각 하나가 마음에 들어와서 그 마음을 사로잡으면,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평생 거기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소와 양을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돈 바꾸는 상을 엎으시면서 성전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다 내쫓으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라는 말씀처럼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듯이, 지금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에 사로잡히지, 내쫓지 못하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오는 불행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음란한 마음이나 교만한 마음, 삐뚠 마음 등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분이 그것들을 쫓아주셔서 여러분이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어떤 죄나 문제, 형편에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지 않은‘나’

오늘 사도행전 5장을 읽었습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행 5:1~5)
제가 대전에서 사역을 할 때 한번은 주일 설교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밭교회에는 박옥수 목사가 알맞습니다. 베드로가 한밭교회 목사가 되었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 명 없을 겁니다.”
제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냐 하면 저라면 아나니아를 죽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나니아가 하나님께 바치려고 땅을 판 그 마음이 얼마나 갸륵합니까?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땅값 좀 감출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저 같으면 그냥 모르는 척하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아나니아 형제, 왜 땅값을 감춰놓고 다 낸 것처럼 거짓말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땅값 안 가져와도 되는데 왜 거짓말합니까? 앞으로 그러지 마십시오”라는 정도로만 책망했을 것입니다. 정말 베드로와 저는 너무 다릅니다.

베드로의 두 모습

여러분, 우리는 4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가 전혀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4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기의 생각이나 주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늘 두려워하고 근심하고 염려하면서 살았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도한 뒤에 잡혀가시는 것을 보고 따라가다가 대제사장의 집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해 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밖에 나가 크게 통곡을 하고 난 뒤에 베드로는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른가를.
‘나는 주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부인하지 않을 줄 알았고 주님을 위해 죽는다면 죽을 줄 알았는데 나 자신에게 속았구나. 나는 바르지도 못하고 깨끗하지도 못한 인간인데 정말 내게 속았구나.’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자기를 믿지 않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가 주를 사모하는 동안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을 지배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악한 내 생각을 쫓아내고

조금이라도 생각하며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생각을 따라 사는 삶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바보스럽고 미련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내 생각을 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내게는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난 남편을 의심해, 이러지 말아야지’, ‘내 마음에 바람기가 있어, 딴 여자한테 마음이 끌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자기 속에 일어나는 그 생각이 잘못됐고 추하고 더럽고 음란하고 가증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가지고 살면 추하고 더럽고 음란하고 가증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 생각을 고치려고 합니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도둑질하지 말아야지’, ‘간음하지 말아야지’라고 각오하면서 자기가 그 생각과 싸우기 시작합니다.
특히 오늘날 한국의 기성교인들이 대부분 그렇게 신앙을 합니다. “주님, 내가 거짓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계속해서 싸우지만 아무리 싸워도 그 마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러다 보면 살면서 죄를 용납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용납하면서 살다 보니까 추하고 더러운 죄를 짓는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나는 음란하고 교만한 마음, 악하고 거짓된 마음을 쫓아내지 못하지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소와 양과 비둘기 같은 더러운 것들이 다 쫓겨났듯이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그리스도가 내 마음의 악한 생각을 다 내쫓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거예요.

약속을 받아들이면

어제 이형모 장로님이 위암 수술을 받으셔서 제가 병원에 잠깐 가고 싶었습니다. 그때 김포교회의 어떤 부인 자매가 저한테 전화를 했어요. 34살의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는데 전신에 암이 다 퍼져서 의사가 손을 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가 기도를 한 번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데 밖에 나가는 것도 여의치 않아서, 나가는 김에 가려고 병원을 물어보니까 세브란스 병원이래요. 이 장로님은 15층에 계시고 그 자매는 19층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장로님 병문안 드리고 난 뒤에 그 자매를 만났습니다.
제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는 말씀을 펴서 이야기했습니다. “자매, 이 자리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암 고치는 게 어렵겠나, 쉽겠나? 암이 무슨 문제가 되냐? 죽은 나사로도 살리셨는데.” 예수님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그 영이 자매 안에 있잖아요.
“형편을 보면 암이 온몸에 퍼졌는데 어떻게 살겠나? 그러나 약속의 말씀을 봐. 하나님에겐 능치 못할 일이 없어. 형편을 바라보면 형편이 마음을 주장해.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면 약속이 마음을 주장해. 형편을 받아들일래,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일래?”
제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그 자매가 형편보다 약속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병은 예수님의 문제로 넘어가기 때문에 예수님이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여러분, 왜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죄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느냐 하면 그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지은 죄 하나 처리 못하시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기가 죄를 씻으려고 하기 때문에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죄가 자기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것이 되면서 그때부터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죄가 있습니까? 어떤 병이 있습니까? 어떤 잘못된 습관이 있습니까? 그것을 왜 여러분이 제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어떻게 미움과 고통, 슬픔과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이기실 수 있고 또 이겨 주십니다.

내 마음으로 살지 않아

이제 베드로는 자기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만납니다. 예전의 베드로라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앉은뱅이를 보니까 너무 불쌍한 겁니다. 그러면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그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도망가던 베드로였는데 이젠 담대해졌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이 교회 안에 어두움을 주는 육신적인 부분을 제하지 못합니다. “아이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우리 교회에 아무도 안 오겠다. 그래도 아나니아 형제가 정성껏 연보했는데…”라고 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와 같이 잘 지내고, 음란과 같이 먹고 마시고, 거짓과 함께 사귈 수 있고, 악과 더불어 지낼 수 있지만,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에 어두움과 함께하실 수 없고 죄와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여러분 마음 안에 계시면 그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 안의 어두움과 죄를 쫓아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마음에서 어두움이 제거되고 악이 떠나고 죄가 끝나는 그때 여러분은 능력 있는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싸워 주시고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2~16)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을 살고 예수님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베드로 속에 예수님이 능력으로 힘 있게 일을 해서 예수님과 똑같은 능력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하시기 위해 우리의 주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 사함 받고 거듭났다면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 안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 앞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우리가 그 문제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계시니까 예수님이 그 문제와 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삶을 살려면

여러분, 우리 모두 내 생각을 따르고 내 속에 있는 악을 용납하는 마음을 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의 구주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여러분이 믿는 말씀이 모든 두려움과 악, 근심을 내쫓고 밝고 깨끗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여러분이 저지른 죄는 여러분의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문제니까 ‘아, 주님이 내 죄를 해결하셨구나’ 하는 믿음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병도 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문제야. 예수님이 낫게 하시겠네’ 하는 믿음을 가질 때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병이라도 낫게 되는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마약을 하거나, 음란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악을 저지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고치려 하지 말고 ‘아, 내 주인이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도 예수님의 문제네. 예수님이 나를 도와주시겠구나. 예수님이 정결케 하시겠구나’라는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을 거룩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의 손에 맡길 때

오늘 아침, 여러분이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왔는데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내 구주시고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내 죄를 사하셨다.’ 또 예수님이 내 병을 책임져 주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모든 문제를 아름답게 해결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는 믿음 위에 설 때, 어떤 문제든지 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문제가 되고, 또 예수님의 문제가 될 때 가장 아름답고 복되게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아니야, 아내와의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돼’, ‘아니야, 내 자식은 내가 붙들어야 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간부터 그 생각도 내려놓고 예수님께 맡기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무슨 문제가 닥치든지 ‘이건 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문제야. 예수님이 내 주인이야. 내 문제를 해결해 주러 오셨어. 내 죄뿐만 아니라 내 인생 전부를 예수님이 책임지셔!’ 하고 주의 손에 맡길 때, 쉼을 얻고 예수님의 은혜를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이제부터 내 모든 문제가  예수님의 문제인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손에 넘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 2006.8.13  주일 낮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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