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상태바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자와 없는 자
2006.8.6  주일 낮 설교 요약- 114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8.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버지를 모시며

제 삶 속에는 문제가 되는 일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어려움이나 위기가 닥쳐을 때 ‘여기서 복음 전도하는 일을 접어야 하는구나. 너무 원통하다.’ 하는 일들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일들이 너무 아름답게 정리되는 것을 봅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잘 넘어갔다. 참 행운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을 계속 겪으면서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의 손길이 함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제 마음에 한없는 감사가 넘쳤습니다.
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고향에서 형님이 아버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님이 일본에 가실 일이 있어서 한 달 동안 우리 부부가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그때는 저희가 대구 파동에서 어렵게 살 때인데 제 아내가 아버지를 잘 섬겨주어서 고마웠습니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셨기 때문에 종종 제 아내가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서는 예배당 문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제 아내에게는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제게는 고맙고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사망 직전에 구원받아

그런데 저희가 모시고 있는 중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어요.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만 해도 마음이 완고하셨는데, 아버지가 피를 토하게 되면서 마음이 바뀌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제가 많이 운 것은 슬퍼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감사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구원받게 하시려고 형님을 일본으로 가게 하셔서 우리 부부가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하셨고, 또 아버지가 피를 토한 그 시점에 제가 옆에 있다가 바로 복음을 전해서 아버지가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섭리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일 아버지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면 ‘내 부모도 전도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전도해?’ 하는 마음이 들었을 텐데, 이제는 누구 앞에서라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날 저는 정말 제 생명을 다 바쳐서 하나님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주님이 저를 사랑하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도우시는 과정이 너무 세심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안의 주님, 나를 사랑하셔서 피 흘려 죄를 사해주시고 또 내 인생을 맡아서 이끄시는 주님을 생각하면 어떤 문제 앞에서도 마음에 소망과 감사가 넘치고 또 웃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으로 도망간 다윗

저는 다윗의 시 속에서 다윗이 가장 어려웠을 때가 언제였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골리앗 앞에 섰을 때일까? 사자와 맞붙어 싸울 때일까? 곰과 싸워서 그 입에서 양 새끼를 잡아낼 때일까? 무엇보다도 아들, 압살롬을 피해서 도망갔을 때였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56편의 이야기는 사울왕이 하도 죽이려고 해서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도망갔을 때 지은 시입니다. 블레셋 땅으로 도망을 갔다가 블레셋 왕에게 잡히면 어려우니까 아예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나아갔습니다. 다윗이 왕궁에 나타나자마자 분위기가 아주 미묘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신하 가운데 한 사람이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우리 가드에 그 유명한 골리앗을 죽인 우리의 원수, 다윗이 왔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하는 그 다윗입니다.”
이제 적진 속에 다윗이 갇힌 거예요. 자기 발로 적진 속에 들어갔는데 그곳 분위기가 전부 다윗을 죽이려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아뿔싸, 내가 여기 잘못 들어왔구나. 내가 여기서 죽겠구나.’ 그때 다윗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위기에 처했을 때

다윗의 마음을 살피면서 시편 56편을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1~3)
이 글을 읽으면서 저를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두려움이 있을 때나 곤고할 때 나는 어떻게 했었는가? 저는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을 때, 즉 병들었는데 과연 살 수 있을까 하는 절망 속에 젖어 본 적이 있습니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마음 안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 노력과 성실함으로, 자기 방법과 수단으로 거기서 벗어나 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몇 해 전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분들이 자살을 많이 했지요. 시장, 도지사, 그리고 기업의 사장…. 그분들은 정말 유명하고 뛰어나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뇌물을 받아서 감옥에 가야 하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리 길지 않은 수감의 기간을 통과할 만한 힘이 없어서 자살을 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여러분, 시편 56편의 상황은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입니다. 다윗이 ‘아! 이제 난 죽었구나. 이제 내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구나’ 하는 두려움과 초조함, 그리고 조바심에서부터 다윗의 시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처음에는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끌려갈 때의 마음처럼 두려움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만 있었다면, ‘불안’이 다윗의 마음을 다 점령해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아이고, 모르겠다, 까짓것 죽어버리자’ 하면서 절망 속에 빠지거나 미쳐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처음엔 그 마음이 불안으로 꽉 차 있었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올리면

여러분, 사자와 소가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당연히 사자가 이깁니다. 황소는 그렇게 덩치가 커도 사자한테는 꼼짝 못합니다.
아프리카 마사이족이 쓴 글을 한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소 먹이는 일을 하는데 어느 날 밤에 소들이 오줌을 쫙쫙 싸더라는 거예요. ‘맑은 밤에 무슨 비가 오나?’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비가 오는 게 아니라 소가 사자를 보고 겁을 먹어서 오줌을 쌌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사이족은 소가 오줌 싸는 것을 보고 사자가 나타났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사자와 소가 싸우면 사자가 이깁니다. 고양이와 쥐가 싸우면 당연히 고양이가 이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두려움’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여러분 마음 안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그 두려움을 이기시기 때문에 다시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은 점점 커지는 반면 두려움은 점점 줄어들어 결국에는 없어져 버립니다.
하나님과 ‘죄’가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하나님과 ‘슬픔’이 싸워도, 하나님과 ‘고난’이 싸워도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다윗의 마음에 두려움이 엄습해서 두려움으로 가득 찼는데 다른 길이 없으니까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 한쪽에 숨어 있던 하나님이 삐죽이 올라왔습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불안, 근심이 가득 찼는데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떠오르면서 두려움을 다 먹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물러가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찌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4)
조금 전까지는 다윗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 형편만 보면서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웠는데 이제 다윗의 마음에서 두려움이 팍팍 물러가는 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 내겐 하나님이 계시지. 하나님을 의지해야겠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셨구나! 하나님이 날 위해 싸우시는구나! 하나님이 내 편인데 내가 왜 두려워 해? 하나님이 날 지키시는데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겠어?’3절까지는 두려웠는데 4절에 들어가서는 그 두려움을 쫓아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속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왜 주일에 교회에 나가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까? 왜 기도를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계속 갖기 위함입니다.

언론사와 인터뷰 할 때

저는 종종 신문사나 잡지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인터뷰를 하면서 저에게 가능하면 종교적인 이야기를 빼달라고 주문을 합니다. 성경 이야기를 빼라는 것이죠. 다른 목사님들은 본인이 훌륭해서 목사가 됐기 때문에 성경이나 하나님 이야기를 빼도 이야깃거리가 많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잘나거나 똑똑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됐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놓고는 아예 이야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기자가 저한테 “만일 목사님이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글쎄요. 택시 운전을 하거나 아파트 경비를 하고 있겠죠.” 그러자 기자가 힘 빠지는 소리 한다고 하더군요.
예전에 저는 인생을 살기가 너무 두려웠어요.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어요. 그것도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새파랗게 젊었을 때인데요, 그때 저는 이미 제가 못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닥치는 크고 작은 일 속에서 주를 의지했습니다. 제가 오들도 여러분 앞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당하는 어떤 어려움 속에도 하나님이 늘 같이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軍 시절

제 아들은 특전사 사령관 비서로 있었는데, 어느 날 내무반 고참이 특전사 사령관 비서실에 혼자 들어왔답니다. 제 아들은 일등병이고 그 사람은 내무반 고참이었는데, 사령관 전화기를 들고 일본에 있는 자기 여자 친구와 영어로 통화를 했습니다. 그 일이 통신 보안에 걸려서 제 아들이 사령관한테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사령관이 “누가 내 전화로 일본에 있는 여자 친구한테 영어로 전화를 했어?”라고 다그치자 비서실에 있는 5명 중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제 아들밖에 없어서 다 제 아들 영국이가 했다고 말했습니다. “너, 왜 내 전화기로 일본에 전화했어?” “저는 안 했습니다.” “안 했다고? 이 녀석이 거짓말을 해? 당장 영창 보내.”
그래서 제 아들이 영창에 가게 됐어요. 아들이 저한테 이야기하기를 “아버지, 제가 영창 가는 게 나아요. 그 고참이 사령관실에 들어와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엄청나게 큰 벌을 받기 때문에 감히 이야기를 못 하겠어요” 하더라고요. 제 아들이 군대에 가서는 기도도 안 하다가 그 다음날 영창 가게 생겼으니까 그날 밤을 새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이 모면케 하시고

제 아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영창 가려고 가방을 싸는데 참모장이 불렀습니다. “박영국, 네가 전화 안 했어?” “예, 제가 안 했습니다.” “너, 하나님 믿지?” “예.” “너, 하나님 이름으로 전화 안 했다고 맹세할 수 있어?” “예, 있습니다.” “네 아버지, 목사님이지?” “예, 그렇습니다.” “네 아버지 이름으로 네가 전화 안 했다고 맹세할 수 있어?” “예, 그렇습니다.”
참모장은 곧이어 비서실 사병들을 전부 집합시켰습니다. “너 영국이 전화하는 거 봤어?” “안 봤습니다.” “넌 봤어?” “안 봤습니다.” “넌?” “안 봤습니다.” “이놈들이 보지도 않고 왜 영국이가 했다고 했어?” “영어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놈들아, 대한민국에 영어 할 수 있는 사람이 영국이 하나밖에 없어?”
그 참모장이 사령관에게 보고했습니다. “사령관님, 제가 볼 때 영국이가 전화 안 한 것 같습니다. 쟤는 거짓말 안 합니다.” “참모장, 몰라서 그래. 틀림없어.” “비서실에서 영국이가 전화하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령관이 비서실 사병들을 불러 재차 확인해서 제 아들이 영창을 안 가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금보다 귀해

저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이 저의 어려움이 아니라 예수님의 어려움인 것을 압니다. 그런 예수님이 내 마음에 안 계시면 뭣 때문에 형식적으로 교회에 왔다갔다 하겠습니까? 저는 단지 목사이기 때문에 이렇게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당하든지 단 한 번도 예수님은 그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믿고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이 저주를 받지만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가뭄이 와도 그 잎이 푸르고 결실이 그치지 않는다(렘 17:5~8)고 했습니다.
사막에 심은 떨기나무는 비가 안 오면 금방 말라버리지만 강변에 심은 나무는 아무리 가물어도 늘 푸른 잎을 가진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환란이나 고난이 왔을 때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푸른 강가에 심은 나무처럼 항상 그 잎사귀가 푸르고 열매가 넘치지만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잘나가다 조그만 어려움이 있어도 넘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이 금보다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함께하는 신앙

그냥 교회에 와서 설교 한 시간 듣고는 ‘오늘도 예배에 참석했다’는 식으로 믿으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에 나오는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게 되길 바랍니다. 그냥 교인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있는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고 여러분은 교회의 지체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어려울 때 나도 어려워하고, 교회가 기쁠 때 나도 기뻐하고 교회에서 수양회 가자고 할 때 ‘직장 때문에 어렵지만 하루라도 가야겠다. 나도 교회의 한 부분인데 빠질 수 있나!’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선교를 한다고 하면 ‘내가 직접 선교는 못하지만 선교비로 동참하자’ 하십시오.
다음 달에는 교회에서 부인 자매 영어 말하기대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영어 하나도 모른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하는 건데 ABC라도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 안에서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마음을 쏟으면 교회와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어려울 때 ‘나만 피하면 된다’는 마음은 지체의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난도 같이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같이하지 못합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면, 나의 문제가 교회 안에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의인은 결코 넘어지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평안과 담대함을 얻은 다윗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당한 어려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의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시 56:5~7) 그러면서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금방 두려움이 물러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혈육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랴?’ 하면서 마음에 평안과 담대함이 왔습니다.
다윗의 마음에 믿음이 들어오니까 그 믿음을 따라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다윗이 갑자기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짓을 하니깐 아기스왕이 “이놈은 다윗이 아니고 미치광이네. 미친 사람이 적어서 내게 데려와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당장 끌어내어 쫓아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며 놀라운 주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시고

저는 지금까지 인생의 길을 걸어오면서 실족할 수도 있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었지만 다윗의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저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됩니다. ‘우리의 일’이라고 여길 때 문제가 되지만 ‘하나님의 일’이 되면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지요.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면 38년 된 병자의 병도,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라도, 풍랑이 와도, 광야에서 오천 명이 먹을 것이 없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예수님이면 다 해결됩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그 피로 죄 사함을 받고 난 뒤에는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어려움이 닥칠 때 주님을 기억하면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살아서 걱정을 물리치시고 문제를 아름답게 이끄십니다.

문제를 주님께 맡길 때

죄의 문제도 그래요. 마음 안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그 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 예수님이 있는 사람은 분명히 자신이 죄를 지었지만 죄에 대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평안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내가 나를 이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기시기 때문에, 그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난 후 마음을 꺾고 생각을 버렸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셨기에 내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이 그 일을 해결해 주시고 나로 찬송하게 하신다는 거지요.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하시고 이 교회와 함께하십니다. 그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죄나 고통이나 어떠한 문제든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을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2006.8.6  주일 낮 설교 요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