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맡은 관원장처럼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아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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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맡은 관원장처럼 예수님을 의지하여 나아갈 때
2006.6.11 주일 낮 설교 요약- 106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6.1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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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정말 쉬운 것

이번에 부산과 부천에서 대전도집회를 하면서 신앙은 정말 쉬운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사람 중에 ‘신앙이 참 쉬운 건데 그걸 몰랐네’라고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목사니까 저렇게 말하겠지. 신앙이 쉽긴 뭐가 쉬워? 신앙이 쉬우면 내가 신앙생활 잘하겠지만….’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부천에서는 요한복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처음에 요한복음 2장을 이야기하다가 11장의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 9장의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 그리고 8장의 예수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살리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런 장면들을 연극으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것이 어려웠습니까? 나사로가 “꼭 살아나야지! 동생들을 놔두고 죽으면 안 돼!” 하며 힘을 쓰다 보니 살아났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면, 신앙은 힘써야 되는 것이고 어렵고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실컷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그냥 살아난 거예요.

내가 아니라‘예수님’이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나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끌려가고 있는데, 그 여자가 애쓰고 노력해서 구원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여자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땅에 글씨를 쓰시다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여자는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성경은 구원이나 신앙이 전부 이런 식으로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노력으로 받을 수 없는 구원  

어제 토고에서 형제 두 명이 한국에 왔습니다. 우리 나라가 13일 화요일에 토고랑 월드컵 경기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토고에 대해 아는 곳은 우리 선교회밖에 없습니다. 얼마 전 SBS PD가 토고를 취재하러 가서 한국 사람을 찾다가 우리 선교회의 이준현 선교사님을 만났답니다. 그 PD가 선교사님의 삶을 취재하면서 굉장히 뜨거운 감명을 받았어요. 그리곤 저한테 토고에서 찍은 비디오를 CD로 만들어서 보내왔어요.  
이번엔 MBC에서도 토고 형제들을 인터뷰 한다고 해서 형제들이 한국에 왔는데, 그들의 구원간증을 들어 보니, 기쁜소식선교회를 만나고 난 뒤에는 신앙이 그전과 너무 다르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는 목사들이 성경을 펴놓고 설교하기를 “우리가 열심히 충성하고 율법을 지키고 기도하고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고 회개하면 천국 간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도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는 죄인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난 뒤 성경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굉장히 많은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서 배웠던 성경과 구원받은 후 직접 한 자 한 자 읽어본 성경이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없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표면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쪽에 마음을 두는 겁니다.

‘바로’의 두 관원장

오늘 읽은 창세기 40장에는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우리 신앙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창 40:9~11)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듣더니 그에게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리니 당신이 이왕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 손에 받들게 되리이다”(창 40:13)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도 자기의 꿈을 말했습니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길함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창 40:16~17)
요셉이 그 꿈을 듣고는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창 40:19)고 했습니다.

꿈에 나타난 영적인 의미

저는 요셉이 꿈을 어떻게 해석하게 되었는지, 또 어떻게 해석대로 이루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이 꿈을 생각하는 동안 제 마음에 영적인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술 맡은 관원장은 술잔을 가졌지만 그 안에 술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그 앞에 있는 포도나무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래서 그 즙을 짜서 왕에게 드렸더니 바로가 그 잔을 받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은 흰떡 세 광주리 위에 각종 구운 식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그가 그것을 가지고 바로 앞에 갔는데, 바로가 그것을 받지 않고 공중의 새가 먹어버렸다는 겁니다.

잘한 것으로 나아가는 신앙

저는 예전에 떡 굽는 관원장과 같은 신앙을 했습니다. 기도도 잘하고 연보도 잘하고 충성스럽게 일했다 싶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담대하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었거나 실수를 했거나 주님 앞에 나쁜 행실이 있을 때는 주님 앞에 나아갈 자신이 없고 늘 부끄러웠어요.
저는 떡 굽는 관원장처럼 제가 잘한 걸 자꾸 얹었어요. 즉, 예수 그리스도 외에 내가 금식기도 한 것, 철야기도 한 것, 주일 지킨 것들을 잔뜩 쌓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주일을 꼭 지키고 거의 교회에서 지내면서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지름이 1미터나 되는 종을 샀는데, 철 로 종각을 만들어서 페인트칠을 하자고 했습
니다. 그런데 페인트칠 할 사람이 없어서 제가 나섰습니다. ‘페인트칠 하다 혹시 떨어져 죽으면 하나님 일 하다 죽었으니까 혹시 하나님이 봐주시지 않겠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하루 종일 철 종각을 칠하다 페인트를 다 뒤집어쓰고는 나중에 휘발유로 세수를 하다시피 했어요.
그 후, 우리 교회에서 아무도 할 수 없는 걸 내가 했다는 마음이 참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善에 대한 기준

대구 파동에서 사역했을 때 우리 교회에 약국을 운영하는 자매님이 있었어요. 하루는 제가 인간 속에는 선한 것이 없다고 설교를 했는데, 그 자매님이 조용히 저를 찾아오셔서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이런 걸 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선이 아닌지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하면서 말했습니다.
파동은 가난한 동네이기 때문에 약을 정기적으로 사먹어야 하는 환자들인데도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약을 사먹지 못하는 겁니다. 약을 사러 올 때가 되었는데도 오지 않으면 ‘이분이 약을 살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시지?’ 하며 이 자매님이 전화를 합니다. “약을 드시다 중간에 한 번이라도 끊으면 안 되는데 왜 오늘 약 사러 안 왔습니까?” 하고 물어 보고 돈이 없다고 하면 약국에 오라고 해서 약을 그냥 주었답니
다. 그러면서 “목사님, 이건 선한 일이 아닙니까?”라고 의아해 하는 겁니다.
이런 일은 인간이 볼 때는 선하고 아름다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선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선한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나오는 선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으로 갖가지 추하고 더러운 악을 행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 그제야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 자체가 너무나 추하고 더럽고 악하기 때문에 한두 번은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은 받으실 수 없습니다.

거짓된 인간의 善

여러분, 가짜 금과 진짜 금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십니까? 순 금반지는 칼로 아무리 긁어도 금반지입니다. 그러나 가짜는 껍데기는 금인데 칼로 긁으면 속은 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금을 했기 때문이지요.
정말 선한 사람이라면 아무리 마음을 헤집어도 미움이나 더러움, 악한 마음이 안 나오고 선한 마음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더럽고 추하고 악한데 껍데기만 선으로 포장했기 때문에 진짜 선은 없다는 거죠. 사람들은 여기에 많이 속아요. 내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고아를 도와줬다,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선하다면서 내 눈이 보기에 선한 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로마서 8장을 잠깐 펴 보시기 바랍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마음에 악이나 추함, 가증함과 거짓됨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을 행했다고 해서, 진실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된 마음에서 나오는 선, 미움이 가득한 데서 나오는 선, 음란한 마음을 가진 데서 나오는 선이 진짜 선일까요? 우리가 볼 때는 선한 사람도 있고 진실한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게 善이 없음을 깨달아야

여러분,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떡 굽는 관원장은 하나님 앞에 잘한 것이 많았습니다. 흰떡 은 예수님을 의미하는데 그 예수님만을 의지해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한 것들을 광주리에 이고 가는 거지요. 바로는 하나님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떡 굽는 관원장은 결국 왕 앞에 못 나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못하고 대신 공중의 새, 즉 사단이 그것을 다 먹어버렸습니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들이 이런 식의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떡 굽는 관원장이 멸망을 당한 것처럼 여러분도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정도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되고 신앙에 대해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술 맡은 관원장도 나름대로는 잘한 것이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열심히 왕 앞에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열심히 하다 보니까 ‘내가 하면 잘 될 것 같았는데 잘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선만 행하기도 어렵지만 악만 행하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한두 번은 선한 일을 할 때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선을 행해보려고 하면 ‘아, 내 속에는 악이 가득하구
나. 난 진실할 수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惡이 조금만 있어도 惡人

한번은 제가 대구 적십자병원 혈액원에 가서 혈액에 대한 공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적십자병원에서 대구 시내 병원의 수술실에서 필요한 혈액을 다 공급한답니다. 그 병원 직원이 모든 병원에서 수술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피라고 했습니다.
또 채혈하기에는 여고 2학년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피를 공급하기 전에 채혈한 혈액을 하나씩 검사를 합니다. 그런데 혈액 속에 간염 균이 있으면 그 혈액은 다른 환자에게 보내지 않습니다. 간염 균이 있는 혈액을 환자가 조금이라도 받으면 그냥 간염환자가 되는 거예요. 매독 균이 있는 혈액을 갖다 주면 환자가 그 혈액을 받는 순간 매독환자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의 세계도 똑같습니다. 혈액 속에 말라리아 균이 조금만 있어도 말라리아환자이고 간염 균이 하나만 있어도 간염환자가 됩니다. 그것처럼, 마음이 더러움으로 꽉 뭉쳐져서 다른 것이 들어갈 틈이 없어야 악한 사람이 아니라, 대부분의 행위가 선하다고 할지라도 악한 행동이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악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실을 사람들은 모르고 속고 있습니다.

죄의 나무에선 죄의 열매가

한번은 미국 뉴욕에서 집회를 했는데, 워싱턴에서 어떤 장로님 부부가 신문을 보고 뉴욕까지 찾아왔어요. 설교를 마치고 그 부부와 상담을 했는데 그 장로님이 미국에 와서 하신 선한 일들을 쭉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혹시 미국에는 포도를 맺는 가시나무가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혹시 엉겅퀴에서 무화과가 열립니까?” “목사님, 그런 나무가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장로님은 아담의 후손으로 죄의 씨인데 어떻게 죄의 나무에서 그렇게 훌륭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습니까? 그것을 한번 설명해 보세요” 했더니 그분이 더 이상 말을 못하시더라고요.
옛날에 어느 임금님이 백성들에게 볶은 꽃씨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마음의 꽃씨인데 이 꽃씨를 심으면 착한 사람은 예쁜 꽃이 피고, 악한 사람은 꽃이 피지 않고 그냥 나무만 나고, 더 악한 사람은 싹이 나다가 말라 죽고, 더욱더 악한 사람은 싹도 안 난다고 했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백성들이 전부 예쁜 꽃을 피워 온 거예요. 볶은 꽃씨를 심었기 때문에 싹이 안 나야 정상인데 예쁜 꽃이 핀 것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저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실 즈음 제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아버지가 유언하신 대로 장사를 그대로 치러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영혼은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저희 아버지는 늘 “난 죽어가는 사람 정말 많이 살려서 하늘나라 간다”며 큰소리 치셨는데 그날 아버지는 지금까지 행하신 모든 선이 참된 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셨어요. 아버지가 무거운 마음으로 한
숨을 쉬시더니 “내가 하늘나라에 가고 싶은데 너무 늦었다. 무슨 공로가 있어야 가지. 나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그때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술 맡은 관원장과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악한 마음은 아무리 선해지려고 애를 써도 선해지지 않습니다. 선하게 보이려는 그 모습을 다 버리고 술 맡은 관원장처럼 내 손이 빈손이 되
었을 때, 그때 포도나무인 예수님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러운 나를 보지 마시고

술 맡은 관원장이 포도나무를 보면서 ‘아이고, 저것 어떻게 하나?’ 했는데 금방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겁니다. 너무 기뻐서 ‘됐다. 저 포도를 따 즙을 짜서 왕에게 드리면 되겠구나!’ 하고 그 즙을 바로의 잔에 담아 그 앞에 가져다 드렸는데 왕이 그 잔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가 행한 모든 것은 추하고 더럽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더러운 죄인인데 나를 보지 말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보혈이 내 모든 죄의 값을 대신 지불했으니까 포도주 같은 그 피를 보시고 나를 받으시옵소서’ 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변함없는 주의 보혈

대전도집회를 마치고 나면 구원을 받은 형제 자매들 중에 구원의 확신 없이 그 마음이 흔들리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변함이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보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저도 모르게 속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잘못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러던 중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는 말씀을 읽고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 않고 떠나시지 않는다고 하셨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가 목사이지만 왜 실수가 없겠습니까?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범죄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잘해서 오늘 여기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모든 죄의 벌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기 때문에 저는 그 사실을 믿고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지금도 허물이 많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일하시는 것을,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한없이
무능한 사람이지만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를 보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여러분, 잘했다고 잘한 것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악한 일을 했다고 거기에 마음을 깊이 두지도 마십시오. 우리는 악하고 더러운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악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모든 죄를 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잘한 것 가지고 나아가지 말고, 술 맡은 관원장처럼 항상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나아가십시오.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의 벌은 십자가에서 이미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그 죄를 사하시고 나를 받으셨습니다’ 라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나와 같이 계셔. 나를 의롭다고, 거룩하다고 하셨어. 하나님은 내 안에 살아 일을 하셔.’ 그 예수님을 믿읍시다. 그 예수님이 우리 속에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셔서 어떤 더러운 죄인이든지, 어떤 악한 인간이든지, 의심이 많은 인간이든지, 믿음이 없는 사람이든지 간에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나 자신을 보지 말고 ‘이젠 나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이 나를 깨끗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나는 깨끗합니다. 나는 거룩합니다. 나는 의롭습니다. 주님이 다 하셨음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시면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힘있게 일을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 2006.6.11 주일 낮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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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 2020-03-11 15:12:21
성경을 어떻게 보면 이런 해석이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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