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말'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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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
2006. 6. 4  주일 낮 설교 요약 - 10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6.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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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어떤 간호사

오래 전에 경남 남해에 살던 어떤 처녀가 독일에 가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가 구원을 받았어요. 이 처녀는 그전에도 교회를 다녔지만 복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가 사해졌다는 복음을 듣고는 너무 감사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한국에도 이런 복음을 전하는 분이 있냐고. 누군가가 대구에 있는 박옥수 목사가 이런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자매가 여러 번 전화 통화를 시도한 끝에 저와 통화를 하게 됐어요. “목사님, 목사님 교회에 혹시 집회가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제 아버지가 남해에 계시는데 아버지를 집회에 모시고 싶습니다.” 그때 마침 여름수양회가 다가오고 있어서 얘기했더니, 그 자매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아버지, 대구에 계신 박목사님이 말씀 전하시는 수양회 한번 가세요” 하고 권했습니다.
그 어르신은 유교를 믿는 분이니까 기독교 신앙과는 정말 맞지 않거든요. 그래서 망설이다가 이국 만리에 있는 딸이 간절히 부탁을 하길래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자매가 휴가를 못 받으니까 친구한테 “우리 아버지 모시고 수양회 좀 가라!”고 부탁해서 그 어르신이 수양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

수양회에 참석한 그 어르신이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가도 무슨 얘기인지 못 알아들으니까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수양회를 다 마치지 않고 가버리면 딸이 섭섭해 할까 봐 마지막 날인 금요일까지 버티기로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런데 금요일에 그분이 구원을 받았어요.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가 사해진 걸 깨닫고 기뻐하면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한 달 후에 저한테 전화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바쁘시지요? 남해로 지나가는 길에 우리 집에 한번 와 주십시오.”  전화를 받고도 못 갔었습니다. 한 달 후에 또 전화가 왔어요. “목사님, 일부러 오시진 말고 남해로 오시는 길이면 꼭 한번 들러 주십시오.” 그렇지만 또 못 갔어요. 세 번째 다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러 남해 갈 일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그분과 삼 일을 같이 지냈는데, 마지막 날 아침에 성경책을 들고 제 방에 오시더니 질문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나는 이 성경이 거룩한 책인 줄 알았는데 희한한 이야기가 다 있데요. 아비가 딸과 동침하고,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동침하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왜 성경에 썼습니까? 어떨 때는 얼굴이 달아올라서 못 읽겠는데 그것 좀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 어르신이 성경을 진지하게 읽으시고는 질문을 하셔서 대답을 해 드려야겠는데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다 입을 열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그린 책이기 때문에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하고 악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하고 말씀 드렸더니 “그래요? 정말 우리 마음하고 똑같네요” 하며 수긍을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은 다말

여러분, 오늘은 창세기 38장의 다말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다말이 양털을 깎으러 나온 시아버지를 유혹하기 위해 창녀로 변장해서 시아버지와 하룻밤을 잔 거예요. 그러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 1장에도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마 1:1~3)

‘다말’이 가진 믿음의 세계

처음에는 이 성경을 그냥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이 여자, 진짜 몹쓸 여자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같이해? 진짜 더럽고 음탕한 여자 아니야?’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계속 읽어가다 보니 성경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다말을 음탕하고 더럽고 가증한 여자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높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8장을 다 할애해서 다말이 유다와 동침한 그 상황을 자세히 기록한 것을 보면서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과 계획이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좀 더 자세히 읽어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다말이 가진 믿음의 세계를 발견하고 난 뒤에는 다말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

요한계시록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어떤 일이든지 시작이 있고, 진행되는 과정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절에는 ‘왜 중간이라는 말은 없고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만 있을까?’ 하면서 성경의 역사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시작하신 뒤에는 꼭 사단도 일을 합니다. 물론 사단의 역사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하나의 과정이지만 우리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은 안 보이고 사단만 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다 마무리를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단은 약속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약속을 이루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1~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브라함은 처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는 반대로 자기 아내가 너무 늙어 경수가 끊어져서 아기를 못 낳을 것 같으니까 계집종을 취해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셔서 아들 ‘이삭’이 태어나고, 그 이삭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될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다윗은 사울이 죽이려고 해서 쫓겨 다니다가 나중에는 이스라엘에도 머무르지 못해 이국 땅,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아내는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렸습니다. 그 후에도 시글락이 불타고 다윗을 돌로 때려죽이려는, 말씀과는 정반대의 일이 계속 일어났지만 결국에는 다윗이 왕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요셉에게 치리자가 된다는 꿈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치리자가 되기는커녕, 종으로 팔려가고 나중엔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총리가 되어서 애굽의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자기 민족도 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이러합니다.

‘다말’에게 임한 복

유다에게는 아들이 셋인데 첫째가 엘, 둘째가 오난, 그리고 셋째가 셀라입니다. 다말은 유다의 맏아들 엘과 결혼을 했는데 그냥 평범한 집인 줄 알고 시집을 갔지만 시집 가서는 깜짝 놀랐을 겁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으리라”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그 복을 아들 이삭에게 주었습니다.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가 있었는데 야곱에게 그 복을 주었어요.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는 유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복을 주신 거예요.
다말은 유다의 맏아들 엘의 아내이기 때문에 자기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태어나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위대한 여자가 되는 거예요. 다말은 흥분했습니다. ‘야, 내가 시집을 잘 왔구나! 이 집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게 되는구나! 내가 아들을 낳게 되면 그 아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되는구나! 내가 이런 복을 받았다니….’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소망이 넘쳤습니다.

맏아들‘엘’의 죽음

그런데, 사단은 다말이 가진 믿음과 소망을 철저하게 무너트립니다. 다말이 엘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복을 받게 되는데, 사단은 다말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이끌어갑니다.
다말은 시댁이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했는데 유다나 엘이나 오난, 셀라의 마음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좋은 가문이다’는 것만 자랑했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엘은 ‘내가 유다의 맏아들인데, 하나님이 우리 가문에 이런 복을 주셔서 아들을 낳으면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게 되는구나! 그러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이 태어나고 만민이 내 후손으로 태어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먹고 마시고 방탕하고 음란하고 가증하게 살았습니다. 다말이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그 복을 받지 못하도록 사단이 이끌어 간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엘을 죽여 버렸습니다. 엘은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귀한 위치에 있었지만 스스로 그 위치를 소홀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어요.

친정으로 쫓겨난 다말

그 당시에 유대 나라에는 형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형의 동생이 형수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은 동생의 아들이 아니라 형의 족보에 올라가게 됩니다.
어느 날, 유다가 말했어요. “오난아, 네 형이 세상을 떠났잖아. 섭섭하고 슬프구나. 이제 네가 형수하고 동침해서 아들을 낳아 형의 아들이 되도록 해라!” 오난이 형수와 동침하면서 생각을 해봤어요. “내가 형수하고 잠을 자서 아들을 낳아도 내 아들이 아니라 형님 아들이 되잖아. 내 아들을 먼저 낳아야 해. 형님에게 먼저 아들을 낳게 해서는 안 돼!”
그래서 형수하고 잠은 잤지만 형수에게 아기를 갖지 못하게 한 거예요. 하나님이 유다 집에 아들을 낳게 하시려는 그 계획을 막는 사단의 역사에 엘과 오난이 쓰임 받은 겁니다. 오난이 하나님 뜻과 정반대로 행하니깐 그것을 악하게 여겨 오난도 죽여 버렸습니다.
다말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자기 남편 엘을 통해서 아들을 낳을 수 있었는데 못 낳았고, 시동생을 통해서 아들을 낳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되지 않았던 겁니다. ‘내가 이 집의 대를 이어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야 하는데’ 하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다말이 실망을 했습니다.
이제는 셋째 아들인 셀라가 다말과 동침해서 아들을 낳아 엘의 아들로 대를 이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유다에게 ‘셀라도 다말과 동침해서 죽으면 어떡하지? 저 며느리를 친정으로 쫓아 보내야겠다’는 인간적인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유다가 다말을 불렀어요. “우리 집 며느리로서 네가 셀라와 동침해 아들을 낳는 것이 당연하지만 셀라는 아직 어려서 너와 동침할 수 없어. 그러니 친정에 가 있거라. 셀라가 장성하면 너를 부를게.”

절망을 주는 사단

세월이 많이 흘러 셀라가 장성했지만 유다는 다말에게 셀라를 주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오난이나 엘, 유다가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기의 판단이 아니라 유다 가문에 아들을 낳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막으려는 사단의 방해입니다. 다말은 ‘내가 이 집에 시집 와서 아들을 낳아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크고 귀한 복을 받기 원했는데 그 길이 다 막혀버렸네. 나는 안 되겠구나. 나는 복된 여자가 아니구나’라는 절망적인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냉정하게 읽어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마다 사단은 한번도 그냥 두지 않고 불가능한 쪽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말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말이 처음 시집 왔을 때는  ‘내가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돼서 그리스도의 족보에 내가 들어가는 복을 얻는구나!’ 하며 믿음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사단은 다말을 ‘나는 이 가문의 씨를 잇는 건 불가능해’라는 절망적인 마음으로 계속 이끌어가고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하나님의 성령만 일하지 않고 사단도 같이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사단이 주는 생각으로 그 일을 보면 ‘나는 안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부를 통해서라도

그러던 어느 날, 다말에게 시어머니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고, 얼마 후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라는 곳에 온다는 소식도 들려 왔습니다. 그때 다말에게 ‘그러면 시아버지에게서 씨를 받을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허락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서 예수님의 족보를 이어야 하는가? 이렇게 하기는 싫다. 어떻게 시아버지하고 동침을…. 안 돼.’ 다말은 암담해졌어요.
시아버지와 동침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거부가 있었지만 결국 ‘그래도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씨를 얻을 수 있다면…’ 하면서 자기 마음을 한번 꺾었습니다. 자기 마음으로는 시아버지의 씨를 갖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난 거예요.
다말의 마음에서는 허락이 됐지만 “시아버지, 안녕하세요?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기 위해서 하룻밤 잡시다”라고 한다면 시아버지가 뭐라고 하겠어요? “우리 집에 이상한 여자가 들어와서 저 여자가 내 아들을 다 잡아 먹더니 이제는 날 잡아먹으려고? 당장 나가!” 틀림없이 그럴 겁니다.                
‘그럼, 어떡하지? 그래, 내가 창녀로 가장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해서 그분의 씨를 얻는 거야. 그런데 그렇게 아기를 가지면 딴 남자랑 잤다는 게 드러나 돌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 죽는데 그건 어떡하지? 그렇지. 뱃속에 있는 아기가 시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표를 얻어야겠다’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어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향해서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길을 하나씩 여십니다.

창녀의 옷을 입고

다말이 믿음으로 과부의 옷을 버리고 창녀의 옷을 입고는 저녁 때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다가 산보 나오는 길 앞에 가서 앉아 있었어요. 시아버지가 지나가는데 떨리지요. 자기 목소리를 알면 안 되잖아요. 목소리를 꾸미면서 “놀다 가세요” 했습니다.
유다는 아내가 죽어서 여자 생각이 났는데, 여행 중에 있고 고향도 아니겠다 싶어 창녀하고 하룻밤 자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 거예요. “그래, 우리 같이 자자.” “돈 있어요?” “돈 없어.”  “돈 안주면 안 돼요.” “염소 새끼 한 마리 줄게.” “그러면, 염소 새끼 가져 왔어요?” “다음에 주면 안 돼?” “그러면 약조물을 주세요. 손에 있는 지팡이하고 끈하고 도장을 약조물로 주면 염소 새끼 준다고 믿을게요.” “그래.” 그러고는 그날 동침을 했어요.

마침내 잉태한 다말

그러고 난 뒤에 유다가 창피하니까 자기가 안 가고 친구를 보내 염소 새끼를 주고 약조물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 창녀가 안 보이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그곳에는 창녀가 없다는 겁니다. 그 친구가 유다에게 와서 얘기했더니 “내버려둬. 괜히 그랬다가 부끄러움 당하겠다” 하고 끝냈습니다.
그 후 다말이 잉태를 했습니다. 몇 달 후 다말의 배가 불러왔습니다. 다말이 음란하게 살아서 임신을 했다고 난리가 났어요. 유다가 노발대발했습니다. “며느리가 우리 가문에 들어와서 딴 남자와 음행을 해? 당장 끄집어내 불태워 버려.” 마당에 장작더미를 잔뜩 쌓아 놓고 다말을 태워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다말이 끌려가면서 말했어요. “시아버지, 이 뱃속에 있는 아기 아버지는 바로 내가 가진 이 도장과 끈과 지팡이의 임자입니다. 이게 누구 것인가 잘 보세요.” “세상에, 창녀인 줄 알았더니 너였구나. 내가 셀라를 너한테 줘서 씨를 얻게 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어. 네가 나보다 옳아. 당장 불을 꺼라.” 그래서 다말이 살았고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졌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형제 자매들이 음탕하게 느끼지 않고 다말의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다말에게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위해 달려갔을 때 하나님이 길을 여셔서, 결국 다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내일 이맘때”라는 약속으로

저는 IYF의 젊은 학생들을 ‘별’이라고 말합니다. ‘매튜’라는 형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왔는데 처음엔 정말 형편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집회 하러 갔을 때, 매튜 아버지가 “목사님, 우리 아들 신앙생활 잘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가 “Tomorrow about this time”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당신의 아들이 변할 것이라고. 정말 그는 변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복음 전도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IYF 학생들에게 자주 그 이야기를 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너희들은 달라져. 안 될 것 같은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거야.”
우리 선교회가 하는 모든 일들, IYF나 그라시아스 합창단이나 Goodnews Corps나 처음부터 될 것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을 할 때마다 사단이 잔인하게 짓밟았습니다. 우리가 이 예배당을 지을 때도 진짜 안 될 것같이 사단이 이끌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셨고 또 이루십니다.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면

서울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난 교회를 발견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서울 사람들이 불쌍하구나.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겠구나’ 했지만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구원받고 나서 ‘이단’이라면서 교회에 안 옵니다. 전화를 하면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하기도 합니다. 별별 가슴 아픈 일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파와 오메가인 하나님께서 안 될 것 같은 일들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면 너무 신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 예수님 안에 있다면 살아계신 주님이 여러분 속에 일을 하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귀가 여러분의 길을 아무리 막고 절망 속으로 이끌어도 하나님은 거기서 소망을 만들어내고 길을 여십니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사단이 주는 형편 가운데 실망하고 있습니까? 혹시 복음을 위하여 살기를 주저하고 있습니까? 연보를 드리는 데 인색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사단에게 속지 마십시오.
자신을 주님 앞에 드리면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다말에게 길을 여신 것처럼, 우리가 주의 복음을 위해서 가족을 구원하고 서울시민을 구원하는 그 귀한 일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길을 여시면서 은혜와 능력을 더하실 줄 믿습니다.
            
- 2006. 6. 4  주일 낮 설교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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