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나아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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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수님 이름으로 나아가면
2006. 5. 21  주일 낮  설교 요약 - 103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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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급했던 어린 아기

아프리카 르완다에는 전희용 선교사님이 선교를 하고 계시는데 지난주에 새로 태어난 아기의 장이 막히는 아주 위급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사실 장을 푸는 수술은 아주 단순한 수술인데도 르완다에는 그런 수술을 할 만한 병원이 없었습니다.
그 수술을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케냐 나이로비지만 사경을 헤매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나이로비까지 차로 간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르완다에서 나이로비까지 가는 비행기 편도 없었습니다.
저희는 그 일을 두고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그 어린 아기가 한국에 있었으면 아무 문제없이 그냥 한두 시간이면 수술을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의료시설이 낙후된 아프리카에 있기 때문에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저희 마음이 한없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이로비에서 자가용 비행기 한 대가 볼 일이 있어서 르완다에 온 것입니다. 병원 측 주선으로 마침 그 비행기가 돌아가는 편에 아기를 태워서 나이로비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어요. 그 비행기 조종사가 르완다에 와서 한 생명을 살린다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기뻐하면서 그 아기를 태워서 나이로비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곧 수술을 했고 그 아기는 지금 참 건강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한 사람의 생명이 죽거나 사는 것,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렸는데 보편적으로 이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쟁이들은 툭하면 하나님이야. 비행기가 갈 일 있어서 갔지. 나는 하나님 안 믿어도 그런 일 많이 경험했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런데 제가 믿고 경험한 하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때로는 지켜주시고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셔서 인간적인 면으로 전혀 불가능한 일을 이루시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너무 안타깝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르완다에 있는 전희용 선교사의 아기가 죽어갑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세요’라고 기도를 했다고 합시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어디로 걸어가시길래 “예수님, 어디 가세요?” 했더니 “네가 기도했잖아. 그래서 그 아기 돌봐주러 가” 하고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러면 제가 믿겠습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또는 예수님께 전화를 건다고 생각해 봅시다. “저, 박목사입니다. 르완다에 있는 전희용 선교사의 아기가 지금 다 죽어간다는데 주님이 낫게 하시든지 비행기 편을 허락해 주십시오.” “안 그래도 내가 알고 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푹 자거라.” 이렇게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 부모나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걱정하는 대신 다 기뻐하고 감사할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고 우리의 귀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하거나 계약서를 쓰는 것처럼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으면 안심하겠지만 어떻게 그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막연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분명히 예수님이 우리 속에 살아계시기 때문에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지는 못해도 그분의 음성을 마음으로는 들을 수 있습니다.

수양관에 물이 부족하여

그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저는 김천 대덕수양관에서 지하수를 얻었던 간증을 하곤 합니다. 우리가 대덕수양관을 짓고 매년 수양회를 해왔는데, 하루에 200톤 가량의 물이 필요했어요. 큰 물탱크에 물을 저장해 놓았다가 급수 담당자가 물을 절약하라고 주의도 주면서 아슬아슬하게 수양회를 진행했거든요.
몇 년 전에 별관을 지으면서 이제는 하루에 약 300톤의 물이 필요했어요. 옹달샘 물로는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하수를 개발하는 사람을 불러서 지하수를 파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000미터를 팠는데도 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8톤짜리 컴프레서 두 대를 동원했는데도 물이 안 나오니까 산에 불난 것처럼 흰 돌가루만 날리는데, 그것을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형제님 한 분이 지하수 박사를 불러서 파 보라고 하길래 많은 돈을 주고 박사를 불러왔습니다. 그분이 샘 판 곳을 한번 보자고 해서 같이 갔어요. 그분이 “여기는 절대로 물이 안 나옵니다”라고 하길래 제가 말했습니다. “박사님, 여기에 물 안 나오는 건 저도 알아요. 어디에서 물이 나온다는 말을 좀 해주세요.” 그런데 대덕산에는 물이 없대요. 산에 혈이 가득하기 때문에 지하수를 파야 헛일이라는 겁니다.

물을 주시겠다는 믿음이

새벽마다 이 암담한 일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보름이 지나도록 계속 기도했습니다. 20일 정도 기도했을 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 산을 살 때, 건물을 세울 때, 다리를 놓을 때, 김천시로부터 얻어야 하는 허가가 수백 개였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도우셨는데, 지금까지 도우셨던 하나님이 반드시 물도 주시겠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물을 주신다는 것은 제 귀로 들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음성임을 분명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물이 안 나오는 상태에서 수양회를 해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텐데’라는 믿음이 생긴 뒤부터 마음이 너무 자유로웠습니다.
그 뒤에 전세계에서 수천 명의 대학생이 모이는 세계대회가 그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진행부에서 광고하기를 “여러분, 물이 충분하니까 아끼지 말고 쓰세요” 하길래 ‘누가 저런 광고를 해? 물이 많이 남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옆에 있는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1200미터 판 그 구멍을 그냥 두면 오물이 들어가 지하가 오염되기 때문에 메워야 하는데, 그냥 메우면 같이 박아 넣은 쇠 파이프가 녹이 슬어 지하가 오염될까 봐 그걸 뽑아내려고 한 형제가 거기다가 포크레인을 걸었어요. 잡아당기니까 파이프는 안 빠지고 포크레인만 번쩍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파이프를 뽑으려고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더니 ‘퍽’ 하더니 물길이 치솟았습니다. 형제가 너무 좋아서 “물 나온다!”고 고함을 질렀답니다. 물의 양을 재어 봤더니 하루에 300톤이면 충분한데 450톤이나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쓰고 남을 정도로 그 산꼭대기에서 지하수가 나오고 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요셉의 형들

오늘 우리는 야곱과 요셉, 베냐민의 관계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창세기 43장을 여러 번 읽었는데, 어느 날 이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면서 너무 감격스럽고 감사했습니다.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는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해서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그 후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는데, 그가 총리가 되고 난 뒤에 다가올 흉년을 대비해서 풍년이 계속되는 7년 동안 곡식을 모았지만 다른 곳에서는 흉년에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에 왔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을 알아보고는 그들을 몰아세웠습니다. “너희들은 정탐꾼이다.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다.” “아닙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열두 아들로서 하나는 없어졌고, 하나는 지금 집에 있습니다.” “너희 집에 있는 말째 아우를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그리고 양식을 주어서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형들이 요셉에게서 양식을 사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지만 애굽에서 사온 곡식을 다 먹었기 때문에 다시 양식을 사러 애굽으로 가야하는데 갈 수가 없었습니다. 말째 아우 베냐민을 데리고 가는 것을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베노니’를‘베냐민’으로

야곱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이 있었는데, 야곱은 그 중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아기를 많이 낳았지만 라헬은 아기를 낳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다가 아기를 낳았는데 그 첫째가 요셉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더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에서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어요.
라헬이 두 번째 아기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하는 중이었는데 너무 험난하고 격한 길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난산으로 피를 흘리면서 라헬이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산파가 와서 라헬을 흔들면서 “두려워하지 마! 네가 또 아들을 낳고 있어!” 했지만 라헬은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죽어가면서 이제 태어나는 아들을 생각하니까 너무 슬픈 거예요. ‘내가 죽은 뒤에 저 아들을 형제들이 얼마나 멸시하고 괴롭힐까? 나는 죽어도 괜찮지만 저 아들을 위하여 내가 살아야 하는데…. 누가 이 아들을 돌보아 줄까?’ 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라헬은 점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태어났지만 네가 태어남으로 내가 죽어서 너무 슬프다. 너는 슬픔의 아들 베노니야. 슬픔의 아들아’ 하고 라헬은 죽었어요. 야곱이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아니야,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서 슬프지만 이 아들을 슬픔 속에 묶어둘 수는 없어. 아내 말대로 ‘베노니’라고 이름을 지을 수 없어.’ 야곱은 자기 아들의 인생 속에 꼬리처럼 달려 있을 슬픔이라는 단어를 지워주고 싶어서 ‘베냐민’, 즉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습니다.

베냐민이 함께 가야

야곱의 아들들이 곡식을 가지고 다시 집으로 갔어요. 야곱이 보니 열 아들이 양식을 사러갔는데 하나가 없는 겁니다. “누가 없어졌지? 시므온은?” “그 땅의 총리가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시므온을 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뺏겼는데 베냐민마저 빼앗아가려고? 도대체 무슨 운명이 이래? 난 베냐민을 보낼 수 없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요셉은 없어졌고 베냐민만 남았는데 이 아들마저 빼앗기면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살아? 난 내 아들을 절대로 보낼 수 없어.” 야곱은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얼마 후 그들이 애굽에서 사온 양식이 다 떨어져 배가 고프기 시작했어요. “뭐 하느냐? 애굽에 양식을 사러가지 않고.” “아버지, 우리는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갈 수 없어요. 말째 아우 베냐민을 보내시면 가지만 데려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의 얼굴을 못 본대요. 베냐민을 보내주세요. 그럼 갈게요.”

야곱의 결단

“너희는 다 나를 해롭게 하는구나.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는데 베냐민마저 나에게서 빼앗아 가려고 하는구나. 너희는 왜 베냐민이 있다고 이야기했어?” “아버지, 그게 아닙니다. 총리가 자세히 물었어요. 너희 아버지가 아직까지 살아 계시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아우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우리가 거짓말할 수 있습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았습니까?”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이 밥을 달라고 울고 배가 고파서 쓰러졌습니다. 애굽에 가면 양식을 살 수 있는데 야곱은 그래도 베냐민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아들들이 “아버지, 이러면 우린 굶어 죽습니다. 베냐민을 보내 주십시오. 베냐민이 가야 합니다.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베냐민을 보내 주십시오.” 결국 야곱이 결단을 내렸어요. “그래, 그러면 베냐민을 데려 가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된다면 잃으리로다. 그냥 가지 말고 그분에게 드릴 예물을 좀 준비해라. 꿀, 파단행 같은 예물을 가져가거라.”
그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다시 요셉에게 양식을 사러갔는데 요셉이 베냐민이 그들과 함께 있음을 보고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오정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창 43:16)

그리스도의 그림자, 베냐민

하나님은 여기에서 베냐민을 주인공으로 삼으셨는데 베냐민의 이름은 ‘오른손의 아들’, 바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갔을 때 요셉이 요구하는 것은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냐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요셉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없고 요셉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베냐민을 안 보내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보내면서 여러 가지 예물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 예물은 거들떠보지 않고 베냐민이 있는 것만 보고 그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즐기는 이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떤 일을 만나면 자기가 문제를 다 처리하고 해결하려고 하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고, 연보 드리고, 예배 참석하고, 율법 지키는 것을 예수 믿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지만 살아계신 예수님을 내 삶 속에 모시고 와 ‘그가 나와 함께 계심과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또 ‘그가 나를 지키시고 나와 하나’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넌 나하고 붙었어. 나와 하나야.” 그런데 여러분은 ‘내가 예수님과 하나라고? 내가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야? 나는 늘 죄도 짓고, 악하고, 추한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내가 정확하게 하나인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죄를 지었을 때도 죄의 문제를 예수님이 처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죄를 처리할 때는 늘 뭔가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죄를 처리할 때는 아무리 해도 눈처럼 깨끗하게 씻었다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예전에 장로교회에 다닐 때 원죄는 예수님이 씻어주셨고, 자범죄는 우리가 회개해야 씻어진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회개했지만 회개라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노트에 적어 가면서 회개를 해도 또 기억이 나고 또 기억이 나서 끝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한평생 회개해도 죄를 씻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죄를 회개하고 고백하는 것은 절대로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시게 해야지요.

믿음은 말씀을 인정하는 것

한번은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는데 “와”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제가 싫어하도록 떠들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런데 귀신의 마음을 알고 나니까 하나도 싫지 않더라고요.
“귀신아, 난 너하고 안 싸워. 예수님보고 싸워 달라고 그러지. 너, 예수님 이길 수 있어?”라고 말하면 귀신 들린 사람의 기가 팍 꺾기는 걸 느끼겠더라고요. 사단은 ‘나’와 싸우길 바라지만 제가 사단과 싸우면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앞세우니까 귀신이 떠나가 버리더군요.
여러분이 느끼기에 어떠하든지 성경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했으니까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너는 아니야’라고 마귀가 그럴지도 몰라요. ‘나는 성경도 안 읽는데, 아직 술도 담배도 못 끊었는데 어떻게 예수님과 하나야?’ 그러나 그것이 성경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내게 만 가지 이유가 있어도 ‘예수님과 나는 하나’입니다.
믿음은 단순하게 ‘나하고 예수님이 하나구나!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줄 알았어. 내게 역사하시지 않는 줄 알았어. 그런데 하나라고 하셨네. 예수님이 하나라고 하시면 나와 예수님은 하나야’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렵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참 쉬워야 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나와 예수님이 하나라면 내게 문제가 있을 때 예수님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특히, 죄를 사하는 문제만은 반드시 예수님이 맡아 해결해 주실 겁니다. 여러분의 죄를 사하는 문제는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전부를 손톱만한 것 하나도 안 남기고 예수님이 처리해 주십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러 오신 그 주님이 죄 문제를 우리에게 맡기겠습니까?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어 길을 걸어가면 문제가 닥쳐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첫째는,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둘째 그 주님이 내 인생에 닥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냥 자기 생각에 머물러 ‘난 죄가 많아. 죄가 있으니까 죄인일 거야’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건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잘못해서 우리가 지옥 간다면 그 책임은 예수님이 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 죄를 완벽하게 해결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내가 다 처리하려고 하는 거예요.
가정의 어려움이나 문제도 그렇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주님이 내 속에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니까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면 해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갈 때

창세기 43장에서 형들이 요셉 앞에 나아갈 때 요셉은 오른손의 아들인 베냐민만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베냐민을 요셉에게 데리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니까 많은 어려움이 있는 거예요. 야곱은 베냐민 없이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베냐민을 데려와야 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나와 주님이 하나가 되어 베냐민을 데려가면 오른손의 아들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다고.  
오늘 아침,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읍시다. 야곱의 아들들이 베냐민을 데리고 나오니까 모든 게 해결되고 요셉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지 상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추하고 더럽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와 우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쉼이 있고, 자유가 있고, 어떤 문제가 생겨도 주님이 해결하실 걸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평안함을 누리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2006. 5. 21  주일 낮  설교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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