⑩ 허드슨 테일러 2 (J. Hudson Taylor, 영국 1832~1905)
상태바
⑩ 허드슨 테일러 2 (J. Hudson Taylor, 영국 1832~1905)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5.05.2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854년, 허드슨은 5개월 간의 위험한 항해 끝에 처음으로 중국 해안에 도착했다. 중국 정부는 상해와 기타 4개 항구 도시에서만 외국인이 살 수 있도록 조항을 만들어 놓았다. 홍건적들이 외국인 거류지 가까이의 상해를 점령하고 있었고 4~5만의 정부군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는 눈 앞에 보이는 처참한 전투장면을 보며,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겪으며 기도했다. 또한 그를 중국으로 보낸 선교회는 선교의 지원에 있어 서툴고 미비해 테일러는 곧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다. 그럴 때마다 성경을 읽고 약속들을 묵상했는데 그것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상해에서 온 마음으로 전도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이미 그 정도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저 건너편 ‘내륙지방’에 있었다. 그곳에는 한번도 구원의 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가서 전해주지 않으면 결코 복음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내륙지방 전도여행을 강행하여 15개월 동안 열 번의 전도여행을 했고, 상해에서 10~15마일 이내의 지역들을 순회하며 1800여 권의 중국어 신약성경과 2000권이 넘는 책자와 전도지를 배포했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설교를 통해 많은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이는 그가 설교를 유창하게 잘 해서가 아니라 잃은 영혼을 향한 간절함 때문이었다. “한 달에 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그의 호소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선교의 자원자가 많아졌다.


머리모양과 복장까지 중국인들처럼

허드슨은 젓가락 사용을 익히면서 유럽식 습관들을 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머리모양과 복장까지도 중국인들처럼 꾸몄다. 영국인 선교사 공동체에서는 그것을 ‘우등 민족’의 품위를 떨어드리는 것이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복장을 하면 중국인들에게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선교사로서 중국인들을 이해하고 다가가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러한 중국인과 같은 차림은 나중에 CIM(China Inland Mission)의 규정이 되었는데 이 선교회의 별명은 ‘변발 선교회’였다.

그 후 테일러는 유럽인들에게 부여되는 몇몇 특권을 잃기도 했지만, 그의 변화된 모습이 준 자유함은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예전과는 달리 중국인들은 자기 안방에까지 그를 초청했다. 그는 감사한 마음에 그가 선택한 의복에 대해 “내륙 지방 전도의 가장 큰 조력자였습니다” 라고 말했다.

(정리/ 고정연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