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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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고린도후서 5장 14절 ~ 21절 - 2018. 11. 25. 주일 오전예배 설교 - 739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8.12.01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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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여학생을 만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번은 저에게 어떤 분이 찾아와 딸이 몇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며 상담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분은 딸이 어릴적에 이혼을 했는데 아내가 집을 떠나자 그 딸은 엄마를 너무나 그리워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엄마는 연락도 없고 딸을 보러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딸은 엄마를 그리워했지만 아빠가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 어린 딸이 어느새 자라서 21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나는 그동안 너무나 슬프고 불행했어.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나에게는 행복한 날이 오지 않을 거야. 이렇게 절망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생각이 들어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그 후 2년 정도 흘렀을 때 딸이 마음을 잡은 줄 알았지만 그 딸은 세 번째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때마침 서류를 집에 두고간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보니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자살도 그렇게 겨우 막을 수 있었지만 아버지는 ‘이러다 결국 내 딸을 잃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소망과 기쁨을 전하니

제가 그 집에 갔습니다. 딸은 제가 온 것을 알고 방문을 걸어 잠가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딸의 방문 앞에서 애원을 했습니다. “얘야, 목사님 바쁘신 분이야. 아빠 소원이야. 제발 문 좀 열어봐.” 한 30분이 지난 후에 문이 열렸습니다. 저는 그 딸과 마주 앉았지만 ‘너, 자살하면 안 돼. 자살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에 대한 소망과 기쁨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나면서 “내 아내는 한국 전통요리를 참 잘해. 네가 괜찮으면 내일 우리 집에 점심 먹으러 한번 와라”고 말했습니다. 이튿날 그 딸은 아빠와 함께 조그마한 선물을 사들고 저희 집에 왔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참 행복해 보였습니다. “사모님, 음식이 너무 맛있어요. 저도 이거 한 번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주세요.” 저는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섰는데 그 딸은 제 아내와 저녁까지 즐겁게 있다가 돌아갔습니다.
한 6개월쯤 지난 뒤 그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본국에서 지시가 내려와 얼마 후 대만으로 이동을 해야 합니다. 평생 한국을 잊지 못할 겁니다” 하시며 어딘가 전화를 거시더니 저를 바꿔주셨습니다. “여보세요?” 그 딸이었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니?” “예, 목사님. 저 지금 캐나다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있어요. 공부를 마치면 식당을 열려고 하는데 사모님과 꼭 한 번 오셔야 해요!” 그 딸의 마음에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다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망이 생긴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염산을 머리에 뒤집어쓴 딸

예전에 제 딸이 중학생 시절 학교 실험실에서 알코올 램프 위에 있던 염산이 폭발해 머리로 튀었습니다. 학교 양호실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한 달쯤 뒤에 보니 머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급하게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을 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저를 불러 치료비를 다 대주겠다고 했지만 제가 거절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보상받고 싶었습니다.
수술 후 한 달 정도 제 승용차로 딸을 등교시켜야 했습니다. 그동안 딸과 진지하게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학교로 가는 20여 분의 시간 동안 딸아이와 신앙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하면서 제 딸이 구원에 대한 믿음이 확실치 않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딸에게 구원에 대해 쭉 설명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딸은 분명하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동안 제 딸에게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노력과 믿음의 차이

목사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람의 어떤 말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전까지 살아온 ‘내’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고 잘 살아보려고 애쓰고 노력합니다. 노력하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히 바뀐 것을 믿는 건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베드로는 ‘내가 무슨 사도야. 예수님을 부인했는데 내가 무슨 예수님 제자야’ 하며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죄의 삯도 십자가에서 이미 지불되었는데 베드로는 아직까지 그 속에 매여 있었습니다.

다시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

다시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새벽 먼동이 틀 때 누군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했고 그대로 하자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제야 그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배에서 내려 가까이 가 보니 예수님이 숯불을 피워 떡과 생선을 구워놓고 베드로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전 같으면 “그럼요. 주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지요”라고 당당히 말했을 텐데 이젠 그렇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이제 베드로는 자기를 묶고 있던 그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면서 베드로가 성령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일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후 갈릴리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날로부터 불과 한 20~30일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베드로가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때 내가 예수님을 부인한 그 죄도 끝이 났구나’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보면서 ‘이제 난 예수님과 하나야. 나도 예수님처럼 하면 그대로 돼’라는 마음이 들어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여러분, 베드로가 ‘내게 있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에게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베드로가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였을 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만들어졌습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육신대로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 그럼 내가 일할 때 예수님이 역사하시겠구나.’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킨 자신에게 사람들이 몰려 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이야기합니다. 분명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람은 베드로지만 이 일은 예수님이 하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고 가셔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변하게 됐다는 사실을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우리에게 ‘아니야, 너는 여전히 실수하잖아. 여전히 육신적인 것 좋아하잖아’ 하며 말씀과 다른 생각을 넣어 줍니다. 그래서 좀 더 성경을 읽고, 기도도 더 하고, 더 신령해져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우리를 속입니다. 가끔 성도들이 저를 찾아와 “목사님, 전 너무 육신적이예요”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육신이니 육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육신 안에 예수님의 영이 계시니 영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육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몸을 움직여 일하듯 우리 안에 영이 있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육신이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지만 분명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동생 대신 죽은 형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예수님은 죄를 하나도 범치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죽으시면 안 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기 위하여 우리 이름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옛날에 부모님을 일찍 여읜 두 형제가 있었는데 동생이 자꾸 빗나가다 형과 싸우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형이 판사가 되어 어느 날 재판기록을 보는데 사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수가 자신의 동생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형은 울고 또 울다가 마음을 결정하고 동생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밤에 동생이 있는 교도소에 찾아가 동생의 죄수복을 대신 입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며칠 뒤 교도관들은 이 죄수가 당연히 동생인 줄 알고 사형을 집행하였습니다. 그 후 동생은 형이 자기 대신 죽은 것을 알고 너무나 고통스러워 자신이 그 죄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당신 죄에 대한 형이 이미 집행됐다.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다. 이제 형의 이름으로 살아라”라고 말합니다. 형이 죽었지만 법으로는 동생이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 말씀드린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이름으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고 성경은 우리가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죄의 값을 지불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이야기에서 형이 사형을 당했지만 법적으로는 동생이 죽은 것이 되어 더 이상 동생에게 물을 죄가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법 안에서는 우리가 죄의 값을 십자가에서 다 지불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는 우리 자신이 죄인이지만 하늘나라 법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씻었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시면서 우리는 죽었고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십자가에서 끝내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죄가 끝났고, 제 인생도 끝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기도를 할 때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이름과 주의 마음으로 하니까 껍데기는 제 모습이지만 속은 예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님이야 그렇지만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의 생각이고 성경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미 새롭게 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변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죄 사함 받기 전 저는 저녁마다 동네 친구 집에 가서 놀다가 밤이되면 친구들과 사과서리, 수박서리 등을 하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이면 새벽기도에 나가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오늘은 거기 가면 안 돼. 거기 가면 또 죄를 지어.’ 그렇게 다짐을 해도 저녁만 되면 저도 모르게 그 집에 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고 나서 놀라운 것은 제가 친구 집에 가지 않고 집에서 성경을 읽고 있던 것입니다.
한번은 친구와의 약속시간이 30분 정도 남아 그동안 성경을 좀 읽고 가야겠다며 앉았는데 약속은 다 잊어버리고 성경에 빠져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가 한 번도 달라지거나 변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옛날 모습은 다 지나가고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겉모습은 여전히 자신이지만 우리의 속은 예수님으로 다 바꾸셨습니다. 옛날 시조<옥에 흙이 묻어>에 보면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다 흙이라 하는구나/ 두어라 아는 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윤두서,조선후기 문인화가)라는 옛 시조가 있습니다. 귀중한 보석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더니 사람들이 다 흙으로만 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이렇게 바꿔보았습니다. “껍데기가 육신이라서 육으로 살았더니 오는 이 가는 이 전부 육으로만 아는도다. 두어라 그들이 육이라 한들 육일 수 있을 소냐.”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누구나 할 것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저는 옛날의 박옥수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입니다. 여기 계신 박 장로님, 김 형제님, 이 자매님 모두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날의 여러분은 다 지나갔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우리가 예수로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제는 ‘나도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대로 한번 해보자’ 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때 하셨던 것처럼 우리 속에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거울을 보면 여전히 나 같죠? 그런데 성경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말합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육의 주인이었는데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의 주인이 예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옛날의 나인 줄 알고 그 육신을 붙들고 싸우고 지지고 볶습니다.
자, 이제 우리 모두 새 마음을 가집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그런데 사단이 우리 마음에 계속 이야기합니다. ‘너는 아직까지 안 변했어.’ 그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으로 ‘나는 달라졌어! 나는 새 사람이 되었어’라고 말하십시오. 

어느 것을 믿을 것인가

여러분들이 육신만 쳐다보면 육신밖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놀라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으로 새롭게 된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졌을 때 그때부터 예수님이 놀랍게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사해놓아도 우리가 죄인이라고 믿으면 죄인입니다. 그러나 죄를 사한 것을 믿었을 때 그때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살아서 일합니다. 우리가 육신뿐이라고 생각할 때는 육신밖에 없지만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 걸 믿었을 때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능력으로 일을 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옛날의 여러분이라고 말합니까? 새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어느 것을 믿겠습니까? 여러분, 이 시간부터 이 말씀을 믿읍시다. ‘내가 추한 것도 사실이고, 실수한 것도 사실이고, 거짓말한 것도 사실인데 그건 옛날의 나야.’ 알겠습니까? ‘이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셔. 나도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을 할 수 있어.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어.’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속에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의 예수가 되어

자살하려던 아가씨에게 새로운 기쁨을 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이제는 김 형제를 통해 일하시고 싶고, 박 자매를 통해 일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 일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놓았습니다. 믿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이 시대의 예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가지고 우리 이름으로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있는 호적에는 우리가 사형 당했다고 사망신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달려가면 하나님이 여러분 속에 살아서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실 줄을 확실히 믿습니다.
- 2018. 11. 25.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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