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땅 ‘모압’에서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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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땅 ‘모압’에서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룻기 1장 1절 ~ 7절] 2015. 7. 19. 주일예배 오전 설교 - 571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5.07.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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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 나미비아 장관님과 함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번 2015 월드문화캠프 기간(7. 5~16)에 저는 주로 장관님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캠프 기간 중에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방문하는 일정을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제 승용차 안에서 아프리카 나미비아 장관님과 면담을 했습니다. 
그분은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성령을 받았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죄인이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다 씻으셨기에 아직 마음에 죄가 남아있다면 결국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장관님께 그 말씀을 드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제가 장관님께 이야기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때 자기 생각을 보태서 읽기 때문에 말씀이 그대로 마음에 들어오는 경우가 굉장히 드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아무 생각 없이 텅 빈 마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있기 때문에 그 생각을 다 비우지 않는 상태에서 성경을 읽으면, 자기 마음에 맞는 부분만 받아들이므로 실제 성경의 말씀과 다르게 이해하게 됩니다.”
 
신앙이 실패하는 이유
 
여러분,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안 되는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수없이 읽지만 우리 생각을 가지고 말씀을 읽으면 우리 생각에 맞추어서 성경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기 전이나 후에도 마음의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제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악한 자라는 것을 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내 생각을 따라 한 모든 일들이 실패다’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 마음이 비워지면서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의 말씀이 제 마음에 와 닿았고 그때 제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죄인이라고 하십니까?”
 
제가 장관님께 얘기했습니다. “장관님,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의해 본인의 신앙 상태를 판단하기 때문에 자신은 신앙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신앙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관님, 죄 사함 받아서 성령도 받고 구원도 받았는데 왜 죄인이라고 하십니까? 자신이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라고 생각하시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잘 모르시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수양회에서 우리 교회 형제님이 일반교회를 다니시는 어머니를 모셔 와서 그분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죄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이사야 53장 6절의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는 말씀을 읽어 드린 후 “모친님, 죄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죄 있다니까.” “왜 성경을 안 믿으시죠?” “내가 왜 안 믿어. 당신들이 안 믿지!” 이런 식으로 모친님과 세 번 가량 같은 질문을 했는데 모친님은 여전히 죄인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이사야 53장 6절 말씀을 다시 읽고 질문했습니다. “이 성경에는 모친의 죄가 어떻게 됐다고 이야기합니까?” 그때서야 성경을 보시더니 깜짝 놀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6절을 읽고
 
제가 장관님께 “이사야 53장에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 죄를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고,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셨습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이 담당하셨다면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이 정확합니다” 하며 이사야 53장 6절을 펴서 읽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장관님께서 이 말씀을 함께 읽으시더니 “내가 지금까지 내 생각 으로 성경을 읽어서 성경을 제대로 못 봤습니다. 죄가 없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장관님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하며 저는 장관님께 로마서 성경을 통해 계속해서 우리 죄가 어떻게 씻어졌고 의롭게 되었는지 정확히 설명해 드렸습니다. 

자제하는 법을 가르쳐야
 
저는 우리 집 아이들에게 어릴 때부터 수돗물을 절약하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흔하게 사용하는 것을 ‘물 쓰듯 한다’고 말합니다. “손을 씻을 때는 수돗물을 잠그고 비누칠을 해야 한다. 물은 손 씻을 정도의 세기로만 틀어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저를 보며, 어떤 사람들은 ‘물 한 바가지에 얼마나 한다고 아이들을 그렇게 옹색하게 키워’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절대 옹색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 마음에는 수돗물을 ‘쏴’ 소리 내며 세게 틀어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물 절약은 그런 마음으로부터 조금씩 자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물을 절약하면 자신의 욕구와 생각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갖게 됩니다. 사람들 마음에는 물을 마음껏 쓰고 싶은 욕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욕구들이 있는데, 한 번에 모든 욕구들을 자제하려면 무척 어렵기 때문에 한 가지씩 자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자제하는 법을 배우면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정욕, 미움 그리고 절망 등 여러 가지 우리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이 무엇이라 하는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면 자녀의 욕구를 절제시킬 수 있어야합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대로만 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다스려 주어야 하는데,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종 KTX를 타 보면 기차 내에서 뛰어다니거나 떠드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실례가 되지만 부모들은 하나도 불편해 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아이를 그런 방식으로 양육했기 때문에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아이가 기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떠들면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 하지 않을까? 피해를 주지 않을까?’하며 배려할 수 있어야 하는데, 항상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여기고 자기중심으로 살면 결국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 요즘은 어느 시대보다 신앙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어려서부터 자기주장을 굽힐 줄 모른 채 자란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도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읽어서 하나님의 정확한 뜻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을 압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다”라는 말씀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이 ‘그래도 나는 죄를 지으니까 죄인이야’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성경을 읽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자기 생각에 맞는 것만 받아들여 정확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 딸을 잃겠구나!’ 
 
여러분, 이것은 실제 있었던 이야기인데요, 제가 아는 분 가운데 대사관에 근무하시는 영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딸이 열두 살 때 이혼했습니다. 아내는 이혼 후 먼 나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딸은 매일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아빠가 엄마를 싫어하는 것을 아니까 말을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면서 엄마를 그리워했습니다. 세상에 즐거운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어느덧 스무 살이 된 딸은 어느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슬프고 외롭게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그 딸은 ‘아무리 살아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하며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인 영사님이 출근한 뒤 딸이 자살을 시도했는데, 마침 영사님이 집에 두고 온 서류를 가지러 왔다가 딸을 목격했습니다. 그 순간 영사님의 마음에 절망이 오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내 딸을 잃겠구나!’ 하며 저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목사님, 제 딸을 도와주십시오. 하나뿐인 딸을 잃으면 저도 못 살 것 같습니다.” 
 
이제 슬픔에서 벗어나
 
그날 제가 영사님의 딸을 만나려고 영사님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딸은 제가 온 것을 알고 방문을 잠궜습니다. 영사님이 방문을 두드리며 “제발, 문을 열어 다오”라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30분가량 지나자 방문이 조금 열렸습니다. 저는 영사님의 딸과 두 시간 가량 이야기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나서 물었습니다. “한국 전통음식을 좋아하니? 내 아내는 한국 전통요리를 참 잘해. 내일 아빠랑 우리 집에 올래?” 이튿날 낮에 영사님과 딸이 조그만 선물을 들고 저희 집으로 왔습니다. 제 아내는 가장 좋은 테이블에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 딸은 음식을 먹으며 너무나 행복해 했습니다. “사모님, 이 음식 정말 맛있어요.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 주세요. 저는 요리가 재미있어요.” 이제 그 딸에게 새 마음이 형성되더니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듣기 싫은 소리도 들을 수 있어야 삶에 변화가 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서
 
룻기 1장에는 베들레헴과 모압이라는 두 지방이 나옵니다. 베들레헴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거쳐 들어왔고, 모압은 이방인에게 속한 약속 밖의 땅이었습니다.
1장을 보면,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엘리멜렉과 나오미인데,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며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십 년쯤 시간이 흐르자 말론과 기룐이 죽고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와 그 가족들이 흉년을 피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 약속의 땅을 떠나서 저주의 길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교회 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고 교회 보다 세상을 더 편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모압에서의 10년 동안
 
나오미가 모압으로 간 지 10년 사이에 그 집안에는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그들이 모압으로 갔을 때는 죽는 일만 계속 일어났지만 그들이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는 생명을 얻는 일만 생겼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마1:5~6) 하며 왕이 태어나게 되는 귀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나오미가 모압에서 살면서 엘리멜렉이 죽고 이어서 말론과 기룐이 죽었습니다. 만일 말론이 죽었을 때 나오미가 슬퍼하면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더라면, 절대 기룐마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린 나오미는 곤고하고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제서야 모압에 살면서 전에는 듣지 못했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룻 1:6)라는 말씀이 들렸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베들레헴에서 역사하시는구나. 거기에는 나의 악과 죄를 이길만한 말씀이 있구나. 그 말씀이 있었다면 죽음을 이길 수 있으니까 남편과 아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떠나왔던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만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말씀이 들리고
 
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오면 너무나 평안합니다. 반대로 자기 생각을 세우는 사람들은 교회를 불편하게 여기고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이는데 그 길은 멸망과 저주이고 고통입니다. 나오미는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죽어서 망해 가는데도 사단은 그걸 못 느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은 우리의 믿음이 죽어갈 때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교회을 떠난 지 얼마 안됐을 때는 ‘그래도 교회는 가야지. 기도는 해야지. 성경 읽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나 몇 달 지나면 사단에 속아 전도나 성경 읽는 것이나 기도도 하지 않게 되는데 그런 우리 자신의 모습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 죽어가는 것이고 패망하는 길 임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자신 만만하게 떠났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룻기 1장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날 때 정말 여유 있고 큰소리치며 나왔을텐데 결과는 곤고해졌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둘째 아들 이야기와 같습니다. 둘째 아들도 아버지 집을 떠날 때 큰소리치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따라가 결국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처음에는 큰소리치고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살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할 말이 없어지고 영적으로 타락하여 귀한 생명의 말씀마저 다 팔아먹고 거지가 됩니다. 마치 둘째 아들이 돼지 우리에 가 주려 죽는 위치에 갈때 까지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듯 그런 사람들은 변해가는 자신을 보고 느낄만한 지혜가 없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이 저주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베들레헴을 버리고 모압으로 왔던 슬픈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난 결과는 멸망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난 것이구나. 이제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 돼. 내가 가야할 곳은 베들레헴 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어’ 하며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다시 베들레헴으로
 
이제 나오미의 며느리 가운데 룻은 시어머니를 좇아 베들레헴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문둥이 네 명이 아람진을 향해서 걸어갔을 때, 눈먼 소경이 실로암 못으로 걸어갔을 때,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갔을 때 그리고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을 향해 걸어갔을 때 그런 걸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오미가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듯이, 이제 여러분도 베들레헴으로 발걸음을 옮기시길 바랍니다. 문둥이 네 명이 아람진을 향해 걸어갔을 때, 하나님의 큰 역사와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생각을 따라서 모압으로 갔을 때 저주와 고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지금 모압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분이 계신다면, 머뭇머뭇하지 말고 빨리 돌이켜 하나님이 약속한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약속 안에서 누리는 축복
 
룻기 2장을 보면,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이삭을 줍다가 보아스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따라 룻과 보아스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오벳인데 오벳은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너무나 귀한 걸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모압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 있었고 베들레헴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갔을 때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예수님의 족보를 잇게 되는 귀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룻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약속 안에 있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설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있고, 그곳을 떠났을 때는 저주와 멸망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제 자기 생각을 믿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말씀만을 믿는 신앙을 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모압에 관심을 두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려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베들레헴으로 발길을 옮겨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대로 교회와 말씀에서 오는 은혜를 입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 2015. 7. 19. 주일예배 오전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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