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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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로마서 6장 1절 ~ 11절] 2014. 6. 22. 주일 오전 설교 - 517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4.06.2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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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잠실’에서 가졌던 집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일입니다. 1974년도 경상북도 영천군의 호당리라는 마을에서 한 형제가 ‘잠실’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그해 초가을인데도 잠실이라 모기가 아주 많았고, 식수도 부족하고, 전기도 없어서 발전기를 구입해 경운기에 설치하여 집회 준비를 했습니다. 제 아내가 집회 기간에 먹을 배추를 절여 놨는데, 밤에 소가 와서 그것을 먹었습니다. 소를 무척 겁내던 아내가 문가에서 ‘워이 워이’ 하며 소를 쫓았지만 결국 소가 절인 배추를 모두 먹었습니다. 밤에 대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형제가 “소가 절인 배추 그 짠 것을 먹었으니 목 타서 물마시면 배 터져 죽는다”고 걱정했습니다. 어쨌든 그 집회를 떠올리면 참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잠실을 운영하던 형제가 어려서부터 알았던 정 목사님을 집회에 초청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당시 연세가 일흔 아홉이셨습니다. 평양신학교 제 3회 졸업생이시고 우리나라 나환자 교회에서 시무하셨던 손양원 목사님과 동기 동창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목사가 거듭나지 못했다면
 
이튿날 오전에 말씀을 전한 후,  잠시 방에서 쉬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박 목사님!” 하며 불러서 나가보니 정 목사님이 댁으로 돌아가시려 한다며 형제들이 저를 찾았던 것입니다. 제가 정 목사님 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집회 끝까지 참석하시지 왜 벌써 가십니까?” “나, 가누마!” “목사님, 좀 계시다 가세요. 지금 별일 없으시잖아요.” 정 목사님이 지금까지 참았던 화를 터뜨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박 목사, 내 마음이 힘들어서 위로 받으러 왔는데, 여기가 권투 도장이요? 태권도 도장이요? 사람을 이리치고 저리치고 그래요?” 
그 당시 저는 정 목사님의 막내아들 정도의 한참 어린 나이였지만, 경운기 하나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나지막한 오솔길을 걸어가시는 그 목사님을 쫓아가며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도 죄 사함 받고 거듭나셔야 합니다. 만일 목사가 거듭나지 못해 지옥에 간다면 그는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사람입니다. 지옥에서도 교인들이 ‘목사님, 이쪽에 앉으세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내가 이 가짜 목사 때문에 지옥 왔다!’고 항의할 텐데요?” 그분은 더 이상 멈춰 서시더니 가방에서 성경을 꺼내시고 풀밭 위에 가방을 놓은 후 “여기 좀 앉으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 목사님의 구원 간증
 
제가 차마 그 가방 위에 앉을 수 없었는데 풀밭에 앉아 성경책을 꺼내어 로마서 1장을 펴고 한 절씩 읽으며 로마서 강해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4장까지 조용히 말씀을 들으시던 정 목사님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셨습니다. 6장으로 접어들어 1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절,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는 말씀을 읽는데, 정 목사님께서 갑자기 “박 목사, 잠깐! 됐어” 하시며 그분의 얼굴이 더욱 밝아지셨습니다. 정 목사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일어서시더니 집회 장소로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후 성경공부 시간에 지난 일을 간증하셨습니다. “16년 전, 저는 목사로서 지어서는 안 될 죄를 지었습니다.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목사를 찾는데, 목사가 죄를 지으면 누구 앞에 서겠습니까? 그 동안 혼자 늘 부르던 찬송이 있습니다. ‘길도 없이 거친 넓은 들에서 갈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 하도다♪’ 이제 친구들도 한 명씩 세상을 떠나고 저도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는데, 죽음 앞에 서보면 늘 막막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잔디밭에서 로마서 6장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라는 말씀을 듣는데 ‘그래! 내가 죄에 대해 죽었지! 죄에 대해 죽은 내가 어떻게 죄를 지을 수 있어? 내가 죄에 대해 죽었으면 죄에서 벗어난 것이고, 죽은 사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잖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죄에 끌려다니는 인생
 
그 후, 정 목사님은 당시 사시던 금호라는 곳에서 대구 파동의 우리 교회 옆으로 이사를 오셨습니다. 새벽마다 “하나님, 이 늙은 인간을 그냥 데려가시지 않고 이런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하며 기도하시던 그분이 몇 년 후 아쉽게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지금도 로마서를 읽을 때면 그 목사님이 생각나곤 합니다. 
여러분, 오늘 이 땅에도 정 목사님처럼 죄에 매여 고통하고 육신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목에 매인 줄도 없이 불쌍하게 음란이나 미움, 정욕 등 죄에 끌려 다니면서 ‘내가 제대로 살아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애써도 잘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중국 공청단 초청 마인드 특강
 
지난 2009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의 초청을 받아 북경에서 이틀 동안 마인드 강연을 했습니다. 오후에 학부모와 학생들, 공청단 단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대화 시간을 가졌는데 한 학부모가 제게 이런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 제 아들이 학교 선생님을 때렸습니다. 어떻게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때립니까? 그게 인간입니까?” 그 어머니는 하도 답답하신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들이 선생님을 때린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제 아들이 때린 걸 본 학생들도 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다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어머님, 제 이야기를 잘 들어보세요. 어떤 학생이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만 한다면 자기가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겁니다. 반대로 어느 대학생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아침에 학교가려고 집을 나왔지만 학교를 가는 게 아니라 PC방으로 갑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을 했는데, 그러다가 학교를 6개월 동안 결석했습니다. ‘오늘은 컴퓨터 게임하면 안 돼. 이러면 앞으로 학교를 다닐 수 없어? 하면서도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버스를 탔지만 두 정거장도 못가고 내려서 PC방으로 갑니다. 그리고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하면서 게임을 합니다. 어머니, 그 학생이 게임을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학생의 마음을 끌고 가는 겁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강한 힘이 인간을 이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병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마취제를 주사하면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마취되어 모든 것을 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인간이 선하게 살고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데 종종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하며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면 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우리가 죄 짓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은 몸’이라는 뜻은 ‘우리가 착하게 살고,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며 각오나 결심을 해서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에 매일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의문이 남을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뭐야?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을 수 있을까? 죄에 대해서 죽으면 정말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하며 궁금해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서로 같아질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호흡하며 먹고, 잠자는 욕구가 있는데 그 육체의 욕구에 이끌리게 마련입니다. 만약 우리 육체가 죽으면 먹거나 자고 싶은 욕구도 사라집니다. 육체는 물질세계이므로 마음의 세계와 전혀 다릅니다. 보통 우리가 결혼하면 ‘부부가 한 몸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부부일찌라도 엄연히 서로 다른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아내의 몸에 못을 찌르면 남편이 “아야!” 하며 고통을 함께 느끼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의술이 발달해서 신장 이식술을 많이 합니다. 육체는 나의 장기를 떼어 다른 사람의 몸에 이식하면 내 장기가 그의 몸과 한 몸이 되지만, 마음의 세계는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같아질 때 하나 되는 겁니다. 로마서 6장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 마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달랐던 베드로
 
어느 날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답했습니다. “다 버릴찌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0)라고 베드로가 다시 말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어떤 면으로 보면, 굉장히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야, 너 같은 제자가 없구나. 네가 끝까지 나를 부인하지 말아줘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엄밀히 분석하면 베드로와 예수님의 마음이 서로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믿었다가, ‘내가 예수님을 부인했구나. 나 자신을 믿는 것이 정말 무익하고 악하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보면,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달랐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창 17: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웃으며 생각했습니다.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그리고 “나는 아들을 못 낳아요.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니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달랐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보면,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8~) 하며 아브라함의 마음이 바뀌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도 
 
사라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신 말씀을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듣고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처음에는 자신이 늙어 아기를 낳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그가 ‘하나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시면 나도 낳을 수 있겠네’ 하며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육체가 하나 되는 것은 장기 이식수술을 하면 되지만 마음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같아질 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될 때
 
여러분, 오늘 아침에는 아브라함이나 베드로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로 연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죄를 짓지 않은 분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롬 3:23)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나는 죄를 지었어. 내 속에 음란한 마음이 일어나. 내가 이런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자꾸 짓게 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 보면, 우리의 생각과 다른 말씀을 접하게 됩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7~1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이렇게 말씀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믿은 아브라함
 
여러분, 창세기의 아브라함은 자신이 너무 늙었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져서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야. 네가 아들을 낳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번, 두 번 이야기하시면서 ‘내가 늙었지만 하나님이 낳는다고 말씀하시면 아들을 낳을 수 있지. 감사합니다’ 하며 아브라함이 자기 생각을 믿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믿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난 죄인이 맞아. 그러나 하나님이 내 죄를 씻었다면 나는 의인이야’ 하며 말씀을 믿는다면 우리가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됩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여러분,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내가 네 죄를 기억지 않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어”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 생각에는 우리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면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이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를 보면,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사 55:6~7) 하시며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더럽고 악한 내 생각으로 예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내 생각을 따라 선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
 
여러분, 언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우리는 한 번도 죄에 대하여 죽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으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곧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영적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과 하나야! 나는 죄에 대해 죽었어! 이제 나는 죄의 종이 될 수 없어!”라고 생각할 때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의 종 된 삶을 살다가 “죄에 대해 죽은 것을 정확히 깨달으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게 되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죄를 이겨주셔서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밝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가 주십니다. 
 
- 2014. 6. 22. 주일 오전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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