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6·25, 그 혈전의 ‘다부동 전투’를 아십니까?
상태바
아! 6·25, 그 혈전의 ‘다부동 전투’를 아십니까?
특집 호국보훈의 달 특집-① 다부동 전적기념관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호전적인 北韓의 실상 냉정히 파악해야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2.06.08 17: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부동 전투의 의의

다부동·왜관 지역은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하였고,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과 25번 도로가 합쳐지며 왜관에 이르는 지방도로(908번 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마을을 중심으로 좌측(북서쪽)에는 유학산이 북방을 향하여 있고, 그 우측에는 해발 902m의 가산이 있어 방어에 유리하다. 지형상 이 방어선이 돌파되면 10km 남쪽의 도덕산 일대까지 철수가 불가피하여 지상 포화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6·25 당시 다부동 일대는 대구 방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투의 요충지였다.
국군 제1사단은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여 다부동 일대에 설정된 주 저항선에서 대구를 목표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을 격멸함으로써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처한 나라의 현실 앞에 수세에 놓였던 전황을 극복했던 것이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1950년 6·25전쟁 당시 나라의 운명을 바꾸고 인천 상륙작전을 통해 북진의 계기를 맞게 했던 ‘다부동 전투’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찾아가 보았다.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는 다양한 전시

초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강하게 비추던 지난 6월 5일(화), ‘다부동 전적기념관’(경상북도 칠곡군 다부리 소재) 야외 전시장에 마련된 구국용사 충혼비(2,165명의 전사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앞에는 그들을 추모하면서 남긴 추모객들의 수많은 조화가 젊은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다.
학생과 군인, 일반인 등 연간 60여만 명이 찾아오는 ‘다부동 전적기념관’은 6·25전쟁 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1981년 11월 30일 개관하여 후세들에게 동족간의 참담함을 일깨워 다시는 그와 같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하기 위한 전쟁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야외 전시관에는 57mm 무반동총과 81mm 박격포 등 전쟁에 사용되었던 각종 화기와 노획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실내 전시관에는 6·25전쟁 발발 당시 모습과 한국 전쟁의 경과를 보여주는 지도, 전시 주거생활 등 전쟁의 참상과 긴박함을 느끼게 해주는 각종 자료들이 비치되어 있어  관람객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오나영(의성단밀초 4) 학생은 “이곳을 둘러보며 북한이 먼저 우리나라를 침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군인 아저씨들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말했다. 또한 황종우(의성단밀초) 교사는 “6·25를 모르는 아이들이 이곳을 견학하면서 자유에 대한 소중함과 북한과 마주한 우리의 현실을 잘 알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쟁 재발 방지 위해 철저한 안보의식 확립 필요

한편,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다부동구국용사회 주관으로 경북지방경찰청장 및 지역기관장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현충일 참배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날 다부동 전투시 생존자 1,400여 명 중 8명의 참전용사들이 함께해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당시 국군 제1사단으로 다부동 전투에 참가했던 여준구(82세, 다부동구국용사회) 대구시 지부장은 “다부동에서 55일 동안 전쟁을 했다는 것은 세계 전쟁사에서도 없는 일이었다. 다시는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북한에 대한 철저한 안보의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적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는 신현종 과장은 “이곳을 찾는 청소년들이 왜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적 교훈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현혜 선임기자 hyunhye@igoodnews.or.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