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의롭게 되는 두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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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의롭게 되는 두 가지 방법
[출애굽기 25장 10절 ~ 22절] ① 율법을 통해 ② 믿음으로 - 352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1.03.25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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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법궤 이야기 

오늘은 성막의 이야기 중 법궤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성막에 관한 이야기를 읽다 보면 법궤·제단·떡상·향단·물두멍이 나오고 그 장이 몇 규빗 광이 몇 규빗 고가 몇 규빗인지 기록되어 있는데, 굉장히 복잡하고 골치 아프게 여겨져 ‘도대체 이런 내용을 왜 기록해 놓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들이 우리 삶에 큰 힘과 소망을 주고 우리를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을 보면 너무나 신기합니다.
저는 자주 저를 돌아보는데, 그때마다 목사로서 하나님 앞에 정말 부족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오래전에는 ‘내가 목사가 되어 수십 년 동안을 말씀과 복음을 전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여전히 내 속에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이 올라오는구나. 나는 왜 이럴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복음 전도자들이 없어서 그렇지만, 지금은 훌륭한 전도자들이 많으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종으로 쓰실까? 나를 버리실는지 몰라’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드니까 제 마음이 너무나 어두워졌습니다.

나를 버리시지 않는 이유

봄에 대전도집회를 할 때 강사가 ‘박옥수 목사’라고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강대상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께 정말 감사하다. 이번 대전도집회에 나를 강사로 세워주시는구나.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이번 대전도집회 마치면 나를 버리실 거야’ 하는 마음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여름수양회가 되었는데, 그때도 여전히 제가 강사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번 여름수양회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단에 세우시는구나’ 했습니다. 그 후 가을 대전도집회, 겨울수양회, 또 이듬해 봄 대전도집회 때도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써 주셔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한번은 전도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제가 “이번 대전도집회에 내가 강사가 되어 너무나 감사하다”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박 목사님이 강사 하시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게 어떻게 당연해. 내가 강사로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돼!”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는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저 자신을 보면 이 귀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목사로 설 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님이 제 모습을 전혀 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저를 구원하신 그 은혜로 제가 설 수 있다는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죄를 맡기나

제가 외국이나 지방에서 집회를 하지 않을 때는 아름다운 우면산이 내다보이는 제 집무실로 많은 분이 신앙상담을 하러 찾아옵니다. 어제는 우리 교회를 20여 년 동안 핍박하던 자매님의 남편이 찾아왔습니다. 상담을 하면서 그분에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는 구절을 통해 제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예전에 장로교회에 다닐 때 목사님의 말씀대로 제 죄를 예수님께 맡기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죄를 고백했지만, 고백하지 않고 빠진 죄가 있는 것 같아서 노트에 죄를 적어가면서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부족한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죄를 맡기는 게 너무 어려웠습니다.

주님이 죄를 담당하셨으니까

그러나 이사야 53장 6절 말씀은 하나님이 저에게 “옥수야, 너는 가만히 있어. 네 죄를 예수님께로 넘기는 그 일을 내가 할게. 네가 하면 죄를 빠뜨릴지도 몰라. 내가 해야 완벽해”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이 제 죄를 예수님께 담당하게 하셨다면 제 죄가 완벽하게 옮겨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분이 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라면서 “저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전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한 구절만 알면 됩니다. 그 한 구절이 하나님의 약속이니까요. 제가 오늘 단에 서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제가 남보다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의롭고 거룩하고 완벽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두 음성을 분별해야

신앙은 아주 쉽지만, 사단이 우리 마음을 교란해서 속입니다. 저는 군 시절 통신부대에서 근무했는데, 그 당시는 무선장비가 안 좋으니까 무전기로 교신을 했습니다. 통신병이 모스 부호를 보내면서 무전을 치면 적이 끼어들어 우리 무선을 받습니다. 적이 받다가 우리 암호가 안 풀리면 방해 전파를 쏘는데, 우리와 같은 주파수를 놓고 똑같은 숫자로 무전을 칩니다.
그러면 전파 상태가 나쁠 때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작게 들렸다 하면서 잡음이 들리는 페이딩(fading) 현상이 일어나니까, 신병(新兵)들은 양쪽에서 들리는 소리를 섞어 신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임은 아무리 페이딩 현상이 일어나도 아군의 신호를 정확하게 받아냅니다.
신앙생활은 무전통신병과 정말 비슷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마음만 받으면 기쁨과 소망, 믿음이 생기고 모든 문제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해결됩니다. 그러나 사단이 주는 생각을 받으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정확하게 하면 사단으로부터 온 생각과 주님이 주신 말씀이 정확하게 구분됩니다. 여러분 삶에서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모든 것을 버리고 성경으로 말미암은 것을 하나하나 정립하면 ‘이것은 사단의 음성이야. 이 음성을 들으면 불신이 생기니까 내가 망하게 돼’ 하며 분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말씀 편으로 옮겨지면

우리 교회 이 장로님이 암으로 입원하셔서 제가 몇 차례 심방을 했습니다. 이 장로님이 투병하면서 ‘아이고, 너무 고통스럽다. 암이 벌써 장과 척추까지 전이되었네’ 하며 그 마음이 병에 빠져 있는 걸 봅니다. 그러면 저는 이 장로님의 마음을 거기서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환자의 마음이 병에 빠져 있다가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병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낫는 경우를 저는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아팠을 때도 그랬고, 죽을 병에서 낫는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 마음이 하늘나라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대화하게 만들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는 말씀처럼 암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는 이 장로님과 상담하면서 믿음을 막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장로님 자신의 마음이었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경험으로 볼 때 이 병이 안 낫겠다는 마음이 드니까 ‘죽는 게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로님 판단이 옳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판단이 옳습니까? 장로님 같으면 38년 된 병자처럼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르밧 과부처럼 떡을 엘리야에게 먼저 가져다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38년 된 병자처럼 걸어갈 수 있고 사르밧 과부처럼 떡을 엘리야에게 먼저 줄 수 있을 겁니다. 나 자신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義)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창 12: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와 그 후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을 주실 때를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실 때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네가 거짓말하지 않으면 내가 너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게”라고 하셨다면 아브라함이 그걸 지킬 수 없어 복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복을 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5~6)  연대를 계산해 보니까 이때가 BC 1921년이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죄를 지었습니까? 안 지었습니까? 네,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갈 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착한 일을 하거나 죄를 용서받아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예, 하나님. 내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될 줄 믿습니다” 하니까 의롭게 된 겁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

율법을 지켜 얻는 의(義)

그로부터 430년 후인 BC 1491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다가 모세를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서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있는 40일 동안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늘에 있는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돌 판에 십계명을 써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네 우양과 소생이 복을 받고…”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행치 않으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라고 하셨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율법을 어기지 않고 지키다가 한 번이라도 어기면, 그건 율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절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라도 어기면

여러분,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면 십계명을 포함한 613가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라도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무리 많이 연보를 한다고 해도 그 연보 자체가 의를 얻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연보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귀한 피를 흘려서 생명을 버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연보는 내 죄를 사하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복음을 위해서 내가 먹고 싶은 것 안 먹고, 쓰고 싶은 것 안 쓰고, 사고 싶은 것 안 사고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는

십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성기 목사는 전도자가 되기 전에 20년 동안 서울시청에 근무했었는데, 선교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퇴직금을 가지고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여기서 딱 백만 원만 떼어 뭔가를 사서 정리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만 원 떼서 정리한다고 뭐 특별한 일 있겠습니까? 어렵더라도 한 푼도 안 떼고 주님 앞에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저는 그 돈이 한 사람의 젊음을 다 바친 것이라는 마음이 들어 쉽게 쓰지 못하고 2년 동안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천 대덕수양관을 살 때 그 돈을 보탰는데, 저는 대덕수양관에 갈 때마다 ‘이 땅은 이성기 목사가 샀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 이 목사는 세상을 떠나서 대덕산에 묻혀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마음을 나누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내 생명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을 일으키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 몸을 드려야겠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복음을 전해야겠다. 내가 하나님께 큰 사랑을 받았는데, 이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구약시대에는 소나 양을 잡아 한 생명이 피를 흘리고 희생을 당하는 것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처럼 내가 먹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을 희생하고 그 물질을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진정한 제사입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른 무엇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길 원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저는 율법을 다 지켰으니까 천국 보내주십시오’ 하며 떳떳하게 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전 추하고 더럽게 살았습니다. 교만한 마음도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추한 저의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으신 걸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을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위대하게 생각하십니다.
저는 수많은 죄를 저질렀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죄가 씻어진 걸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귀히 보시고 의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덮으라”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출 25:10~11) 속죄소에 있는 법궤는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그것을 정금으로 쌉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21절에서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두 돌판을 법궤 안에 넣으라는 겁니다.
17절에는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라며 법궤의 뚜껑인 속죄소의 크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받은 십계명 두 돌판을 보며 행하라는 게 아니라, 그걸 궤 안에 집어넣고 뚜껑으로 덮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두 돌판을 주셨지만, 그것을 지켜서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걸 덮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그 방법으로 의롭게 된 걸 믿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됐습니까? 율법을 지켜 의로워졌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내 죄를 씼었다는 걸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저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더러운 죄인인데, 하나님이 저를 거룩하게 했습니다’ 하며 그 사실이 감사해서 헌금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것은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감격해 우리의 몸과 마음, 시간을 주님 앞에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원래 잠자는 걸 좋아하지만,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잠을 줄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를 위해서 쓰는 모든 것을 줄이고 하나님을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도 말할 수 없이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저를 의롭게 하시고 정결케 하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성령이 제 마음속에 거하기에 손톱만큼도 불편함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 사실이 너무나 감사해서, 제 생명을 다 바쳐도 부족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롭게 되는  두 가지 방법을 주셨습니다. BC 1921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을 주셨고, BC 1491년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실 때 그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게 되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아브라함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계명 두 돌판을 궤 안에 넣어 천사의 날개로 된 뚜껑을 덮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가 임박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육신을 섬겨오던 그 삶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내 육체를 만족케 하는 삶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바뀌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해 기쁨과 영광을 얻으시게 되길 바랍니다.

- 2011. 3. 20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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