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가 이끌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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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가 이끌리면
[창세기 7장 13절 ~ 24절] 7월 11일 주일 낮 말씀 - 318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0.07.18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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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만난 두 친구

1965년 군에 입대해서 1968년 6월 제대할 때까지 3년간 저는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군대 가기 전 경남 거창읍 장팔리의 조그마한 교회 전도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게 행복하여 군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날 군대에 안 보내실 수도 있지만, 군대에 보내신다는 건 분명히 더 좋은 복음의 터전이 있을 거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원주 통신훈련소에 311기 28번으로 배치 받은 후 29번 송순종과 30번 김창원은 같은 조라서 자주 얘기를 나누다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두 친구가 구원받으면서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려면 후배들을 집합시키고 중대에 보고하는 등 과정이 굉장히 복잡한데, 어느 날 친구 송순종이 “옥수야, 너는 하나님의 종이니까 말씀이나 준비해라. 이건 내가 다 맡아서 할게” 하고는 내무반에 가서 후배들을 인솔하여 예배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기도의 힘으로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통신훈련소 소장님이 오셔서 제가 깜짝 놀라 주춤하니까, 소장님이 “종교를 계속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소장님 앞에서 떨려 대충 설교를 마치고 나니까, 소장님이 단에 올라 서서 6?25사변 때 보병 중대장으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했던 일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전투 전날 순찰을 돌다가 한 병사가 꿇어 엎드려 웅얼웅얼하고 있었습니다. “너 뭐하냐?” “예, 기도하고 있습니다.” “너, 중대장 위해 기도했냐?” “예. 지금부터 하겠습니다.” 그분이 그날 밤 중대를 순찰하면서 “너희가 무엇을 믿든지 기도를 하라”고 명령했답니다. 그때 전투에서 그 중대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고 가장 용감히 싸웠다고 얘기하셨습니다. 이때 소장님은 ‘종교의 힘이 이렇게 크구나’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드셨다고 합니다.
그 후 우리 훈련소 소장님으로 발령받아 와서 보니 예배당도 없고 군목도 없는 것을 보시고 안타까웠다고 하시면서 저를 보고 “우리 예배당 짓자!”고 하셨습니다.
예배당을 지은 후 얼마 있다가 다른 부대로 이동하시면서 행정장교에게 “행정장교! 나는 다른 부대로 가지만 여기 박옥수 상병은 항상 종교 일 하도록 네가 책임을 지고 그 일을 맡겨놔!”라고 부탁하셨습니다.
3년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할 때는 ‘이런 하나님과 함께 산다면, 내가 어디를 가든지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어 소망이 넘치고 이런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는 듯했습니다.

제대까지 도우신 하나님

똑같은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를 보더라도 그것을 느끼는 사람의 생각이 다르듯이,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과 후의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다릅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오면 ‘내가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결심이나 어떤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거룩함과 소망을 주셔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주로 예배당에서 생활하던 저는 평소 내무반에 갈 일이 없었는데, 제대 무렵엔 관물을 반납하려고 내무반에 가보니까 제 관물 중 에 총, 탄띠, 철모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굉장히 막막해서 저녁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가 제대 한 달 앞둔 어느 날 군목이 우리 부대로 오셨는데, 충청도 분인 그분이 물으셨습니다. “박 병장, 관물 반납했시유?”  “예, 목사님. 다 되었습니다.” 그 분이 주머니에서 돈을 끄집어내더니 그때 돈 2,300원을 제 손에 들려주셨습니다. “박 병장, 이거 관물 반납하는 데 쓰시오. 받아요.”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겨서 그 돈으로 관물반납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두 가지 신앙의 길

신앙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율법 지켜야지’ 하며 자신의 ‘의지’로 하는 신앙과 ‘마음’으로 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으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마음을 끌어가는데, 그 마음은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오늘 아침 읽은 노아의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는 방주에 들어간 것과 방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들로 정확히 두 부류로 나눠집니다. 방주는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동물이지만 방주에 들어간 동물이 있고 안 들어간 동물이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세계가 그들 마음 속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여러분, 신앙은 ‘마음’에서 시작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 불신, 미움, 욕망 등은 사단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신하도록 우리 마음에 넣어 준 것입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마음에 이끌리지 못하게 해서 악한 영에 이끌림을 받아 육체의 쾌락에 만족하고 죄를 지으며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사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내가 왜 이렇게 악하지? 내 마음에 평안이 없구나’ 하는 마음을 자꾸 느끼고 양심의 가책을 한두 번씩 받다 보면 ‘자기’가 싫어지고 ‘자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잘못이라는 걸 깨닫고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어오면서, 내 마음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의 세계

음악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음악을 느끼듯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은 천 가지 만 가지 불평스럽고 원망스러운 것이 있어도 행복한 조건을 찾아서 행복을 느낍니다.
아프리카 사파리에는 사자나 얼룩말이 있습니다. 사자가 젊을 때는 용맹스럽게 사자 노릇을 하지만, 늙으면 사냥도 잘 못하니까 무리에서 쫓겨나 많이 굶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굶어도 사자는 풀을 뜯어 먹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얼룩말은 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절대로 고기 안 먹고 풀을 먹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어떤 형편에 처할지라도 소망을 발견하면서 기쁨을 느낄 줄 알고 평안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의 맛을 압니다.

어떤 마음의 영역 안에 있는가?

어느 날 얼룩말 암수 한 쌍이  자기도 모르게 방주 안으로 들어갑니다. 아마도 얼룩말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뭔지 몰라도 자꾸 저쪽으로 가고 싶어.” ?야, 거기 가면 안 돼. 어제 거기 사자가 들어가는 것 봤어. 너 가면 잡혀 죽을지도 몰라. 거긴 위험해. 풀도 없어.” “그래? 그런데 내 마음이 자꾸 끌리는데. 난 저기 들어가고 싶어.”
다른 얼룩말은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게 두렵지만,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면 그 얼룩말은 들어가게 됩니다. 비가 와서 홍수를 면하려면 방주에 들어가야 한다고 노아가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비웃으면서 “비가 오긴 뭐가 와. 당신 같은 광신자나 거기 들어가. 우린 들어가지 않아”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노아가 선해서 방주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악해서 방주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의 영역 가운데 있느냐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IYF 굿뉴스코 단원인 정대철 학생은 어느 날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부도 난 후 파산하자 방탕한 삶을 살았고, 어머니는 삶이 너무나 어려워 고생하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대철이는 삶이 고통스러워 굿뉴스코 봉사단에 지원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라는 곳에서 최요한 학생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한이가 전갈에 쏘였는데도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몸이 마비되면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병원마다 이미 늦었다고 안 받아 주어서 몇몇 병원을 전전하다가, 겨우 한 병원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요한이의 몸을 주물러 보고 수지침을 놓았지만 맥이 멎으니까 의사가 포기하였습니다.
라이베리아 선교사가 제게 전화를 했을 때 마침 요한이가 정신이 들었습니다. “요한아, 내 말 들려?” “예, 목사님.” “너는 지금 전갈에 쏘여 죽어가고 있어. 이사야 40장에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했어. 전갈의 독을 이기려면 새 힘이 필요해. 하나님을 바라봐야 돼. 그러면 네가 새 힘을 얻을 거야.” 요한이도 자기가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요한이의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심장이 두 번이나 멎었지만, 심폐소생술을 시도하자 요한이가 불과 몇 시간 만에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자신’을 발견하면

그 일을 통해 대철이는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대철이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불평만 했는데, 예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음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니까 그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매일 기뻐하면서 남을 도와주고 외딴 동네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며 행복하게 살던 대철이가 이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활동한 IYF 굿뉴스코 단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예전의 형편없던 그들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각오로 선을 행하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선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다릅니다. 아무리 각오해도 선을 행할 수 없던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자신’을 발견하면 자기 마음으로 살기 싫어지고 예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면 똑같은 사물을 봐도 예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가 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없는 마음으로 보면 내게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 고통스러워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해야 하는데,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나를 도우신다고 생각하면 아무 문제가 안 되며 축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방주로 들어가라!

우리가 착해지고 주님을 잘 섬기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 거룩한 영이 들어오면 우리가 거룩해지고, 우리 마음 속에 기쁨의 영이 들어와야 기뻐하게 되지만 슬픔의 영이 들어오면 슬퍼하게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노아의 여덟 식구 외에는 단 한 명도 방주에 들어 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다른 마음의 세계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세상에 방주를 만들어 복되게 살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춰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물로 세상을 심판할 테니까 너는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노아가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짐승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면, ‘짐승들이 저렇게 한 적이 없었는데 정말 하나님 말씀처럼 홍수가 오는가 보다’ 하며 방주로 들어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방주에 들어갈 길을 열어 주셨는데도, 사단에게 마음이 사로잡힌 사람은 마지막까지 비웃으며 방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악한 영에 이끌리면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그냥 사는 것 같지만, 어떤 큰 힘에 이끌려서 다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들은 거룩한 예수님의 영이 들어와서 기쁘고 행복합니다. 반대로 악한 영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은 아무리 진실하게 주님을 믿는다 해도 불평과 원망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거나 진실하려고 애쓰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진 마음은 너무 추하고 더러워서 이 마음이 내 속에 살아서 일하면 나는 계속 추해지고 더러워지고 악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웁니까? 그들은 어떤 강한 힘에 이끌려 죄를 짓고 악에 빠져 결국 그들의 가정이 파탄납니다.
우리가 그런 악한 영에게 이끌리면 바르게 살려고 해도 절대로 바르게 살 수 없고, 깨끗하게 살려고 아무리 각오해도 깨끗해지지 않고 점점 죄악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진실하신 예수님의 영이 우리 마음을 이끌면 ‘내가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술 마시지 말아야지’라고 안 해도, 자연히 그런 것에서 멀어지고 예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내 안에 있는 두 마음

이번에 IYF 한국 월드캠프를 부산에서 진행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마인드 교육 시간을 통해 학생들에게 성경 속에 있는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복음을 전하자 그들이 마음을 열고 달게 들었습니다. 
저는 자주자주 ‘이건 내 마음이 아니야. 나의 본래 마음을 보면 더럽고 야비하고 추한데, 내 속에 다른 또 하나의 마음이 거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시면서 제 마음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대구에서 사역할 때 조폐공사에서 성경공부를 마치고 밤늦게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 숲속 길을 걸어 버스 종점까지 갔다 집에 돌아오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아내가 이 기쁨을 알까?’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1988년 수원교도소에서 1일 집회를 하고 수많은 죄수들이 구원받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1986년 부산 무궁화관 홀 집회에서 수백 명이 손을 들고 죄 사함 받으려고 일어나던 때는 제 가슴이 터지도록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때의 행복한 마음들이 제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 노부부의 기도로

루마니아의 구원받은 한 노부부가 나이가 많아지자 어느 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희가 한평생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인데 우리 부부가 복음을 전해 유대인 한 사람이 구원받게 해주십시오. 우리 마을에는 유대인이 한 명도 없는데, 유대인 한 사람을 저희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루마니아에는 1천 300개의 마을이 있고 노부부가 사는 마을은 산꼭대기에 있었는데도, 무언지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리처드 범브란트 부부를 그 마을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리처드 범브란트가 혹시 하룻밤 잘 수 있느냐고 문을 두드리자, 노부부가 정성스럽게 맞아주었습니다. 노부부는 리처드 범브란트 부부와 이야기하다가 그들이 유대인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날 노부부는 복음을 전해 리처드 범브란트 부부가 구원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이 범브란트 부부가 루마니아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루마니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공산당은 기독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예수님보다 스탈린이 좀 더 낫다”며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리처드 범브란트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전국으로 방송되는 중계석에서 말한 뒤부터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당시 루마니아에 수많은 목사가 있었지만 리처드 범브란트가 가진 마음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고문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으면서 예수님을 간증했습니다. 그는 어려움, 핍박, 슬픔이 와도 강한 하나님의 영에 이끌림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방주 안이냐, 밖이냐?

창세기 7장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방주 밖에 있는 사람을 냉정하게 나누었습니다. 부부와 형제자매라도 방주 밖에 있으면 멸망이지만, 방주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까? 누가 방주 밖에 있었습니까?  어느 날 하나님이 그들에게 마음을 주시면 뭔지 모르지만 어떤 강한 힘이 그들을 이 방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아 사단으로부터 오는 악하고 더럽고 추한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에는 소망과 거룩함, 평안과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없이는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안 되지만,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이끄시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되어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세계로 인도 되는 주의 은혜가 여러분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될 줄 믿습니다.

- 7월 11일 주일 낮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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