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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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신명기 22장 1절 ~ 7절] 복음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 2010.5.9 주일 낮 설교 - 309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0.05.15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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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는 베이비 푸드

성경을 보면 신명기는 율법서이기 때문에 율법이야기만 있는 것 같지만,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느끼게 되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어떤 형제가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시다. 자기 재산을 다 바치고 있는 힘을 다 바쳐 사업을 했지만 사업이 점차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삼일 후에 어음을 막아야 하는데 아직 수억원이 모자란다면 속이 타들어 갑니다. 은행지점장에게 어음 결제일을 이틀만 연기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동안 어음을 막지 못하면 부도처리 된다고 하니 마음이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런 일을 당케 하셨다면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하고 기다리게 되면, 나중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은혜롭게 바뀔겁니다.
어린 아이들이 먹는 음식은 맵지도 않고 쓰지도 않고 밍밍해서 아무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먹는 음식은 때때로 신맛, 매운맛 등이 조화를 이루어서 진장한 맛을 만듭니다. 그처럼, 인생도 무미건조하게 조용히 사는 것보다 때로는 쓰리고 아픈 일을 겪지만 그것이 오히려 진정한 인생의 맛을 느끼게 합니다.

첫 사역지 거창을 떠나

저는 첫 사역지라 할 수 있는 경남 거창의 장팔리교회에서 1년 동안 사역을 했는데, 그동안 성도들이 늘어나니까 그 교회를 처음 개척한 선교사님이 저를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제가 입대했을 때는 사람들을 보내 면회를 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제대를 앞두고 휴가 나와서 그분에게 들렀더니 제가 제대하면 결혼을 해야 하지 않느냐, 차와 집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모든 것을 제공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에 많은 기대를 했지만, 결국 그 선교사님과 신앙이 맞지 않아 모든 기대를 버리고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그 후 갈 곳이 없어서 고향에 돌아가 농사짓는 아버지를 도우면서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복음을 전하러 다니려고 했지만, 농사일이 서투니까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나면 저녁에는 지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자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집에 있으면서 복음은 못 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집을 나와 김천으로 갔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을 느끼며

1969년 4월부터 1973년 1월까지 김천에 있었는데, 처음에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집도 없고 형제자매들도 없어서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는 그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에 집을 얻게 하시고 양식이나 여비가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걸 보면서, 하나님이 제 삶을 이끄신다는 사실을 순간순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집 주인의 과실로 우리 집이 은행에 넘어갔지만, 그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내게 이런 하나님이 계시다면 돈이 없으면 어떻고 어려우면 어떻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물질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요. 돈이 어느 정도 자신에게 들어와야 하고, 또  필요할 때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체제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돈에 대해서 매이지 않도록 저를 이끌어 가시면서 돈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에서 돈을 벌지만 하나님이 그 돈을 날리게 하시면 다 날릴 수 있고, 직장  생활 전혀 안 해도 필요하면 하나님이 얼마든지 돈을 주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돈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순까지만 살 마음으로

한번은 제가 장폐색증으로 죽을 뻔했는데, ‘내가 이제 죽는구나’ 하고 죽음 앞에 서 보니, 제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손을 잡고 죽음의 강을 건너시면 내가 고통스러운 세상과 이별하여 황금보석 찬란한 집에 서고 생명나무 강가를 주님과 거닐겠구나’ 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부터 정말 자유로워졌습니다.
저는 쉰 살이 됐을 때 예순까지만 산다는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순 살이 되었을 때 제 마음이 정말 편했습니다. 그런데 저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보면 마시면서 설탕 한 숟가락을 넣을까 말까 하며 벌벌 떨고, 건강수치가 어떻다고 하며 짜게 먹으면 안 된다는 등 많은 것에 매여 있었습니다.
저는 예순이 되는 순간  나는 살만큼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돼’ 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먹는 것, 자는 것 등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도 복음 아닌, 세상것에 많이 매여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도 돈은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정이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잡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저를 정말 편안하고 자유롭도록 지켜주시는 것을 자주 봅니다.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저는 2004년에 서울 강남으로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그 당시 관할구청에서 우리 교회 예배당의 건축허가를 취소해서 이곳이 무허가 건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청이 건물을 철거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철거중지 소송을 냈지만 1심 재판에서 졌습니다. 그 당시 강남교회의 담임목사가 너무나 고생하는 걸 더 이상 볼 수 없어 제가 그 문제에 부딪혀 보려고 서울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서울에 온 후 새벽에 일어나서 예배당을 둘러보며 이 건물이 뜯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암담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지 않으면 저는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2심 재판에서 저는 우리 교회의 박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그때 박 변호사는 개업한지 얼마 안 되는, 소위 병아리 변호사였기 때문에 주위에서 ‘왜 판사를 잘 아는 노련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느냐’며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변호사는 자기에게 1억원만 주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등 자기에게 일을 맡겨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믿을 만한 사람은 우리 교회 형제인 박 변호사밖에 없었습니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다”

박 변호사가 구청이 건축허가를 취소하면서 밟아야 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부분을 밝혀내면서, 건축허가 취소 절차가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2심과  최종 3심 대법원에서도 승소했을 때 성도들이 다 울었습니다. 우리 예배당을 하나님이 철거하게 하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철거할 수 없고 하나님이 하지 않으시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어려움과 고통, 슬픔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고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럽지 않다’고 표현 합니다. 우리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 분명히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 하나님 살아 계시다면 그분은  여러분의 문제들을 반드시 해결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병에 걸리고 부도를 맞더라도 여러분이 온 천하를 당신의 뜻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못본 체 하지 않으신 하나님

“네 형제의 우양의 길 잃은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신 22:1) 여러분은 하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길을 잃으면 하나님이 못 본 체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김천에서 사역할 때, 그 후 대구, 대전, 서울로 사역지를 옮겼을 때도 제게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 박 목사는 말도 잘 안 듣고 믿음도 없으니까 그냥 모른 척 하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게는 길이 없지만 하나님이 못 본체 하지 않으시니까 어떻게 길을 여실까’ 하는 소망이 생기면서 결국 유일한 길인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 하나님과 연결되면 그게 길이 되었습니다.
저는 “못본체 하지 말고”라는 신명기 22장 1절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길을 잃고 암담할 때마다 하나님이 그 말씀대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알을 품은 어미 새’처럼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듯이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신 22:6~7)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새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는 생명이 깨어나도록 새끼를 보호하고 자라게 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복음 전도자를 의미합니다.
이번 대전도집회 때 우리 교회 박문택 장로님 내외가 가판전도에서 만난 어떤 부인을 모시고 와서 저와 계속 상담을 했습니다. 하루는 그 부인이 친구랑 같이 왔는데, 제가 한 이야기가 마음에 거슬렸던지 다시는 안 올 것 같이 돌아갔습니다. 그걸 보고 박 장로님 내외가 그 분을 위해 밤늦도록 기도회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를 거르고 그 다음날 그 부인이 다시 와서는 “그날 목사님이 맞는 이야기를 하셨는데, 제가 왜 속상해 하고 화를 냈는지 모르겠어요. 이 교회에 다시는 안 오기로 결심을 했는데,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고 온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어미 새가 알이 깨어나도록 품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새를 잡으러 오면 그 어미 새는 피할 수 있지만 계속 새끼를 품고 있다가 결국 잡힙니다. 어미 새가 날개가 없거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명을 걸고 새끼를 사랑하기 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없던 사랑과 간절함이

제가 대전에서 사역할 때 어떤 자매님이 제게 미장원을 운영하고 싶다며 상담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장원에 오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시라고 했습니다.
미장원에 손님은 별로 없었지만 어느 날 한 손님이 구원받았습니다. 그 후부터 그분이 교회다닌다고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핍박을 받았는데, 복음을 전해 준 자매가 그 자매를 얼마나 위했는지 모릅니다. 같이 어려움을 당하고 같이 기도하고 그 자매 아기도 업어주며 마음 쏟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건강해 보여도 처녀는 아기를 먹일 수 있는 모유가 안 나 오지만, 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아기를 낳은 부인에게는 모유가 나옵니다. 그처럼 복음을 전해 보면 예전에 없던 사랑과 믿음, 간절함이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걸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해도 복음을 듣는 사람이 구원을 안 받으면 거의 종이 되다시피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모든 것을 참는 아름다운 모습이 성도들의 삶에 묻어납니다.

한 사람이 거듭나기까지

여자가 임신을 하면 태아는 60조 개의 세포가 정확하게 세포분열해서 눈과 혈관, 심장이 되고 심장에 전기가 흘러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데, 만약 그 과정을 볼 수 있다면 너무나 신비할 겁니다. 귀한 한 생명이 거듭나는 과정은 육체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신비합니다.
대전도집회를 하면 많은 돈이 들지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우리는 집회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전도를 해 본 사람이라면 한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복음 전해서 처음으로 구원받은 분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손을순 자매님 입니다. 그 분은 저보다 20살이 많았지만 연애하는 사이처럼 제 마음이 그 분에게 많이 갔습니다. 제 기도의  70%는 그 자매님과  앞을 못 보는 남편,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자매님의 남편은 너무나 점잖은 분이라 복음이 마음에 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이 어느 날 구원받는 걸 보면서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제 마음에 자주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나는 정말 이 어미 새와 같은 마음이 있나? 한 생명의 구원을 위하여 위험이 와도 부딪칠 수 있는가? 성도를 위하여 내 생명을 버릴 수 있을까?’

“반드시 놓아라!”

새끼나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와 나뭇가지에 그냥 앉아있는 어미 새는 전혀 다릅니다. 어미 새를 잡으려 고 할 때 그 어미 새가 새끼나 알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은 “어미 새를 놓아 자유롭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형제자매들을 말씀으로 이끄는 일과 복음 전하는 일을 소홀히 여긴다면 멸망을 당하겠지만, 성도들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위하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재앙에서 저를 자유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위장이 안 좋아서 고통을 겪었을 때, 심장이 아파 죽을 뻔했을 때, 남미에서 비행기가 추락할 뻔했을 때, 인도 오리사에 갔을 때, 죽을 수도 있는 그 모든 상황에서 저를 놓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 가족에게 닥치는 재앙을 향해서도 “반드시 놓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의 고영복 장로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고 장로님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작년 한 해 동안 케냐 GBS 방송국을 설립할 때 그곳에 가셔서 낮에는 미장일을 하고 밤에는 지역교회를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는 구역예배를 드리면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지하철 신문 전도하러 가야겠다”며 자명종을 맞춰놓고 주무시다 세상을 떠나셨던 겁니다.
구원받으신 후부터 돌아가실 때가지 교회의 크고 작은 일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섬기다가 평안하게 돌아가신 장로님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분을 재앙에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마음이 듭니다.

어려움과 위험이 닥쳐도

여러분, 복음은 안일하고 평안 할 때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위험도 닥치고 헌금하다 보면 가난해질까봐 염려도 됩니다. 그럴 때 ‘전도 한번 안하고 헌금 한번 안 해도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마음을 버리고 신앙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왕의 신하들이 다니엘을 모함하기 위해서 30일 동안 어느 신에게든 구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는 법을 만들었습 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알았지만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시간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한 달 동안만 문을 잠가놓고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잡혀 사자 굴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이 사자들에게 “반드시 놓아라!”고 하시니까 사자들은 다니엘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분과 축복

어미 새가 알을 품는 것은 생명이 태어나도록 복음을 전하는 것을 말하고, 새끼를 품는 것은 어린 영혼을 양육하는 것을 말합니다.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거든”(눅 17:7)이라는 구절에서 밭을 가는 종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전도자를 말하는 것이고, 양을 치는 종은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사를 말합니다. 여러분이 목사나 전도사는 아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직분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구원만 받으면 다 됐다고 생각하고 복음 전하는 것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신앙에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이런 성경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면서 ‘하나님이 복음을 위하는 사람을 이렇게 생각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사망이 나사로를 잡았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나오너라’ 하시니까 사망이 꼼짝 못하고 나사로를 놓아 나사로가 자유를 얻은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부족하더라도 복음을 전해야

마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보니까 잎사귀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나무들이 열매가 아무리 많아도 잎이 충분하지 않으면 열매가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몇 개만 남겨 두고 다 따 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가 자라는 데는 잎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잎이 나기 전에 열매부터 납니다. 그것은 무화과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보았던 그 무화과나무는 믿음 없이 ‘무화과나무가 자라려면 잎부터 나야지 열매가 먼저 나면 어떻게 해’ 하는 식으로 잎만 무성하게 자란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갖추어서 주님의 일을 하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단에 속아 요동하지 말고 힘 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지혜도 주시고 필요한 물질도 주실 것입니다. 다가오는 가을 대전도집회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집회 전에 복음 전할 준비를 미리해서 하나님이 내 속에 살아 일하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행하시면 더 없는 은혜와 복이 될 줄 믿습니다.

- 2010.5.9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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