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에 매인 삶 VS 성령에 매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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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 매인 삶 VS 성령에 매인 삶
[출애굽기 25장 10절 ~ 22절] 2009. 12.6 주일 낮 설교 - 287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9.12.11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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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만난 어떤 부인

제가 수원교도소의 교화위원으로 활동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밤 12시가 다 되었는데, 전화벨이 울려서 자려고 하다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목사님, 저 76번이에요.” 수원교도소 여자 감방에서 제가 복음을 전해 구원받은 자매였습니다.
“자매님, 지금 어디입니까?” “청량리 역전이에요.” “자매님, 왜 거기에 있습니까?” 그 자매님이 출소하는 날이 되어 아침 일찍 교도소에서 나와서는 하루 종일 서울시내를 빙빙 돌아다니다가, 도저히 집에 갈 수 없어서 집 주위를 맴돌던 중에 저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님을 만나 집에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너무 늦어서 전화로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자매님, 집에 들어가야 돼요.” “목사님, 도저히 못 들어가겠습니다. 어쩌면 좋겠습니까?” “안 들어가면 청량리 역전에서 잘 거예요? “글쎄요. 그럴 수도 없고….” “그러니까 들어가요.” “죄를 지은 여자가 무슨 명목으로 남편과 아이들을 대하겠습니까?” “저도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가 없으면 허전합니다. 자매님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은 어머니를 보고 싶어할 겁니다. 남편도 오늘 자매님이 출소하는 날인 줄 알았으면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고 기다렸을 겁니다. 직장에 나갔더라도 하루 종일 아내 생각만 했을 겁니다. 빨리 돌아가세요.” 제가 계속 설득했더니 나중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전화를 끊고 잤습니다.

“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가?”

이튿날 오전 9시 즈음, 그 자매님한테서 어제 집에 잘 들어갔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함께 그 자매님 집을 방문해서 신앙교제를 했습니다. 어떻게 집에 들어갔냐고 물었더니,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먼저 집에 전화를 했는데, 고등학생인 딸이 전화를 받았답니다. “엄마다.” “엄마! 거기가 어딘데?” “너 청량리역까지 좀 나올래?” “엄마는 여기가 남의 집이야? 내가 왜 나가. 엄마가 들어와야지!” 딸이 하도 고함을 질러서 얼떨결에 집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밤새도록 서로 붙잡고 울고 웃으면서 그 자매님이 없을 때 남편이 밥 하다가 태운 이야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님이 교도소에 있으면서 얼마나 남편을 만나고 싶고 아이들이 보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여자가 무슨 낯짝으로 죄를 짓고 집에 들어가?’ 하는 그 생각이 들어오니까 아이들이 학교 갔다 와서 하루 종일 엄마를 기다리는데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남편도 교도소에 전화해서 출소했다는 걸 알고 직장에 가서도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잘 안 잡혀 기다리다가 ‘이 사람이 왜 안 들어오나? 무슨 일이 있나? 여비가 없어서 걸어오나?’ 하며 별별 생각을 다 했다고 합니다. 한 가족인데도 이렇게 생각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죄를 기억치 않는 하나님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얼마나 생각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먼저 우리 생각을 버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나는 너와 같은 사람이 아니니까 제발 내 마음을 알아다오”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만일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잘한 것이 있으면 기쁘게 하나님 앞에 서겠지만, 부족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송구스러울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늘나라의 생명나무 밑에서 형제자매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뒤에 서 계시면 제가 큰소리 친 게 갑자기 부끄러워질 겁니다. “이놈이 방탕하게 살아놓고는…” 하고 말하시면 예수님을 피하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쪽에 나타나시면 우리는 저쪽으로 도망가고, 예수님이 저리로 가시면 우리는 이리로 도망 다니기 바쁠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과 우리 사이에 어둠이나 거리낌이 없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주님 앞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겠지만, 주님은 우리가 밝은 빛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거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죄를 전혀 기억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는 죄를 가슴에 두고 기억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르기 때문에 성경에서 우리 죄를 기억치 않는다고 하시면 절대 기억치 않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가서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제 더러운 죄를 씻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이 “내 아들 예수가 너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니까 너희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그 죄가 전혀 기억나지 않아”라고 하실 겁니다. 컴퓨터 전문가는 삭제된 파일을 복구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리 죄와 허물에 대한 기록은 절대 복구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허물이 없는 사람이 누구며, 악하고 추하고 음란하고 더럽지 아니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씻어주시지 않으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허물이나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속죄소의 의미는

오늘은 법궤에 있는 속죄소에 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속죄소(Mercy Seat)는 긍휼과 자비의 자리 또는 시은좌(施恩座)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이 우리들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은혜를 입는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법궤는 장이 2.5규빗, 광이 1.5규빗, 고가 1.5규빗입니다. 1규빗이 45㎝이니까 길이가 150㎝, 폭과 높이가 약 70㎝ 정도 되는 작은 상자입니다. 법궤는 아카시아나무로 만들고 순금으로 입혔습니다. 법궤의 뚜껑은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인데 뚜껑도 금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위에 천사가 서로 마주보며 날개를 펴서 덮고 있는데 그 뚜껑을 ‘속죄소’ 또는 ‘시은좌’라고 합니다.
법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 판을 넣어두었는데 그것을 뚜껑으로 덮어서 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의 피를 가지고 속죄소 동편과 위에 뿌릴 때 그들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죄를 성립시키는 율법

그러면 무엇이 죄를 죄 되게 만듭니까? 바로 법(法)입니다.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는 자정 이후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통행금지법이 있었습니다. 그 법이 있을 때는 어쩌다 밤12시가 넘어서 다니게 되면 경찰관에게 들킬까 봐 뒷골목으로 숨어 다니고 경찰서 앞을 지나갈 때는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자정 이후에 경찰서 정문 앞에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통행금지법이 없어졌기 때문에 밤 12시 이후에 다녀도 죄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또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등의 십계명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우상을 섬기거나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이 전혀 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오자 그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죄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마음과 반대되는 사단에게서 나온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없는 것들, 즉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만들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거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가 우리 속에 있는데, 우리 속에 악하고 더러운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율법이 왔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주는 힘은 있지만 우리를 죄에서 건지는 힘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매이게 되면 율법에는 긍휼이 없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 아닌, 다른 법이 작용해야

율법은 BC 1491년 경에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아 내려온 것인데, 그날에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도 그게 하나님께 죄가 되지 않았는데, 금송아지를 만드는 그날, 율법이 내려오자 금송아지를 만든 죄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선을 행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마음이 사단에게 끌려가기 때문에 ‘내 모든 생각이 악하고 더러우니까 내 생각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십계명 두 돌판을 법궤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덮어 더 이상 율법이 역사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과 다른 법이 우리 속에 작용하게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음란, 도둑질, 거짓말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 살게 되면 그것이 성령의 법을 적용받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들어오면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되니까 사단이 간음하는 마음을 넣어주었다가도 예수님의 마음이 그것을 물리쳐 주시면 간음하기 싫은 마음이 내 속에 작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도둑질하는 것을 싫어하니까 그전까지 도둑질했던 내가 구원받고 나니 그게 싫어지는 겁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좋고 즐거웠는데,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니까 그런 것들이 무의미해서 시들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역사하는 우리 마음은 추하고 더러우니까 우리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여 그로 말미암아 살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깨우쳐 줬으니 이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으니까 법궤 안에 담아서 뚜껑을 덮어버렸습니다. 긍휼과 자비가 없는 율법이 끝났기 때문에 두 돌판을 뚜껑으로 닫아버린 그 자리가 시은좌, 즉 은혜와 자비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혼율이 늘어나는 이유

요즘 젊은 부부들이 이혼을 많이 하는데,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요즘 대부분 젊은이들이 학력이 높기 때문에 서로 부딪히면 자기 주장을 굽히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대부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니 결혼한 후에도 ‘나는 어느 정도 배웠어. 나는 옳아. 내 방법이 틀림없어’ 하며 자기를 믿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배우자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자신의 옳은 것을 주장하기 때문에 서로 마음의 대화가 안 됩니다. ‘난 대학 다닐 때 성적이 좋았어. 내 판단이 항상 옳았어’ 하며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서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 교육 문제에 대해 남편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아내도 배운 게 있고 아는 게 있으니까 “당신의 의견도 좋지만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게 됩니다. 남편이 “왜 당신은 내 생각을 다 무시하느냐?”고 하면 아내는 “무시하는 게 아니라 더 좋은 길을 제시하는 거다”라고 합니다. “그냥 한 번 따라 봐라.” “이 생각이 더 좋은데 어떻게 따라가냐” 하면서 싸우게 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싸움이 계속되면서 서로 지치게 되고 “우리는 왜 이렇게 안 맞나” 하며 결국이혼하자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이혼을 하면 자식들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지만 우선 고통스러우니까 일단 이혼부터 하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의 이혼율이 늘어나는 겁니다.

진정한 부부는

아내가 남편에게 요리를 잘하는 것, 와이셔츠를 잘 다리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부부가 되려면 아내가 옳고 그른 것을 불문하고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마음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생각의 차이가 많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여자들은 부분적이고 소극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남자들은 전체를 폭 넓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남편과 같은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자신의 마음을 세워놓고 남편과 타협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에서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고,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런 원칙을 마음에 새기고 남편은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린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머리니까 남편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면 둘이 한마음이 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나름대로 주님을 잘 섬기는 것보다 주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는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가리키고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음란이나 거짓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면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법이 필요 없이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을 궤 안에 집어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 위에 피를 바르고 천사가 뚜껑을 가려서 더 이상 법이 우리 인간 속에 역사하지 않고 성령의 법이 우리 마음 안에 일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진정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장소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희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하노니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16~21)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장소는 율법을 집어넣고 뚜껑을 덮은 속죄소입니다. 율법은 ‘이에는 이’로 죄의 대가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절대 긍휼과 자비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법을 덮어야만 자비와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즉 속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우리 마음에서는 음란하고 거짓되고 악한 마음이 나오기 때문에 율법 자체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간음치 말라 하셨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간음했고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마음에 이미 살인했다”고 하시면서 마음의 세계를 지적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율법을 덮고 성령을 우리 속에 부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지킬 때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죄 속에 빠져 율법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우리 마음 안에서 죄가 싫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 때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고 만족케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영적인 남편이기 때문에 법을 지키려고 애쓰지 말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벗겨 주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법이 어떤 것인지 알았으니 이제 법이 싫지? 그러니까 법을 궤 안에 집어넣고 덮을 테니까 법 없이 같은 마음으로 살자” 하시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성령을 우리 속에 부어주셔서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저절로 주님에게 이끌리게 되고 성경을 볼 때 삶이 달라지면서 법 없이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성령에 매인 삶

이제 율법에 매이지 말고 성령에 매이십시오. 율법은 잠깐 보였지만 3500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궤 안에 집어넣어 뚜껑을 덮었습니다. 그런 다음 열지 못하도록 천사가 날개를 펴고 법궤를 쳐다보고 지키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덮고 피로 발라서 완전히 가려 놓으신 후 이제 율법 없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법을 많이 만들지 말고 마음으로 같이 하고 아내들도 자기 법을 세워 남편을 대하지 말고 마음으로 따르면 부부가 화목해질 겁니다. 그처럼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 그 마음으로 살면 법 없이 복되게 살게 될 줄 믿습니다.

- 2009. 12.6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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