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마음을 합하면 신앙은 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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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마음을 합하면 신앙은 쉬워집니다
[누가복음 5장 1절 ~ 11절] 美 LA 대전도집회 첫날 설교(2009.9.20) - 277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9.09.30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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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엄마처럼 대해 준다(?)

요즘 한국에는 이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혼은 참 불행한 일이지만 부부가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마음에서 이기지 못하면 이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혼한 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다가 구원받은 한 형제가 있었는데, 몇 년 후 어떤 자매와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재혼하는 그날 가족끼리 모였는데, 그 자매가 형제의 전처에게서 난 두 딸에게 뭔가 특별한 결심을 한 것처럼 “나는 너희에게 친엄마처럼 해주겠다”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그 자매에게 말했습니다. “정말 친엄마처럼 할 수 있어요? 자매는 절대로 친엄마처럼 할 수 없어요!” 그랬더니 분위기가 굳어졌습니다.

먼저 마음이 통해야

그 자매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럼 어떻게 해야 되죠?” “아이들에게 ‘너희들 신데렐라 알지? 거기서 말하는 계모가 바로 나야. 너희가 불행하게도 친엄마 밑에서 못 크고 나랑 살게 되었는데, 내가 친엄마처럼 해줄 거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 원수가 될 거야. 나도 너희에게 잘해주고 싶지만 친엄마처럼은 절대 못해! 그러니까 그런 기대는 하지 마. 너희도 잘해. 나도 잘할게.’ 그렇게 이야기해서 서로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저는 남의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이 마음의 고통을 겪다가 아이들이 결혼한 후 버림당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장래를 볼 만한 눈이 없으니까 자기가 친엄마처럼 잘해주려고 하지만 계모는 계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진짜 잘해 주려고 하다가 서로 오해가 생기면서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키워 주세요’

저는 결혼한 후 제 자식만큼은 반듯하게 키울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3살 쯤 되던 어느 날, 전도 갔다 왔더니 아이가 온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습니다. 옆집에서 놀던 중 옆집 아이가 우리 아이를 밀어서 안방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으로 넘어지면서 연탄불 뚜껑 위에 떨어져 손에 화상을 입었다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했습니다. 아이들끼리 놀다가 그런 것이니 뭐라고 말도 못하고 잠이 들어 있는 아이를 끌어 안았습니다.
‘하나님, 우리 은숙이 흉터 남지 않고 빨리 낫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했는데, 주님이 제게 ‘네가 아이를 반듯하게 키워? 네 딸이 연탄불에 떨어질 때 너는 뭘 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게 하시니까 제가 얼마나 바보 같고 어리석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반듯하게 키우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 잘 키우고 싶어 하지만 사형수, 마약중독자, 사기꾼이 되어 부모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식도 있습니다. 부모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닙니다. 부모는 아이를 정말 잘 키우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부모가 어떻게 바로잡겠습니까?
그 후 저는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전 제 자식들을 잘 키울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아비이지만 아버지 사표를 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아이들을 길러 주십시오.’ 그러고 난 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제 아이들을 이끄시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방법을 모르니까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실제로 아무것도 못하면서도 내가 뭘 하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정확하게 지킬 수 있습니까? 십일조를 빠짐없이 낼 수 있습니까? 정말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내가 밥을 못 먹으면 배가 고파도, 남이 밥 못 먹는다고 해서 내 배가 고프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합니까? 저는 절대로 못합니다. 저는 제 아들과 남의 아들을 절대로 똑같이 대할 수 없습니다. 그 점을 성경은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골프 잘 치냐고 물어보면 “예, 좀 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피아노를 잘 치냐고 물어보면 “좀 칩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잘하세요?”라고 물어보면 한 사람도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합니다. 운전을 10년 동안 배우면 자신 있게 운전할 수 있는데, 신앙생활은 50년 동안 해도 자신이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신앙의 방법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내가 하려고 한다고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어느 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굉장히 어렵게 느껴집니다.

믿음의 선에 도달해야

몇 년 전에 LA에서 집회를 했을 때였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다 돌아갔는데 한 부인이 힘없이 의자에 앉아 있는 걸 보고 제가 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분이 깜짝 놀라며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신앙생활에 만족하세요?” “목사님, 저는 이제 지쳤습니다.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분은 어느 교회의 목사님 사모였으니까 신앙을 잘하려고 얼마나 노력했겠습니까?
그분의 두 마디 말을 듣고 저는 그분의 신앙을 환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지치고 한계가 왔다는 것은 자신이 일했지,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할 때 지치지, 하나님이 일하시면 왜 지치겠습니까?
한국에서 LA까지 올 때 제가 비행기를 조종한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나 조종사가 하니까 구름이 끼어도, 기류가 나빠도 저는 잠만 자면 됩니다. 그처럼 처음에 신앙을 할 때는 자신이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십일조 내고, 주일 지키다가 신앙이 어렵고 힘들고 피곤해지면 신앙생활 잘하는 척 외식(外飾)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에 도달하면 신앙이 한 단계 올라가게 됩니다. 내가 하는 단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단계로 올라가면 ‘내가 하는 것은 전부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방법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도 처음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열심히 하려는 마음으로 신앙을 시작했지만, 그 마음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과 만나면서 신앙이 굉장히 쉽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참 많은 목사를 길러냈는데, 그들을 가르칠 때 먼저 자신의 생각의 구조를 파악하게 합니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정확히 깨우쳐 준 뒤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시켜 줍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마음이 흐르기 시작하기 때문에 목회가 쉽고 재미있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

여러분,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BC 1491년에 내려왔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올 때 시내 산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 후로 예수님이 태어나시기까지 약 1500년 동안 율법을 정확하게 지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율법은 완벽하게 다 지켜야지, 하나라도 못 지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십니다.
전기는 전선이 연결되어야 흐르듯이 하나님의 능력은 마음이 연결되어야 흐릅니다. 저는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과 마음이 연결되면 그 사람이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노아가 어떻게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는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축복받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세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읽어 보면 공통적으로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 후 자신의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는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일하시는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욕망, 음란과 시기, 질투와 미움이 있지요? 하나님은 그런 마음 안에 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그 마음을 고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죄에 망하고 두려움에 잡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자신이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면 율법을 지킬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십계명이 율법의 전부가 아닙니다. 여자가 불결기가 지나고 난 뒤에 행해야 하는 예식을 아십니까? 시체를 만지고 난 뒤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여자가 아들을 낳은 뒤에 며칠 동안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율법을 정확하게 알면 ‘이것은 예수님이나 지킬 수 있지, 나는 못 지켜’ 하는 마음이 듭니다. 베드로나 바울도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바울은 예수님을 심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복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시점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성경에서 발견한 후 저도 제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제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흘러 들어오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에 갔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은 바닷가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지만 베드로는 말씀을 안 듣고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내 옷도 사야 하고 양식도 사야 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접어 두고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새벽이 될 때까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물을 씻고 있는 베드로의 배에 다가가셔서 그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두어 번 노를 저어 육지 쪽에 배를 띄웠습니다. 배를 띄우자 예수님이 그 배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난 뒤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신앙생활을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직접 부딪쳐 보면 예수님과 마음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5장 8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했습니다. ‘깊은데 그물을 내리라고요? 말도 안 돼요. 나는 갈릴리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당신은 그물도 한 번 안 던져본 사람 같은데 당신이 뭘 안다고 깊은 데 그물을 던지라고 그래요? 거기에 고기가 있을 것 같으면 밤새도록 거기다 던졌지. 낮에는 깊은 데 고기가 있지만 밤에는 얕은 데 있어요.’
하나님을 믿을 때는 이런 과정이 다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장, 경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 늘 부딪힙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지금은 잘될 것처럼 보이지만 잘못될 수도 있어. 내 생각 따라가면 나는 망해. 말씀을 따라가야 돼’ 하는 마음이 형성되면 신앙이 쉽습니다.
저는 굉장히 어렵게 신앙을 했습니다. 그러다 19살이 됐을 때 제 생각이 부족하고 악하기 때문에 제 생각을 따라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제 속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때부터 제 삶 속에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말씀만 의지하면 하나님이 힘 있게 역사하실 겁니다.

나환자촌 집회에 초청 받아

몇 십 년 전에 나환자촌 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집회 강사로 초청했는데, 제가 가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 나환자촌에서 집회를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가겠다고 약속했는데도 그 목사님이 꼭 오셔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아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꼭 갈게요”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한 달 전 어떤 목사님이 그곳에서 집회를 하기로 약속했었는데, 집회 일주일 앞두고 바빠서 못 간다는 전화가 왔다는 겁니다. 그 일로 교인들이 “목사가 설교하는 것보다 바쁜 일이 뭐가 있어? 우리가 문둥이라서 안 오는 거지” 하며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리 바빠도 가겠습니다” 하고 확실히 못을 박았습니다.
그 목사님이 기뻐하면서 저에게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식당에 가서 큰 팬을 올려놓고 갈비를 잔뜩 구웠습니다. 그때가 1980년이었는데, 그 당시 저는 아주 가난해서 갈비는 상상도 못할 때인지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갈비를 맛있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도 나환자였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무척 기쁜 나머지, 약간 올라간 입술 사이로 흐르는 침이 갈비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제가 보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갈비 맛이 뚝 떨어지면서 도저히 갈비를 같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침이 덜 떨어진 제 가까이 있는 것만 뒤집어 다시 구워서 한두 조각 먹고는 그 많은 갈비를 남겨둔 채 식당을 나왔습니다.

주님도 나환자를 찾으셨는데

집에 돌아오니 어떤 목사님이 저한테 말했습니다. “박 목사님, 나환자촌에 가신다고요?” “예.” “거기 가면 나환자들이 시험해 본대요.” “무슨 소리예요?”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달걀을 까서 먹으라고 한대요.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한마디로 일축했습니다.
집회를 3일 앞두고 새벽에 일어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환자촌에 갈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진짜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달걀을 까서 줄까? 그러면 그걸 먹어야 할까? 잠은 같이 자자고 할까? 음식은 어떻게 해서 줄까? 그러다 나도 나병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되면서 생각이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려고 하는데,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마 26:6) 하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꼭 주님이 제 귀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자 ‘거룩하고 존귀하신 주님도 나환자 집에 가셨는데 나같이 천한 인간이 무엇이라고 그곳에 가기를 주저하겠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야비하고 못된 인간인데, 그 마음은 제 마음이 아니라 분명히 예수님이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나환자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도 얼마든지 나환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나환자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어도 아무 거리낌 없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나환자촌 집회를 잊을 수 없습니다. 150명 정도 모였는데, 죄 사함 받고 싶은 사람은 제 방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40여 명이 빽빽하게 둘러앉은 그 방에서 새벽2시까지 복음을 전했는데, 대부분 변화를 입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해 나환자촌 일곱 개 교회의 초청을 받아 집회를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의 정의

여러분, 사라는 90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사라에게 아들을 낳는다고 하셨을 때 사라는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오’(창 18:12)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사라가 깜짝 놀라 거짓말을 했습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면서 사라는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자신의 생각은 ‘내 남편도 늙었고 나도 경수가 끊어졌으니 아기를 낳을 수 없어’였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아들을 주신다면 내가 아들을 낳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다른 마음을 바꾸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사라가 마음을 바꾸자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면서 그 마음의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힘이 사라에게 임했습니다. 전에는 “왜 이리도 뼈마디가 쑤신지 모르겠네” 하다가 그 후로는 “너희, 뭘 이 정도가지고 그렇게 쩔쩔매. 내가 들고 갈게! ” 하며 힘이 솟는 겁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합할 때

저는 병든 자가 하나님과 한마음이 될 때 암도 완치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을 합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평안과 기쁨, 소망과 사랑이 흘러들어 옵니다. 그러면 신앙이 정말 쉬워집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자체가 잘못되었고 악한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바라십시오. 하나님이 일하시면 여러분은 이 시대의 베드로가 될 줄 믿습니다.

- 美 LA 대전도집회 첫날 설교(2009.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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