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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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면
[사도행전 9장 1절 ~ 31절] 2009.9.13 주일 낮 설교 - 27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9.09.1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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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 달란트 빚진 자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불러서 빚을 갚으라고 했더니 다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너를 보니 빚을 갚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네 몸을 팔고 네 아내 그리고 아들, 딸까지 팔아서 빚을 갚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 종의 마음에 사망이 왔습니다. 자기와 아내, 자식까지 종으로 팔려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암담해서 주인에게 간청했습니다. 주인이 그 종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가 금 42kg쯤 되니 일만 달란트는 금 420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인데, 그걸 주인이 모두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同官)에게 자기 빚을 갚으라고 하면서 안 갚으니까 감옥에 집어넣는 이야기를 듣고 주인이 그 종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내 생각을 따라 살면

이 부분에서 주인의 마음과 종의 마음이 드러나는데, 주인은 일만 달란트를 손해 보면서까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탕감해 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면서도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빚을 안 갚는다고 동관을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주인의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면서 너에게 긍휼을 보여줬잖아. 네가 내 마음을 조금만 생각해 보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저는 19살 때까지 저 자신을 잘 몰랐기 때문에 저 나름대로 착하고 똑똑하고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술하사관 시험에 떨어지면서 굉장히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처음으로 저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저는 추하고 더럽고 야비하고 악하고 미련한 사람인데, 저같이 못난 인간이 어떻게 착하고 잘났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구원받기 전의 저를 생각해보면 저는 망할 수밖에 없는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잘난 척 하고,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나쁜 짓 다하면서도 선하다고 생각하는 저를 발견하면서 제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따라 살면 사람들에게 멸시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불행과 저주가 찾아오는 이유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주인이 되어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며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고 한 사람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요? “난 재수가 없어”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람들이 겪는 불행이나 저주는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정신구조가 있다는 것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빚을 진 것이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을까요? 그에게는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생각의 구조가 있습니다. 반면에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주인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종이 ‘주인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빚을 탕감해 줄 수 있었지만 내게는 그런 마음이 없구나. 나도 주인의 마음을 받으면 앞으로 주인처럼 살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주인이 기뻐했을 겁니다.
저도 ‘주위 환경이 나쁘거나 우리 부모님이 돈을 많이 못 벌어서 내가 못난 인간이 된 게 아니라 내 마음의 구조가 잘못되었구나. 하나님이 일하실 수 없는 더럽고 거짓된 내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47년 동안 예수님 안에서 말씀이 저를 이끌어주는 것을 경험하면서 살았습니다.

말씀에서 멀어지면

저는 구원받은 후 저를 향한 주님의 소망을 발견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를 위해서 주님이 계획한 길과 제가 저를 위해 계획한 길을 비교해 보니, 제 계획은 지저분하고 악해서 그것을 이루려면 남을 속여야 하고 거짓말을 해야 하지만, 주님의 계획은 정말 순수하고 거룩하고 깨끗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제 계획을 배설물처럼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저는 성경 속에 나타난 주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게는 평안, 지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과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육신적으로 기울어집니다. 그러면 설교하는 것이나 성도들을 대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면 주님의 마음이 제 마음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저는 형편없지만 지혜가 나오고 악하지만 선을 풍기게 되고 매몰찬 인간이지만 사랑을 쏟게 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돈을 받기 위해서 감옥에 집어넣는 것을 보면서 주인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과 같이 너도 네게 빚진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한 말은 “네가 네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 많은 빚을 지게 된 거야. 왜 내 마음으로 살지 않고 네 마음으로 살았느냐”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문제 학생들의 마음이 잡혀가고

저는 형제자매들로부터 교회에 나오는 동안 문제를 일으키던 자녀의 마음이 많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자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며칠 전 미국에 사는 어떤 분이 저한테 편지로 다음 주에 제가 미국에 가면 저를 꼭 만나고 싶다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아무리 해도 자기 아들의 마음을 잡아 줄 수 없기 때문에 제게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스물한 살 된 자기 아들이 곧 출소하는데, 그 아들을 제가 좀 맡아달라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자식들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이 없어질 정도로 자식들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학생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이 잡혀가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매길 수 없는 복입니다.
부부 사이를 보아도 요즘은 겉 으로는 부부이지만 마음이 나누인 채 사는 부부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 부부일지라도 우리 교회에 와서는 마음이 합해지기도 하고, 구원받기 전에 이혼했다가 교회 나오면서 다시 합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부부가 같은 마음으로 지내는 것을 보면 정말 행복해 보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저버린 종처럼

비참하게 살 수밖에 없던 그 종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게 되자 주인의 마음에서 떠나 잘살고 싶은 마음으로 동관에게 빌려준 백 데나리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처럼 늘 죄에 매여서 고통당하다가 교회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쉽게 저버리고 육신적으로 흘러가는 성도의 모습을 성경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기보다 예수님의 마음이 여러분을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예수님의 평안과 지혜로 살 뿐 아니라 그 빚을 탕감해 준 자의 마음을 이어갈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죄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 삶이 달라지면서 가족이 화목해지고 자식들이 건전해지는 은혜도 입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키고 도우시는데도, 그런 주님의 마음에는 관심 없이 자신의 욕망대로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습니까?
 

처참한 학살의 역사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이 자기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뀌는 과정을 아주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감옥에 집어넣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저 예수쟁이들은 사기꾼들이야.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거짓말을 해. 저 사람들은 백성들을 미혹하는 사회의 악이야. 그러니까 없어져야 해’ 하는 생각에 잡혀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 IYF 아프리카 월드캠프 중 르완다에 갔을 때 인종 학살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르완다에는 후투족과 투치족 두 종족이 살고 있는데, 후투족은 농사를 짓고 양을 먹이는 종족이고 투치족은 키가 크고 몸이 튼튼해 사냥을 하는 종족이었습니다.
르완다는 오랫동안 독일의 지배 하에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벨기에의 지배 하에 있으면서 투치족을 관리자로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후투족이 투치족의 주요 인사들을 다 죽였습니다. 결국 100일 동안 100만 명의 투치족을 죽였으니까 하루에 평균 만 명씩 죽이는 처참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식들 앞에서 부모를 칼로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죽는 게 비참해서 돈을 주고는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저는 독일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에도 가보았는데, 소름이 끼치고 몸살이 날 것 같이 고통스러워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간교하게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남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의 결과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서 어린아이들을 이용해서 3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총알이 없어서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어 죽이고는 해골을 쌓아놓았는데, ‘인간들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을까?’란 마음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잔인하다기보다 너무나 어리석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얼마든지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혜롭고 똑똑한 자는 공산주의에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죽이면 낙원이 오고 평화가 온다고 믿었는데, 그렇게 300만 명을 죽여서 공산주의 낙원이 이루어졌습니까? 지금 캄보디아에는 학생들을 가르칠 교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왜 죄를 짓는지 압니까? 왜 신앙이 안 되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위해서 신앙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 손해가 갈 것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헌금을 하면 가난해질 것 같고, 쾌락을 누리지 못할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잡히면 그것이 인간을 패망하게 합니다.

사단의 생각에 속아

저는 어느 날 제 영혼이 제 육체 밖으로 나와서 제 몸을 쳐다보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내가 이 흙덩어리를 만족시키려고 주님을 섭섭하게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온 마음을 쏟지 못했구나’ 하며 후회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육체를 위하는 것이 정말 자기를 위하는 것 같은 사단의 생각에 속으면 그런 후회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은 다메섹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증거 했지만 그는 ‘미련한 백성을 미혹하는 거짓말쟁이들, 죽은 예수가 어떻게 살아나?’ 하며 자기 생각을 믿었습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좀 더 자세히 물어봤더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 선교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우리 선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세히 알아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지만, 사단에게 속아 근거 없는 비방만 듣고 오해하기 때문에 우리가 전하는 이 아름다운 복음을 듣지 못해 멸망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울의 회개

오늘 저는 사도 바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잘나고 똑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판단을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증거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주었습니까?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얻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서 형벌을 받게 하려고 다메섹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오쯤 밝은 해보다 더 강한 빛이 비치자 사울이 깜짝 놀라 눈을 못 뜨고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자신을 부르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다.” 사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뭐라고요? 나사렛 예수라고요? 그러면 당신이 살아나신 것이 사실이네요. 저는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거짓말쟁이로 알고 그들을 얼마나 많이 핍박하고 괴로움을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저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이런 어리석은 짓을 했습니다.’

자신을 믿는 어리석음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는다면 그가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믿지 않는다면 그게 사실인지 확인해 볼 것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기 생각에서 나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가 살아나긴 어떻게 살아나? 백성들을 미혹하는 저런 인간들은 사회의 악이니까 모조리 잡아다가 죽여야 돼’라고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육안이 벗겨진 후 ‘내가 나를 믿은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것도 중요하지만 일만 달란트 탕감해 준 주인의 마음은 일만 달란트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 종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인으로부터 그 마음을 받았지만 여전히 일만 달란트 빚진 자기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결국은 그 탕감 받은 것도 무의미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도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처럼 여전히 자기 생각을 따라 살면 구원을 받았더라도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내가 왜 일만 달란트를 빚지면서 내 생각대로 어리석게 살았을까?’ 하는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주님이 마음속에 계셔야

대전에 있던 우리 선교회의 기쁜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유치원 교사들은 아이들을 칭찬하면서 마음을 높여주지만 우리 유치원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칭찬보다 먼저 아이들의 마음을 꺾어줍니다.”
사단도 우리를 높여서 스스로가 잘하는 줄 알게 만들고 자기만을 믿도록 만듭니다. 그러니까 참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예수님보다 자기 생각을 믿어 여전히 예전과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하게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마음이 악한데 어떻게 선하게 살 수 있습니까? 선하게 살려면 선한 마음을 가진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야 하고 거룩하게 살려면 거룩한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와야 하고 평화롭게 살려면 주님의 평안이 마음에 임해야 하고 지혜롭게 살려면 지혜의 근본이신 주님이 마음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 주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는데도 지혜롭게 산다거나 평안해 하거나 누구를 사랑한다는 건 모두 입에 붙은 말에 불과합니다.

말씀에 이끌린 사울

성경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 어떻게 자기를 믿는 마음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옮겨갔는지를 정확하게 그렸습니다. 사울이 쓰러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자기 생각을 믿고 따른 사울이 이제 자기 생각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하셨네. 성으로 들어가면 주님이 내게 행할 일을 이를 자가 있을 거라고 하셨으니 누군가가 올 거다.’ 어느 날 아나니아가 찾아왔습니다. ‘이게 주님의 인도구나. 주님이 나를 이끌고 계시네.’ 주님의 인도를 따라 한 발자욱씩 발을 내딛는 동안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서 하나님의 종으로 만드셨습니다.

‘내 생각을 믿어서는 안되겠구나’

사랑하는 주님께서 구원받은 여러분의 삶을 이끄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 되셔서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을 이끄시길 원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살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다가 망한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
사울처럼 ‘이제 내 생각을 믿어서는 안 되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겠구나’ 하는 믿음을 가지면 여러분을 통해 능력과 사랑, 평안과 지혜가 나타나 소망 가운데 복되게 살며 하나님을 증거 하게 될 줄 믿습니다.

- 2009.9.13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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