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내 생각’이 아닌 ‘말씀’을 따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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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내 생각’이 아닌 ‘말씀’을 따르는 것
2008.10.19 주일 낮 설교 - 228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8.1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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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가는 한국의 기독교

오늘은 늘 하던 이야기를 한 번 더 하려고 누구나 아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이 믿음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이론에 그치면 말씀 듣는 자체가 부담스럽고 힘겨울 따름입니다.
신앙은 굉장히 쉽고 재미있기 때문에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디디게 되면 죽어있던 마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근심 거리가 있어도 근심하지 않고 두려움 거리가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슬픔이 없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이 없어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은 슬프게도 기독교가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말살시키려는 유명한 신학자들을 통해 기독교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속아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는 목사가 많이 생겼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무슨 근거로 하나님을 믿습니까?
요즈음은 기독교가 불교나 천주교와도 잘 사귑니다. 기독교도   별 다를 바 없는 종교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는 생명의 도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이 시대에 사단이  특정 사람들만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 모두를 교묘하게 이끌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

기독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바울 같은 분들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요한의 제자 가운데 ‘폴리갑’이라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종을 통해 복음의 역사가 유대 땅에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서서히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기독교는 하나의 형식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르틴 루터가 구원받은 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종교개혁이 이루어졌지만, 그 후에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나 디엘 무디 같은 귀한 종들이 복음을 전할 때도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지만, 다시 사단의 강한 역사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단에게 생각을 빼앗길 때가 있고 타락된 길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

사단도 일하지만 성령도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데, 성령이 우리 속에 일하실 때 어떻게 일하시는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인 말씀이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입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 11:21~23)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과 마르다의 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에 오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후였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기 전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며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사로가 덜컥 죽어버렸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마음에 ‘우리가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고쳐 주셨으면 우리 오빠가 안 죽었을 텐데’ 하며 예수님에 대한 원망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오빠는 죽었어. 예수님이라도 별 수 없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마르다는 나와서 예수님을 맞았지만 마리아는 섭섭해서 예수님을 만나러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절망과 소망 사이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마르다의 입에서 나오는 첫 마디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32)였습니다. 그 말은 “주님, 왜 이제 오셨어요? 주님이 진작 오셨으면 우리 오빠를 고쳐주셨을 건데…” 하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 11:23)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르다의 생각 두 가지가 서로 팽팽하게 평행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햇볕이 너무 뜨겁게 내리쬐고 목은 마르고 배는 고픈데 사막의 끝이 안 보이자 아들은 ‘이제 우리는 죽었다’는 절망에 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에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전에도 사막을 여러 번 여행했어. 사막은 모랫바람이 불어서 길이 바뀌기 때문에 전에도 여러 번 길을 잃었어. 그때마다 나는 동쪽으로 갔어. 오늘 아침에 해 뜨는 거 봤지? 우리는 정확하게 동쪽으로 가고 있어. 우리는 거의 사막 끝에 와 있는 거야.”
아버지는 한 번도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아들의 마음에는 ʻ목말라요. 피곤해요. 걸을 수가 없어요. 지쳤어요. 우리는 죽을 거예요ʼ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마음에는 평안, 기쁨, 소망, 거룩함이 있는데, 아들 된 우리에겐 불안, 추함, 더러움, 고통이 있다면 하나님이 당신의 것들을 우리 마음에 넣어주시기를 얼마나 원하시겠습니까?

어떤 눈으로 보는가?

이 이야기에서 아들의 마음은 현재 우리의 믿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마음의 세계는 그냥 형성된 게 아닙니다. 마치 비가 내리면 땅으로 흐르면서 물길이 형성되듯이, 사단은 여러분이 욕망과 쾌락을 따라 하나님과 상관없이 흘러가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욕망, 근심, 두려움,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얼마쯤 가다가 아들이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아들이 무덤을 보더니 기가 죽었습니다. “아버지, 우린 이제 끝장이에요. 여기 묻힌 이 사람도 틀림없이 우리처럼 길을 잃고는 목이 말라 죽었을 거예요. 우리도 이렇게 죽을 거예요. 우리가 죽으면 누가 엄마에게 알리고 동생들은 어떻게 살죠?”
아버지가 아들의 등을 두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우리는 이제 살았어. 생각을 해봐. 무덤에 묻힌 사람이 네 말대로 길을 잃고 목이 말라 죽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묻을 수 있니? 누군가가 묻어 주었을 거야. 무덤이 있다는 것은 인가와 가깝다는 이야기야. 항상 무덤은 인가 곁에 있어. 마을 가까이 왔다는 말이야. 이제 우린 살았어!”
똑같이 무덤을 보았지만 아버지가 보는 눈과 아들이 보는 눈은 전혀 달랐습니다. 절망은 절망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하고, 소망은 소망의 눈으로 사물을 보게 합니다. 기쁨은 기쁨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고, 슬픔은 슬픔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욕망에 치우치면

저는 어제 문 장로님 병원 개원식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제가 문 장로님께 나이를 물어본 뒤, 장로님 동갑 중에는 마약 중독자도 있고, 노숙자도 있고, 알코올 중독자도 있고, 재소자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문 장로님도 그들 중 하나같이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의사가 되었으니까 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려고 하지 말고 의술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려 봉사하시라고 당부했습니다.  
미국 초창기에 경제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과 전혀 다른 정신으로 일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돈을 많이 벌려는 욕망으로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식당을 경영할 때 처음에는 만 원짜리 식사를 만들기 위해서 팔천 원짜리 재료를 씁니다. 그러다 장사가 잘되면 칠천 오백 원으로 단가를 낮춥니다.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가 무너진 이유도 그런 정신으로 건축을 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가보니까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식당을 경영하더라도 돈을 벌기보다 사람들이 식당에 와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면 그것에 더 만족합니다. 죽을 때도 재산을 아들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며 하나님께 다 드립니다.  

마르다의 완강함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3~27)
마르다는 이론으로는 예수님을 잘 알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 오빠는 죽었어. 이제 끝장이야. 다시 살 수 없어’라는 마르다의 생각을 예수님이 ‘아니야. 너의 오빠는 다시 살아날 거야. 내가 살리러 왔어’ 하는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지만 끌려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저는 제 생각 속에 있다가 예수님의 생각으로 이끌림을 받아 예수님과 제 마음이 하나가 될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과 제 마음이 하나인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예수님이 아름답게 이루실 줄을 믿게 되고 또 예수님이 이루어주시는 것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당신과 동행하고 사랑을 나누는 터전으로 만들어 놨는데, 우리 마음이 갖가지 음란하고 더럽고 가증한 욕망으로 어지럽혀져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나는 너의 마음을 통해 일을 하고 싶어. 너에게 은혜를 베풀고 싶어. 너를 정말 복되게 하고 싶어.’ 그래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 마음의 위치를 움직이려고 하십니다.

의롭다고 판결하셨지만

저는 예전에 교도소에서 성경공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죄수 중에는 판사의 재판을 이미 받은 기결수와 아직 받지 않은 미결수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일 가능성이 있어서 교도소에 잡아두었다가 재판장이 선고하면 그때 정식 죄인이 되지만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죄도 여러분의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재판장이신 하나님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간음을 하고 도둑질을 했으니까 죄인이다’라며 자기가 판단을 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읽다 보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바꾸시려고 합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끝냈어. 너는 의롭고 깨끗해.’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으니까 나는 죄가 없구나’ 하며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사람 속에 살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수천 년 전이나 수천 년 후도 동일하게 보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아들 예수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를 깨끗하게 씻어놓은 것을 보고 의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밖에 못 보니까 ‘내가 오늘 도둑질했는데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겠어?’ 하는 생각에 매여 있는 겁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저는 구원받은 1962년에 선산읍교회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성가 연습을 마치고 청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난 죄 때문에 굉장히 고통스러워 고민을 많이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다.” 그랬더니 다른 동료들이 “박 선생, 나도 죄 때문에 고통스럽다. 어떻게 해야 되나?”라고 했습니다.
제가 구원받았다고 며칠 동안 말하고 다녔더니 교회에서 저를 이단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 청년들이 모여 있는 방에 들어가려고 제가 문고리를 잡았는데 안에서 누군가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박옥수 그 녀석, 진짜 웃기는 녀석이야. 내가 자기를 아는데 자기가 죄가 없다고?”
사실 저는 그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 친구하고 저하고 똑같이 남의 집 사과 서리를 했는데 제가 죄 없다고 하니까 진짜 웃기는 인간으로 보는 겁니다.
저는 죄를 짓지 않은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그 죄의 형벌이 끝났기 때문에 저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겁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죄를 씻으려고 한평생 발버둥쳐도 안 되지만 말씀을 믿으면 죄 사함 받는 건 굉장히 쉽습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을 이끄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건진  것뿐 아니라 우리의 병과 질고, 슬픔과 문제도 전부 해결해 주셨습니다. 내 죄가 사해진 걸 믿듯이 예수님께서 하신 그 말씀이 마음에 믿어지면 삶에 대해서도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끄시니까 내가 내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쳐야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제가 최근에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나가니까 어릴 적 같이 지냈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그 친구들을 한 번씩 만나 이야기해보면 그들과 제가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친구들에게 있는 어려움과 고통이 제게도 있지만, 그들이 그것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해도 저는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어려움을 다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아들에게 물려준 재산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노후에 제 아들에게 신세지려는 마음도 없습니다. 제 고모님은 장로교회 권사인데 늘 저에게 말씀하십니다. “박 목사, 너 큰 교회 목사지? 월급 얼마나 받나? 월급 받아서 저축해서 아파트 사 놔라. 너 교회에서 은퇴하면 불쌍하다.”
저는 지난 40년 동안 저를 지켜 오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저는 아무것도 쌓아둔 게 없습니다.

신앙은 말씀을 따르는 것

제가 오늘 아침에 손자와 성경공부를 하면서 손자에게 질문했습니다. “항주야, 집 안에 있는 유리창의 틀이 무엇으로 되어있는지 아니?” “나무요.” 유리창의 틀이 알루미늄이지만 나무무늬 필름을 붙여놨으니까 초등학생인 손자가 으레 나무로 안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문을 열고 밖에 나가서 다시 밑을 한번 봐” 했더니 그리해 보고는 나무가 아니라는 걸 이해했습니다.
“네가 보기에는 나무지만 실제로는 알루미늄이야. 네가 보는 게 다 옳은 게 아니야. 사람들은 이렇게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온전한 하나님을 믿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볼 때 옳아도 하나님이 틀렸다고 하시면 틀린 거야. 네가 볼 때 죽었어도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시면 그건 산 것이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네가 본 것보다 훨씬 정확하다는 걸 믿어야 돼.”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맞으면 믿고 안 맞으면 대충 넘겨버리기 때문에 우리 속에 하나님이 힘 있게 일하실 수 없었습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예수님이 “오빠가 죽은 게 아니야. 네 오빠는 다시 살아 나. 걱정하지 마” 하는 마음을 전했지만 마르다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의 계산과 이론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믿지 않아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요 11:39)
우리가 볼 때는 냄새가 납니다.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어떻게 살리겠습니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그분은 죽은 오빠를 살린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게 자신과 장래, 두려움과 근심을 맡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제가 손자에게 이야기하듯이 여러분에게도 말하고 싶습니다. “이 창문의 틀은 나무로 보이지만 나무가 아니라 알루미늄입니다. 여러분이 보는 것 중에는   틀린 것이 많습니다.”
저는 육십 평생을 살았고 목사지만 제 판단이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경험한 게 옳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 마음이 달라지고 하나님이 제 속에 살아 일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자신을 드리면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판단을 믿지 말고 성경을 믿읍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으면 여러분의 삶이 복되고 영광스럽게 변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환율이 점점 올라가고 있습니다. 외국에서 우리나라를 위험하다고 보고 우리나라에 있는 달러를 빼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경제정책을 잘못 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똑똑한 사람이라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잘못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인생을 계획해 살았을 때보다 제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하나님이 저를 복되게 이끄시는 걸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육신의 욕망이나 사단의 이끌림을 받아서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여러분 자신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의 일생을 이끄실 주님 앞에 여러분 자신을 드릴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역사하기를 시작하고, 여러분의 판단이 아닌 주님의 은혜가 나타나면 가정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힘 있게 복음을 전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 2008.10.19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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