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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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자는 누구인가?
2008.8.31 주일 낮 설교 - 221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8.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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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을 앓던 어떤 자매

저는 얼마 전에 거창에 있는 한 자매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은 몸이 굉장히 안 좋아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한 번도 꺾어 본 적이 없으니까  ‘아무도 내 병은 몰라. 나는 죽을 거야’라는 마음에 젖어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님에게 요한복음  5장의 38년 된 병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일 자매님 같으면 예수님이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을 때 그렇게 했겠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신은 내 사정 모르니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걸어갈 수 있어? 나는 걷지를 못해’ 하지 않았겠냐고 했더니 아마 그랬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매님, 병보다 마음이 중요해요. 잠언에는 사람의 심령이 그 병을 능히 이긴다고 기록돼 있어요”라고 제가 덧붙였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자신의 문제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볼 때도 그게 여러분의 문제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안에 주님이 계신다면 자신이 부딪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내 주인이시니까 예수님이 이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을 따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마음이 먼저 벗어나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형편을 자기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건 안 돼. 이건 절망이야.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전도를 못해. 나는 가난한데 어떻게 연보를 해?’ 하는 생각 속에 갇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상황을 보고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 마음에도 나사로가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먼저 마리아와 마르다 마음속에 죽어있는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계속해서 마르다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지막 날 부활에는 살 줄 내가 아나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네, 믿습니다” 하면서도 마르다 마음속의 나사로는 여전히 죽어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가 절망이나 어려움 속에 빠져 있을 때, 그것을 해결하시기 전에 먼저 제 마음을 절망과 어려움에서 끄집어내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이 거기서 벗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걸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니 형편이 어렵고 불가능해 보여도  ‘이건 형편이야. 사랑하는 주님이 하시면 이건 문제가 안 돼’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제가 거창의 그 자매님과 상담한 후 그 자매님의 건강이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전에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하고 알부민 주사만 맞으며 살았는데, 그 후로는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수양회에도 와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은 제 말을 들으면 자신이 낫겠다는 믿음이 생기다가도 한동안 상담하지 않으면 ‘낫긴 뭐가 나아. 나는 안 돼. 박 목사님이 의사도 아닌데 내 병을 어떻게 알겠어?’ 하는 자기 생각으로 마음이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난주 실버수양회에 가서 그 자매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 갔다 오면 그 자매님이 나아서 뛰어다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자매님과 같은 처지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을 온전하게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면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는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그런 분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다가 마음이 죽음 쪽으로 기울어지면 죽고, 믿음 편에 서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나는 역사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심장병이 깨끗하게 낫고

저는 어릴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습니다. 군대에서 유격훈련받을 때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유격훈련 하기 전에 ‘올빼미 체조’라는 걸 하는데, 그때 물을 수통으로 열 번도 더 마셨습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힘없이 비틀비틀하면서 제 몸이 마비된 적이 있었습니다.
50살을 넘기면서 심장이 나쁘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나타났습니다. 아무리 계산해도 2년 더 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제가 있던 대전한밭교회는 건물에 돌 붙이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제가 2층 발판 위에 올라갔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던지 2층에서 내려오지를 못했습니다.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 굉장히 힘들었는데 ‘내가 앞으로 2년 밖에 더 살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을 거기 두지 말고 한국으로 데려올까?’ 하며 여러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1999년 페루 리마에서 집회할 때는 거의 죽는 줄 알았고 매일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하나님이 제 심장을 깨끗하게 고쳐주셔서 이번에 아프리카도 다녀오고 대덕수양관에서 실버수양회와 사역자수련회도 했습니다. 지금은 10년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와 ‘둘째 아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누가복음 10장에는 강도를 만나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구원받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무슨 일을 어떻게 했습니까?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와 정말 비슷합니다.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탕자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했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1~32) 그는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죽게 되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눅 10:33~34) 이 구절에서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도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도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봉사해서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잘하고 당당하고 떳떳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련하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겁니다.
우리는 다 죄 아래 있고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단은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받는 위치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잘난 것처럼,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할 것처럼 마음을 끌어가기 때문에 은혜와는 정반대의 방향에 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거나 무시받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 잘한 것을 보이고 싶어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때도 떳떳하고 잘난 것을 내세우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했으니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마음은 성경과 정반대 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누가복음 10장에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고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그를 돌보아 주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아버지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았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면 은혜를 입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자주 주님께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저는 성경을 잘 못 읽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는 기도를 잘 못합니다. 기도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지난주에는 대덕수양관에서 사역자 수련회가 있었습니다. 사역자들이 간증도 하고 제가 말씀도 전하고 잘못을 책망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문제도 의논했습니다.
수련회를 마칠 때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하나님, 이 엄청난 복음의 일을 제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는 마음을 가지는 걸 보면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소망 없는 자가 되었을 때

누가복음 10장의 강도 만난 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면서 ‘열심히 사업 하면 돈 많이 벌 수 있어’ 하며 자신만만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열심히 돈 벌겠다고 결심하면 돈을 벌 줄 압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기도할 수 있을 줄 믿고 열심히 전도하고 충성하려고 하면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눅 10:30~32)
그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갈 때는 꿈과 소망을 가지고 갔는데 강도를 만나 그 꿈이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을 직접 가 보았는데, 그곳에서 쓰러지면 나무 한 그루도 없고 햇볕도 너무 뜨거워서 쓰러진 사람을 그냥 놔두면 타 죽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지나가기에 도와줄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도와주길 기대했는데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죽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벌거벗겨져 드러누워 죽어가고 있는데 체면이나 자존심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난 겁니다.

내 마음의 위치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마음을 한번 되돌아봅시다. 현재 예수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내가 이 사람의 일을 해결해 주어야겠다. 아니면 이 사람이 죽겠구나’ 하고 주님이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위치에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과는 너무 먼 곳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더 잘해서 하나님 앞에 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신앙을 거꾸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신앙을 잘한다고 믿던 서기관, 바리새인, 대제사장, 율법사, 성전 맡은 자 모두 아무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이 사장이나 대학교수, 박사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의 영혼을 보면 탕자나 강도 만난 자처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실 때에 정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만큼 부족하고 추하고 연약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돕지 아니하시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강도 만난 자나 둘째 아들과 같은 사람인가?
아마 대부분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누더기 입고 돌아오는 둘째 아들은 아니야. 나는 강도 만난 자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위치는 아니야. 그래도 나는 배운 것이 있고 잘난 것이 있고 좋은 직장이 있으니까 괜찮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능력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무엇이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밀게 하십니까? 무엇이 기름과 포도주를 붓게 하고  당신이 타야 할 짐승에 우리를 태우게 하십니까? 무엇이 우리를 주막에 데려놓고 돌보아 주게 하십니까?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손과 발을 움직여 우리를 위하여 일하게 하십니다.
제가 선교학교를 시작할 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몰라 막막했습니다. 극동방송에서 방송을 하게 되었을 때, IYF를 시작할 때, 교회를 시작할 때, 하와이에서 글로벌캠프를 시작할 때, 이번에 아프리카 월드캠프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에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면 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은혜를 베풀어 우리는 그 일을 온전히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전에 아주 형편없으면서도 똑똑하고 잘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제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눈을 빌려주셔서 지금까지 내가 보는 나 아닌, 하나님의 눈에 비췬 나를 보니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는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제게 긍휼을 베푸시고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흙덩이에 불과한 ‘나’

몇 년 전 아프리카 케냐에 갔을 때, 저녁 설교를 마치자 피곤하고 열이 나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요즘 내 몸이 왜 이렇지? 틀림없이 말라리아야. 내일 아침 해가 뜨면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아파 잠이 오지 않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제가 죽은 뒤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건강하다고 해도 30년이 지나면 죽어 흙이 되겠구나. 내가 흙이 되면 사람들이 와서 침을 뱉고 소변을 본들 불평할 수 있겠나?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그렇게 될 수 없는데, 내가 말라리아에 걸려도 주님이 죽게 하시지 않으면 안 죽겠구나. 흙덩이인 이 몸을 너무 존귀하게 여겼구나.’ 주님 앞에 무척 송구스러웠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하나님이 새 힘을 주셔서 몇 시간밖에 잠을 못 잤지만 몸이 가벼워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구나.’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열심과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하면 잘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을 못하는 겁니다. 진정한 신앙은 나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손길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 때 가능합니다.  

사고도 아름답게 해결하시고

이번에 케냐에서 있었던 월드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말라위에서 오던 버스가 탄자니아 국경을 지날 때쯤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버스 뒤에서 오던 트럭이 버스를 추월하려다가 트럭 운전사가 죽고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다쳤습니다.
마침 사고 난 근처에 케냐교회의 쟈스민 자매가 살고 있는데 그 자매가 손을 써서 다친 사람들이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말라위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라위 선교사로 있는 양덕만 선교사님이 미리 케냐에 와 있었는데 급히 탄자니아로 달려갔습니다. 선교사님이나 말라위에서 온 모든 분들의 마음이 녹으면서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되니까 하나님이 교통사고를 아름답게 해결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변화를 입고 새로워지는 것을 볼 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누구에게 복을 주시는가?

여러분,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복을 주십니까?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에 와서 돌보아 줍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데나리온을 내어주면서 그의 장래까지 책임져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의 마음을 기록한 겁니다.
저는 이번에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대학생과 목회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무척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데 하나님이 긍휼을 입혀 주셔서 천 가지 만 가지를 도와주시는 걸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은 너무 약합니다. 작은 병균 하나 못 이겨 죽을 수도 있고 여태까지 잘해오다가도 어느 날 아침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는 겸비한 마음을 가졌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일생을 맡아서 책임져 주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보십니까, 불쌍히 여김을 받을 사람으로 보십니까?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담당하시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복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 2008.8.31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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