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세계’로 옮겨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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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세계’로 옮겨져야
[사도행전 3장 1절 ~ 10절] 2009.4.19 주일 낮 예배 - 254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9.05.01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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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웠던 맨해튼 집회

저는 지난 한주간, 하나님의 은혜로 뉴욕 맨해튼 센터에서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작년 가을 매디슨 스퀘어 가든 집회를 마친 후, 맨해튼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구원받아 그곳에 교회가 개척되어 더욱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이번 집회에 많은 미국인들이 와서 말씀을 아주 진지하게 듣는 것을 보며 그들이 청교도 후손이라는 사실이 실감났습니다. 미국인들이 말씀 앞에 겸비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신앙교제 나누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구원을 받으면 맨해튼 교회 형제자매가 지금의 배로 늘어날 것을 생각할 때 주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금요일 저녁에는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했는데 ‘4월에 웬 크리스마스 칸타타야?’라던 사람들이 음악회에 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행복했습니다. 2주 전에는 독일에서 집회를 하고 지난주에는 미국에서 집회를 했는데, 이번에는 전도자들과의 신앙교제도 좋아서 꼭 휴양을 마치고 돌아온 기분입니다.

자기를 믿었던 베드로

오늘은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고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의 베드로와 부활하신 이후의 베드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지금까지의 베드로가 아닌 새로운 베드로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만찬석에서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 했을 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언정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큰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시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또다시 큰 소리쳤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자기를 믿는 마음으로 한 말입니다. ‘나는 안드레, 요한, 야고보와는 달라. 나는 배와 그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어’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후, 신앙생활하면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는데도 실제로 여러분 삶 속에 주님이 힘 있게 일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에 어려움이 있는데 그 어려움을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왜 그럴까요? 여러분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다면 어떤 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정확하게 배우면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셔서 예수님과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 됩니다.
문혜진 자매는 아프리카 가나 교회 예배당 공사 중에 척추를 다쳐 마비되었던 다리의 감각 신경이 되살아나 발걸음이 떨어져 걷게 되었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다시 걷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저는 혜진이가 못 걷는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래서 혜진이 부모 앞에서도 떳떳했습니다.
혜진이가 단순히 걷게 된 사실이 감사한 게 아니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이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능력으로 살아서 일하고 계신 사실이 무척 감사했습니다.

마음의 선을 넘어야

사도행전 3장은 우리 삶에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걷지 못하는 게 분명하지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달려가려고 하면 슬며시 ‘만일 내가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을 때 자리를 들고 걸어가지 못하면 창피하잖아’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런 마음의 선을 넘지 못해서 신앙을 어려워합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것을 바라보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려고 하면 ‘만약 내가 믿음으로 살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연보했다가 생활이 어려워지면 어떡하지? 주님을 섬기다가 남에게 부끄러움 당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섬기고 싶다가도 사단이 넣어 주는 생각이 커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마음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믿음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베드로

‘자기를 믿는 사람’과 ‘자기가 무너진 사람’의 차이가 여기서 생깁니다. 자기 마음을 높여 자기가 주인이 되면 그때부터 신앙생활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한 가지 뛰어난 것만으로도 우리 마음을 높이도록 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마음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의 결정을 따르면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거스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능력 있는 하나님의 큰 종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믿는 마음이 무너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는 것은 베드로가 자기를 믿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네가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할 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말했으니까 그 말에 매여 주님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아예 도망갔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고 주를 따라가다 보니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닭 우는 소리를 들은 그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통곡하였습니다.

‘나’라는 세계를 벗어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간의 힘이 무익한 것을 알게 하시고 자신을 믿는 마음이 무너지게 만드십니다. 이사야 55장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이 무너지면 주님과 한마음이 되지만 우리 마음이 견고하게 세워진 상태로는 절대로 주님과 한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삶과 나 자신 안에 머무르는 삶,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알을 깨고 나와야 새가 되고 고치를 벗고 나와야 나비가 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라는 세계를 벗어나지 않고 는 결코 예수님 안에서 나오는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과 마음이 상할 일을 주시고 절망으로 몰아가서 결국 내 생각의 세계를 벗어나 예수님의 생각 안에 머물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구원받고 난 후 이 믿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기’라는 세계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면 여러분은 굉장히 놀라운 사람으로 변할 것입니다.

마음의 판단을 할 때

우리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성품으로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판단하는 ‘내 마음의 세계’가 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예수님 마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세계 속에 사는 사람은 구원받고 교회 다니고 기도해도,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날 때 자기가 결정하고 처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 속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결정한 것을 따르므로 무슨 문제가 일어나도 자기 책임이 아닌, 예수님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지만 그 삶이 전혀 다릅니다.
구원받을 때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어떤 마음의 판단을 하느냐 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때 나의 모든 죄가 십자가의 피로 눈과 같이 희게 씻어졌다는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모든 죄에서 해방을 받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죄인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내 죄가 눈처럼 희어졌다면, 내 생각의 세계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나는 죄를 짓잖아. 양심이 있지,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주님이 내 죄를 눈처럼 희게 씻었고 내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 내 죄가 씻어졌어. 할렐루야! 주를 찬양해’라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로 옮겨져야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까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습니다. 앉은뱅이가 ‘나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라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걸어? 말도 안 되는 소리야!’라고 생각하면 결코 걸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앉은뱅이가 자기 생각의 세계에서 나와야 걸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신앙은 내가 무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의 세계 속에서 벗어나서 예수님 생각의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와 믿음’이라고 합니다. 내 생각이 옳은 것 같고 뛰어난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망한다. 이제 내 생각 따르지 말고 예수님 생각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사했다는 것을 믿고 죄 사함은 받았는데 왜 예수님이 내 속에 일하시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세계와 내가 일하는 세계가 따로 있는데, 여러분이 가진 마음의 세계 속에서는 여러분다운 일밖에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세계로 내 마음이 옮겨져야 예수님이 일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이끌어 가는 사단

베드로는 늘 자기를 믿었습니다. 주님이 “너희가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 저희가 예수님을 버립니까?” 해야 하는데 “다 주를 버려도 저는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시면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말씀처럼 성경은 베드로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존재가 ‘사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눅 22:31)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은 영물이기 때문에 베드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끌고 다니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를 유익하게 한다는 생각에 속아서 사단에게 이끌리는 삶을 삽니다. 사단은 예수님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지 못하고 내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므로 내가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꼭 안 될 것 같은 마음의 시험을 줍니다.
 

내 모든 게 주님의 것

저는 성경을 보면서 금전에 대해 정확하게 배웠습니다. 제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돈을 주시고 제 삶을 이끄시는 것을 아주 명백하게 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분명히 마음의 선이 필요한데,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돈을 모으려 해도 하나님이 부요케 하지 않으면 절대 부요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을 품은 것 같아서 중년에 다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돈을 천원 줬을 때 이걸 내 돈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위해 쓰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쓸 때는 전혀 다릅니다. 만 원이든, 십만 원이든 주의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쓰고, 제 모든 게 주의 것이라고 확실히 믿고 사는 동안 하나님이 제 삶을 아주 은혜롭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때는 제 마음과 주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겁니다.
최근에도 그런 경험이 많은데, 저희 선교회는 아프리카 케냐에 방송국을 개국했습니다. 4월 말 시험 방송에 앞서 방송장비가 필요한데 주님이 장비를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돈을 다 채워주시는 것을 보면서 주님께 무척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 누리는 자유

한번은 제 귀가 쿵쿵 쑤시고 물이 나오면서 아팠습니다. 그때 의사가 귀의 고름이 뇌로 들어가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 말이 문득 생각나서 기도하다가 주님 앞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몸은 주의 몸이고 내가 죽고 싶어 죽는 것도 아니고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니다. 주님이 오늘이라도 오라 하면 가야 하고 또 죽고 싶어도 주님이 죽지 말라고 하면 못 죽는다. 주님이 내 귀를 필요로 하시면 낫게 하실 거고 내가 귀머거리 되어서 주님께 영광이 된다면 나를 귀머거리 되게 하실 거다.’ 그 마음이 드니까 정말 자유로웠습니다. 예수님 마음의 세계 안에 나를 맡기니까 채 30분도 안 되어서 금방 제 귀가 나았습니다.
저는 제 삶 속에서 예수님 마음의 세계와 제 마음의 세계가 있음을 압니다. 제가 제 마음으로 했던 일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다 망한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나서부터는 제 마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내가 나를 위하고 지키려 하다가도 ‘이건 나를 위하는 게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위하셔’ 하는 생각이 들면 내가 가진 마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예수님 마음의 세계로 들어가니까 예수님이 무슨 일이든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마음을 같이하면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후에 베드로가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전에 같으면 돈 몇 푼 던져주고 갈 건데, 예수님의 마음이 일을 하니까 “우리를 보라!”고 외쳤습니다. 앉은뱅이가 ‘저 사람이 얼마나 많은 돈을 주려고 쳐다보라고 하나?’ 하고 쳐다봤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며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키니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에는 은, 금이 중요했지만 이제 베드로에게 가장 큰 분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죄인이라는 내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었지만, 내 생각에서 나와서 내가 의인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을 때는 내 생각을 따르지 않고 말씀을 믿었는데, 그 후의 삶은 내가 이끌어 나가고 나를 지키려 하다 보니 기도가 안 되고 전도하는 것이나 연보하는 것도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마음을 같이하면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 전부를 주장하시고 내게 어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다 해결해주십니다.

베드로를 이끄셨던 주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서 베드로가 일을 해야 하므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나는 죽고 부활해서 승천하지만 네가 내 마음의 세계에 들어오면 나처럼 될 수 있어”라고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안에 살아 계셔서 우리가 예수님 마음으로 살면 우리는 모두 ‘작은 예수’가 되고 우리 삶의 모든 문제를 그 예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단에게 속아서 자기를 지키려고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망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예수님의 행하는 일을 보면서도 자기는 잘 하고 옳은 줄 믿고 자기 세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그날 진짜 형편없는 자기 자신을 깊이 깨닫고 느끼며 자기가 다 무너졌습니다. 그때 갈릴리 바닷가에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베드로야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놀랍게 변하고 새로움을 입어 하나님의 능력의 이끌림을 받게 된 것 같이 지금도 사랑하는 주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이끌고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열왕기하 5장에 나오는 나아만의 계집종이 비참한 종으로 있다가 대접받는 장군의 딸처럼 되고, 요셉이 죄인으로 감옥에 있다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은 일 등 모든 일이 사랑하는 주님에 의해서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안에 들어와서 자신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삶은, 교회생활을 하지만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삶과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도 베드로처럼 자기 생각으로 사는 삶을 끝내고 예수님 안에 들어와 예수님이 이끄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사단은 항상 우리가 잘나고 똑똑하고 옳다는 생각을 넣어 주는데, 그 생각 속에 빠져 있으면 결국 우리는 패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서 예수님의 생각을 여러분 마음속에 받아들이십시오.
나쁜 신장을 끊어 버리고 좋은 신장으로 이식하듯이 여러분 마음을 주의 마음으로 이식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모든 부분에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로 간증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복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 2009.4.19 주일 낮 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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