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려 실로암으로 간 소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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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려 실로암으로 간 소경처럼
2008.4.27 주일 낮 설교 - 203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8.05.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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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통해 힘을 얻고

저는 성경을 읽으면 자주 마음에 힘을 얻습니다. 4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이 해결하지 못하시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제 앞에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을지라도 ‘나에겐 예수님이 계시니까 이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문제야. 주님은 이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수 있어’라는 생각이 제 마음을 가볍게 해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주님이 이루시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저는 20년 전쯤 충북 영동 송호 솔밭에서 여름수양회를 했던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때 점심시간쯤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물이 불어날 것 같으니  강가에 세워 놓은 차를 옮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솔밭에서 수양회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도 많이 안 왔는데, 왜 물이 불어난다고 할까?’라고 생각했지만 관할경찰서에서 지시를 하니까 차를 전부 높은 곳으로 옮겼습니다.

홍수를 겪으며

그날 저녁, 경비하는 형제들에게 강가에 말뚝을 박아 자를 세우게 하고 경계수위와 위험수위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경계수위가 되거든 밤이 암만 깊어도 나를 깨우고 위험수위가 되거든 목회자들을 모두 깨워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저녁 설교를 마치고 강물을 보니 물이 얼마나 늘었는지, 경계수위와 위험수위는 이미 넘었고 수위를 재는 자도 떠내려 가버렸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비가 막 쏟아지면서 강물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텐트를 쳐서 상황실을 만들어 놓고, 강가에 다시 자를 세워두고 10분마다 물높이를 무전으로 상황실에 연락하게 했습니다.
“1시 10분 현재 10cm 늘었음”이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10분에 10cm씩, 그러니까 1시간에 60cm씩 물이 늘어나는데, 제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강물이 텐트 가까이까지 불어났는데 비가 계속 쏟아졌습니다. 그래서 비상대피 계획을 세웠습니다.
먼저 “형제 자매님들, 만일 비가 많이 와서 대피해야 한다면 방송을 할 테니 그때까지 안심하고 주무십시오”라고 방송을 했습니다. 그 다음엔 텐트 구석구석마다 차를 세워서 혹시 정전이 되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켜서 대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전도자들을 전부 불러서 구역을 나누어 비상시엔 텐트 안에 있는 사람을 다 깨우도록 준비 시켰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나

다시 물가에 가 봤더니 물이 찰랑거리며 늘어나는데 그 소리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차 안에 들어가 혼자 고함을 지르면서 “주님, 이 밤을 넘기게 해주십시오. 이 밤을 주님이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가, 본부 상황실로 갔다가 물가에 가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강 가까이에 청년 자매들 텐트가 모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자매들이 잠꼬대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자매들이 우리를 믿고 저렇게 깊이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웠습니다.
“새벽 2시 30분 현재, 5cm 늘었음.” 늘어나던 물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그 말이 제게 무척 소망스러웠습니다. 날이 밝으면 강물이 불어도 대피하는 것은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4시 반쯤 되니까 먼동이 트기 시작하는데, ‘이제 살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처럼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반가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5시 반이 되니까 제일 낮은 곳에 있는 텐트 밑바닥까지 강물이 올라왔습니다. 그래도 형제 자매들은 편안하게 있었습니다. 텐트를 위쪽으로 옮기려고 젊은 형제들을 모았더니 금방 200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6시 10분 현재 10cm 줄었음” 하는 보고를 받아서 텐트를 옮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일만큼 가슴을 졸여본 적도 없지만 우리 교회 형제 자매들이 진짜 고마워서 큰절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밤에 한 사람이라도 “사람들이 떠내려갈지도 모르는데 당신들은 앉아만 있어요?” 하며 소리지르면 다른 사람들도 군중심리에 의해 동요해서 질서가 안 잡히게 될 겁니다. 그러면 수천 명을 어떻게 보호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성도를 생각하면 저는 무척 감사합니다.  

무익한 인간의 행위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으려고 했습니까? 선한 일을 하고 율법을 지키고 충성하고 십일조 내는 등 자신이 뭔가를 잘해서 구원을 받으려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한다 해도,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내가 행한 것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우리가 무엇을 하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더러운 죄를 범한 인간이 한 것을 전혀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유일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려면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그분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나는 무익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며 자신을 부인하는 시점에 도달해야 합니다.

누가 복을 받는가?

여러분, 4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한다며 죄 짓지 않고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유대인, 제사장들은 예수님과 마음이 멀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생각을 꺾지 못하고 자기 주관대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겁니다. 반면에 추하고 더러운 악을 행한 사람들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신앙생활할 때 수칙이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연보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라는 법보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신앙이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너지면서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왜 이혼을 합니까? 욕망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돈 쓰고 싶고 술 마시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면 견디지를 못합니다. 화나거나 불편하면 그것을 다 나타내니까 그것이 부부 사이에 문제가 되고 가정에 어려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받으면 예수님이 그런 마음을 녹이고 꺾어주기 때문에 제가 주례를 한 우리 교회의 부부들 가운데서 아직까지 이혼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

지난주에는 송파 여성문화회관에서 집회를 했는데, 여성문화회관이라서 성경에 나오는 여자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사마리아 여자는 ‘어떤 낯선 남자가 나를 희롱하네?’ 하는 식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생수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가지만 하나하나 물어가면서 그 말씀을 마음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여 이런 물을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님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그 여자는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는데, 자신의 진정한 남편이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 결혼할 때는 자기를 사랑하고 위해 주고 짐을 대신해 주는 남편을 원했는데, ‘이 사람은 나의 참 남편이다. 나를 쉬게 하고 내 마음의 마른 목을 축여 주었네!’ 하는 남자가 여섯 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셨을 때 그 여자는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도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나는 정말 내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인가? 아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제 기준으로 볼 때 ‘난 그래도 내 아내가 부탁하면 힘들어도 그 부탁을 들어주려고 해. 난 남편으로서 이것저것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 나오는 것처럼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서 신부 된 교회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가시관을 쓰신 그 사랑에 비하면 저는 가짜 남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여자는 많은 남자들에게 상처를 입고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을 때도 “세상에! 그런 물이 어디 있어요? 그건 말도 안 돼요”라고 하지 않고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시점

여러분, 정신세계가 어떻게 성장하는지 아십니까? 이 세상은 너무 악하고 무섭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을 못 믿고 자신만을 믿고 삽니다. 자기 생각이 다 옳은 줄 알고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박사나 교수, 기업가가 되면 남들은 자기처럼 못하니까 ‘나는 이렇게 해서 성공했어’ 하며 자신을 믿는 마음이 더 강해집니다.
남에게 한두 번 속은 사람은 남을 믿지 않는 만큼 자신을 믿는 마음이 커집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니고데모처럼 자기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버립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시점에 이르려고 하면 인간의 생각이 ‘저건 아닌데’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밀어내려고 하는 거지요.
하지만 사마리아 여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결혼에 실패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남자가 내 마음에 평안과 행복을 줄 거야’ 하고 믿었던 남자들에게서 행복과 평안을 찾지 못하니까 자기를 믿는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자기 생각을 돌이킬 줄 모르지만 자기를 믿는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은 자기 생각 밖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알 때

여러분, 진정한 인생을 살려면 잘해서 성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패도 해보고 자신의 무력함, 연약함, 부족함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 나와서 복을 입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결혼에 실패하거나 병이 들거나 소경이었던 것처럼, 대부분 인생에서 실패했다는 겁니다.
실패해도 자신을 믿는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인생의 참뜻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약한지 압니다. 몸 한 군데만 이상이 있어도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자, 5장의 38년 된 병자, 8장의 간음 중에 잡힌 여자, 그리고 오늘 읽은 9장의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며 형편없는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지 않으면  절망 속에서 헤어날 수 없는 인간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적당한 어려움이 필요해

제가 한번은 전주에 있는 운화바이오텍을 방문하였는데, 실험실에서 ‘또별’을 둥근 유리관에 넣고 산소와 영양을 주어 배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별은 보통 누르스름한데 자주빛이 나는 것이 있어서 제가 진영우 사장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진 사장이 설명하길 똑같은 또별이지만 스트레스를 받은 또별이 약효가 있다는 겁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괴로우니까 괴로움을 이기려는 힘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약효를 발생시킨다는 거지요.
벼를 키우는 사람들도 계속 비료를 주면 벼가 태만해져서 스스로 영양을 흡수하지 않고 주기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벼를 수확하기 전에 세 번 황기(黃氣)를 준답니다. 첫 번째 모를 심기 전에는 절대 비료를 안 주고 벼를 마르게 한답니다. 벼가 굶주리면 뿌리를 내리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를 심어야 뿌리가 잘 뻗고 벼가 강해집니다.
모를 내고 난 뒤에는 비료를 줍니다. 그러면 벼는 ‘또 비료를 주겠지?’ 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인은 비료를 주지 않습니다. ‘주인이 비료를 또 주는 줄 알았더니 안 주네’ 싶어 다시 뿌리를 뻗으려고 힘을 씁니다. 그때 다시 비료를 주면 벼가 왕성하게 자랍니다. 그러면 결국 벼가 다 익어서 누렇게 되는 겁니다.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마음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시려고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서 그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고 하셨습니다. 이 소경은 예수님이 누군지도, 실로암 못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앞도 못 보는 상태에서 그 말씀을 듣고 실로암 못을 찾아갔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져가면서 실로암 못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에게 유익한 곳만 찾아가고, 편리하고 좋은 것만 찾지 않겠습니까?
한번은 어떤 자매님이 남편과의 갈등 때문에 제게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그 자매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물론 그 자매님의 남편이 잘못된 점도 있지만 자매님의 입장에서만 말한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님에게 “자매님, 그건 자매님의 판단입니다. 남편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세요”라고 했더니 그 자매님이 제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그 자매님이 남편에게 사과했더니 둘 사이가 아주 화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형제 자매님을 보면 무척 고맙습니다. 저도 부족하고 허물 있는 사람인데,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종의 말씀이라고 순종하는 그 모습이 바로 소경이 가진,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버려야

여러분, 우리 인간은 각기 다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자기 기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려면 자신의 기준을 버리고 예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제가 우리 교회 자매님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지혜롭고 똑똑하고 많이 배운 자매님이라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할 때가 참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욕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내 아내가 나를 무시할 때는 굉장히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해도 괜찮지만 아내에게는 무시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아내가 나를 위해 주고 순종해 주길 바라는 것처럼 자매님 남편도 그럴 겁니다. 그럴 때 남편이 마음을 여는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자매님들이 마음으로 그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문제가 있던 부부 사이가 좋아지는 걸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마음이 부부 사이를 그렇게 바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만이 아니라 신앙생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속아서 신앙생활 잘하려면 자신이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 마음에서부터 신앙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조그마한 통을 하나 놓고 손을 내밀면서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소경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구걸했습니다.
하루 종일 구걸해도 동전 몇 개밖에 못 얻으니 부모님께 그걸 내놓기가 너무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래도 자식을 불쌍히 여겨 음식을 내주는 부모님을 보면서 소경은 원망했을 겁니다. ‘왜 나는 소경으로 태어나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여기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그에게는 내일이 더 좋아지리라는 소망도, 눈을 뜰 수 있을 거라는 기약도 없었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어

늘 가난하고 배고픈 삶을 살던 소경의 마음은 점점 낮아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 주님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도 “당신 누구요? 남의 눈에다 뭘 바르는 거요?” 하며 따지지 않았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지만 소경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불만도, 원망도, 기대도 죽고 귀에 들리는 음성 하나만 남았습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그 말씀만 소경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말씀이 소경의 걸음을 실로암으로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모처럼 물을 만져보았습니다. 소경은 못 보기 때문에 연못가에 가는 걸 무척 싫어합니다. 그러나 연못가에 가서 조심조심 눈을 씻는 동안 눈이 뜨입니다. 물 그림자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봅니다. ‘내가 이런 인간이었구나!’ 눈을 뜬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에 이끌릴 때

주님이 소경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지, 예수님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소망과 능력이 우리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 생각과 욕망에 끌려 다니는 삶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살아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움직여 실로암으로 가는 소경처럼, 여러분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움직일 때 여러분 앞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 2008.4.27 주일 낮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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