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미싱의 역사와 함께 한 곽병문 대표를 만나다
상태바
우리나라 미싱의 역사와 함께 한 곽병문 대표를 만나다
Goodnews DAEGU 976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3.08.19 1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싱하는 곽병문 대표

현역 최고령 미싱공… 미싱 역사의 산증인

우리나라 말로 재봉틀을 뜻하는 ‘미싱(Sewing machine)’은 일본식 발음으로 1890년대에 서양 재봉틀이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미싱’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싱은 1960년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해 1970년대에는 혼수품 필수 목록이 되었다. 지난주 기자는 현역 최고령 미싱공이자 우리나라 미싱의 역사와 함께 한 산증인 태창미싱 곽병문(83) 대표를 만나보았다. 
그의 가게에는 150년이 훌쩍 지난 미국의 싱거미싱과 6.25 전쟁 당시 영국에서 우리나라 피난민을 위해 원조해 준 영국산 미싱, 국산 브라더 미싱까지 마치 박물관과도 같은 수많은 미싱과 부품들이 발 디딜 틈이 없이 쌓여 있었다. 
그 틈에 의자 하나가 그의 작업장이자 식사와 차를 마시는 유일한 공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생계를 위해 중국에 간 부모님은 광복 직후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 서문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곽 대표는 “14세에 미싱 만드는 것이 신기해 매일 미싱 골목을 기웃거리다 기술을 배우고 싶어 처음 발을 들인 것이 벌써 70년이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산 싱거미싱

대구 섬유산업의 전성기에 ‘태창미싱’ 세워

1950~60년 당시 서문시장은 전국의 돈이 다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업이 활발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신동 미싱 골목이 있었다. 70년대 대구 섬유산업의 전성기에 곽 대표도 독립해 ‘태창미싱’을 차렸다. 그 당시 가정용 미싱은 줄서서 사갈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다. 곽 대표는 “서울에서 근무한 경력과 군 복무 시절 미싱 회사와 인연으로 물량 확보에 어려움이 없어 사업이 번창했다”며 그 당시를 회고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산의 여파로 국내시장은 얼어붙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가정용 미싱으로 옷을 만들기보다 기성복이 넘쳐나 미싱 골목도 한산해졌다. 현재 전성기 시절 80여 곳이던 골목은 절반으로 줄어 부모에게 가게를 물려받은 사람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곽 대표도 고물 미싱을 사서 수리해 팔고 있다. 그는 “미싱이 고장나 가게에 와서 고치고 기분좋게 나가는 손님들의 모습을 볼 때 보람된다”고 말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 “내년에 은퇴 예정인데 미싱 가게를 하는 동생에게 물려 주고 여생을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대구/ 한주란 기자 daegu@igoodnews.or.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