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숨은 영웅 지게부대의 호국정신
상태바
6.25전쟁의 숨은 영웅 지게부대의 호국정신
기획 전쟁터에서 식량과 탄약 나른 민간인 지게부대, 그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었다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3.07.15 09: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게부대원이 전장으로 출동하기 전 장비검사를 받기 위해 도열하고 있다 (출처:전쟁기념관)

지난 7월 5일, 6.25전쟁 때 군수물자를 날랐던 보국대, 이른바 지게부대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위령비가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세워졌다. 73년 만에 새롭게 조명된 지게부대원들의 활약과 그 공을 기리는 제막식은 백선엽 장군 서거 3주기에 진행되어 주목을 받았다.

73년만에 위령비 세워 지게부대원 공을 기려

“만일 한국노무단이 없었다면 미군은 최소한 10만 이상의 추가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6.25전쟁에서 군수물자를 지게로 나른 노무자들에 대해 美8군 사령관이자 유엔군 사령관인 밴플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이 언급한 내용이다.
지난 7월 5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다부동 전투 참전 주민위령비’가 제막됐다. 위령비는 민간인력부대인 지게부대원을 추모하기 위해 당시 국군 1사단 백선엽 사단장의 장녀 백남희(75) 여사가 사비 1200여만원을 들여 세웠다.
이날 제막식은 장맛비가 지나간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백남희 여사와 김재욱(60) 칠곡군수를 비롯해 지게부대원 후손과 칠곡군 주민들, 수많은 취재원들이 함께 한 행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했다. 백남희 여사는 제막사에서 “아버님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민들의 헌신과 희생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서거 3주기를 맞아 아버님의 간곡한 유지와 칠곡 군민들의 뜻을 받들어 지게부대원의 애국심과 애향심을 기리고자 위령비를 세웠다”고 말했다. 
지게부대 후손을 대표해 기념사를 한 경일대학교 특수군사학과 전병규 특임교수는 “다부동 전투가 있었던 55일 동안 군수물자와 주먹밥을 날랐던 지게부대원들은 매일 40~50명씩 전사했다. 이곳 다부동에서만 2800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73년 만에 위령비를 세움으로써 그 공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며 감사를 전했다. 
 

(상)다부동 전투 참전 주민위령비 앞에 선 백남희 여사와 칠곡군수(왼쪽 다섯번째) 및
주요 인사들 사진/ 오병욱 기자
(하) 보급품을 운반하는 지게부대원들 지게부대에는 10대 소년부터 60대 노인까지 있었다

16㎞ 떨어진 고지로 각종 보급품을 운반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한달 후인 7월 26일 전쟁 물자, 시설, 수송 및 인력 징집의 법적 근거가 된 비상령 [징발에 관한 특별조치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은 美8군 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의 긴급 요청에 따라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표된 것이었다. 미 육군 각 사단은 다음달 8월부터 보급품 수송을 위해 평균 500명의 민간인 노동자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35~45세의 남성으로 제한되었으나 사실 10대 소년부터 60대 이상의 노인까지 포함되었다. 민간부대의 공식 명칭은 노무단, 근무단 혹은 보국대였다. 이들은 매일 16㎞정도 떨어진 고지로 45㎏에 해당하는 보급품을 운반하고 돌아왔다. 박격포는 물론 76.2㎜의 곡사포, 탄약, 연료 등 위험하고 무거운 물품과 식량을 나르고 전사자와 부상병을 부대로 옮겼다. 이때 사용된 지게가 알파벳 A처럼 생겨 정식명칭보다 The A-frame Army, 일명 지게부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민간부대는 유엔군과 함께 온 전장을 누비며 한국전쟁을 치른 숨은 힘이었다.
한편,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전쟁터로 나선 아이들도 상당했다. 당시 8세에 자기보다 더 큰 지게로 15일간 총알을 날랐다는 도용복(81) 現사라토가(패션잡화 브랜드) 회장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기다시피 산을 올랐다. 탄약통 2상자를 왕복 3~4시간 거리의 다부동 고지에 날라다 주면 굶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먹을 수 있는 주먹밥을 얻을 수 있었다”며 같이 일하던 또래 5명 중 2명은 인민군 총에 죽었다고 했다. 

한국노무단, 최전선의 전투병력으로 활약

전쟁기간, 낙동강변 국군과 미군의 최후방어선 방어군에게 군수지원을 제공하던 민간인 수송군은 1951년 7월 14일 밴플리트 장군의 지위 아래 ‘한국노무단(Korean Service Corps, KSC)’으로 재편되었다. 
노무단은 최전선에서 전투병력이 담당해야 할 행정적·기술적인 부분을 분담해 병력을 최대한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모는 커녕 눈에 잘 띄는 무명바지, 학생복 차림이었기에 무수히 희생되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동원된 노무대원이 약 30만명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확인된 희생자만 8794명이다. 그러나 이들의 참전을 입증해 줄 공식적인 자료가 대부분 남아있지 않아 그들의 희생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6.25전쟁 동안 군인과 다름없이 전장을 누비며 전쟁 승리에 기여한 지게부대. 이날 참석자들은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단순 노동인력으로 치부되어 잊혀졌던 영웅들의 역사적 의미를 새기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며 모두 회상에 젖었다.
송미아 차장대우 miasong@igoodnews.or.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