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가 죽은 이유를 그들이 정확히 알았다면
상태바
‘나사로’가 죽은 이유를 그들이 정확히 알았다면
[요한복음 11장 17절~44절] 2023. 2. 2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952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3.03.03 22: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술을 좀 많이 마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술 때문에 병이 나서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진찰하더니 “당신은 앞으로 술을 마시면 죽습니다. 제 말 명심하셔야 합니다.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아, 그렇구나. 나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구나’ 하며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병원에 갔는데 앞으로 술을 마시면 죽는다고 의사가 말했다. 혹시 내가 술을 마시려고 하거든 꼭 말려라. 나는 이제 술 마시면 큰일 난다. 오늘부터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 “예, 아버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며칠 후 그분이 두루마기를 꺼내 입고 계셨습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께 “어디 가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오늘 친구 회갑인데 내가 가야 하지 않겠냐?” “아버지, 가지 마십시오. 혹시 가셔서 술을 마시면 어쩝니까?” “이놈아. 넌 애비를 어떻게 보느냐? 술을 마시면 죽는다는 걸 아는데 내가 술을 마시겠니?” “아버지, 그래도 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아버지의 호통에 아들은 그만 아무 말을 못했습니다. 그분은 서둘러서 잔칫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 말했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내가 며칠 전에 병원을 다녀왔는데 술을 마시면 죽는다고 했어. 절대로 마시면 안 돼. 혹시 내가 술을 마시려 하면 자네들이 말려야 하네. 오늘 안 오려다가 친구 회갑이라 왔으니 나는 술은 안 마시고 음식만 먹겠네. 그렇게 같이 놈세.” “그러세.” 그분은 술을 마시지 않고 오전 내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조금 마셔도 괜찮겠지

이제 점심을 먹고 노는데 술을 마시는 친구들을 보니 그분도 술을 마시고 싶었습니다. “여보게 술 조금만 따라 주게.” “에이, 자네는 안 마시는 게 좋아.” “요거 마신다고 죽겠나? 괜찮아. 조금만 따라봐.” “에이, 안 되네. 참아.” “아, 괜찮다니까” 그렇게 술을 조금 마셨는데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이거봐 아무렇지 않지. 조금만 더 따라봐. 반 컵만 따라봐.” “더 안 마시는 게 좋아.”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반 컵 마신다고 문제가 되겠어?” 그분이 반 컵을 마셔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술을 마셔서 해로울 거 같으면 몸에서 무슨 기별이 올 텐데 아무렇지 않네. 한 컵 따라봐.” “정말 안된다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의사가 괜히 술 못 마시게 하려고 그런 거 같아.” 친구들은 일제히 “안 마시는 게 좋을 텐데”라며 말렸습니다. 

의사의 말을 무시한 결과

그분은 “괜찮아” 하며 한 컵을 다 마셨습니다. “의사가 술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내가 이렇게 한 컵을 마셔도 아무렇지 않네. 의사가 날 속인 거야. 한 잔 더 줘봐.” 그분이 오후 내내 술을 잔뜩 마셨는데 아무렇지 않아서 너무 즐겁게 잘 놀았습니다. 그러나 저녁 무렵 집에 가려는데 속이 안 좋았습니다. “아, 속이 왜 이러지?” 친구들이 “거봐. 술 먹지 말라고 했잖아”라고 하였습니다. “나 죽겠어. 나 좀 어떻게 해봐.” 그러다가 그분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변해

전에 술을 마시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술 마시는 걸 보면 얼마나 마시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의사가 술을 마시면 죽는다고 얘기했을 때는 ‘절대 술 안 마셔. 내가 죽는데 왜 술을 마셔. 술을 마시면 100만 원을 준다고 해도 난 술 안 마셔’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합니다. 막상 잔칫집에서 술을 한 잔, 두 잔 들이키고 있는 친구들을 보니까 예전에 술 마셨을 때 즐거웠던 기분이 되살아났습니다. 분명히 술을 마시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데 그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결국 그가 술을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잔뜩 마셨습니다. 괜찮았습니다. 언제까지 그랬을까요? 배가 아프기 전까지 괜찮았습니다. 그분이 막 배가 아파서 못 견디게 몸부림치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분의 아들은 그날 아버지와 싸워서라도 잔칫집에 못가시게 했어야 했다며 후회막심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합니다. 반대로 우리 가운데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그의 마음이 의인으로 변해야 천국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마음이 변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 한평생 죄에 얽매여 고통 하다가 예수님의 피로 죄가 다 사해졌다는 복음을 듣고 무척 감격스럽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서 주님을 섬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들었다. 진짜 큰 은혜다. 이제 복음만을 위해서 살아야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다 한 번씩은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변합니다. 때론 세상이 재미있어서 주일예배를 한두 번 빠지기도 하고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때면 ‘내가 구원받을 때는 안 그랬는데. 지금 너무 육신적이고 인간적이야. 안 돼. 내 마음을 바꿔야 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시 육으로 흘러가는 게 우리 인간입니다. 

오빠 나사로의 죽음 앞에

오늘 읽은 성경을 보면, 베다니 마을에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들의 오빠인 나사로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이 안 계셔서 예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시고 돌보아주셨습니다. 어느 날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고 말씀하시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에게 “오빠, 조금만 참아. 예수님이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래. 괜찮아 질 거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이 나을 줄 알았던 오빠가 덜컥 죽었습니다. 바로 오실 줄 알았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고 나흘 뒤에야 베다니 마을에 오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맞아? 오빠가 아플 때 바로 오셔서 고쳐주시면 죽지 않았을 텐데. 죽은지 나흘이 지나 썩어 냄새가 나는데 지금 오셔서 뭘 하시겠다는 거야?’ 하며 너무나 섭섭해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섭섭함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셨는데 집안에 앉아 있었고 좀 더 인간적인 마르다만 예수님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며 섭섭함을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오빠가 살게 된다는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 오빠가 다시 산다고요? 정말입니까? 예수님,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마르다는 가만히 마리아를 불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서 마르다와 똑같이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릴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을 걸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산다는 것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고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같아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주님과 우리 마음이 다를 때가 참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형편이나 문제가 어떠하든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리에게 교회가 필요한 이유도 교회에서 말씀을 들어야 우리가 주님과 조금씩 더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구원을 받은 후 ‘예수님께서 나 같은 인간을 위해 채찍에 맞고 못 박혔으며 창에 찔리셨는데 내가 주를 섬기는 것에 망설일 것이 무엇이 있나. 내 몸이 다 없어지더라도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씩 변합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옷을 입은 것을 보면 나도 저런 옷 한 번 입어보고 싶어집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면서 좀 잘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 하게 됩니다.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그런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 주님을 향해 처음 가졌던 사랑을 자꾸 잊어버리게 되고 육신적인 삶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나중에는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것도 싫고, 바쁠 때는 교회에 나가기도 부담스러워집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어떤 마음을 갖느냐는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좀 잘 살고 편해지고 싶은 생각이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나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씩 갉아먹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주님과 멀어지면서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향 친구를 생각하며

2월 중순에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상파울루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이란 곳에서 난생처음 천주교 신자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귀국한 후 신부님의 편지를 받았는데 말씀을 전해주어 감사하다며 다시 한 번 꼭 방문해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계획하신 것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귀하며 아름답습니다.
저는 구원받고 목사가 된 후 자주 제 고향 친구인 ‘전충남’을 생각합니다. 충남이는 키가 크고 성격이 좋아 친구들이 다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아끼는 물건을 한 친구가 망가뜨려서 무척 화가 났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옥수야, 미안하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야, 미안하면 다야?” 하며 그 친구에게 짜증을 냈습니다. 그때 충남이가 다가와서 제게 “옥수야, 친구 사이에 뭐 그런 걸 갖고 그래. 내 것 줄게. 내 것이 네 것보다 훨씬 좋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충남이를 보며 저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한번씩 주님께 물어봅니다. ‘하나님, 충남이 같은 사람이 단에 서면 성도들이 보기도 좋고 행복할 텐데 왜 키도 작고, 못생기고, 성격도 까다로운 저를 구원하셔서 목사로 세우셨습니까?’ 저같이 부족한 사람을 복음 전도자로 단에 세우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오빠가 병들었다고 전하면 예수님이 달려와 오빠의 병을 금방 고쳐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빠가 죽은 다음에야 그곳에 오셨습니다. 그들은 ‘오빠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오시지 않고, 죽은 후에 오시면 무슨 소용이 있나’라고 생각해서 예수님께 너무나 섭섭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그들의 마음에 믿음을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그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를 보며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 이렇게 하시려고 늦으셨군요. 저희가 그걸 모르고 오해했습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이끌기 위하여

마르다와 마리아의 생각이 주님과 달랐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과 생각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제가 한평생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저를 구원하신 주님께 제 일생을 다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생각해도 그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육신적으로 흘러갈 때가 있고 신앙이 귀찮아져 ‘좀 쉬자’라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린 다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은 그들의 마음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한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었을 때 슬피 울며 주님을 향해 섭섭해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당하게 하실까? 왜 어려움을 주실까?’ 하며 섭섭할 때가 있습니다. 

전갈에 쏘인 최요한 학생

이번 굿뉴스코 귀국 발표회에서 학생들에게 최요한 이야기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는 해외봉사활동을 갔다가 전갈에 쏘였습니다. 의사들은 전갈에 쏘였을 때 바로 병원에 오면 고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한이는 한밤중에 전갈에 쏘였다가 오후 늦게 병원으로 갔습니다. 거의 18시간 가량 흘러서 전갈의 독이 이미 심장까지 퍼져 살 가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IYF(국제청소년연합) 라이베리아 지부장님이 울면서 제게 전화했습니다. “목사님, 최요한이가요… 흑흑흑” “지부장님, 좀 진정하세요. 무슨 일입니까?” “예, 요한이가 전갈에 쏘여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 아찔했습니다. 지부장님에게 요한이와 통화할 수 있게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요한아, 너 내 목소리 들려?” “네…, 목사님.” “너는 아프리카산 전갈에 쏘여서 죽어가고 있대. 의사는 네가 두세 시간 넘기기 어렵다고 했어. 그런데 요한아, 내 이야기 잘 들어. 나는 오늘 아침에 이사야 40장 31절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읽었어. 신구약 66권은 하나님의 말씀이야.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 하시지 않아.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하셨어. 하나님을 바라봐.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하나님을 의지해봐. 하나님이 너에게 새 힘을 주실 거야. 그럼 너는 전갈의 독을 이길 수 있어.” “예, 목사님.” “빨리 일어나라.”

전갈의 독을 이기고

최요한 학생은 저와 통화를 마치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하다가 아프리카로 올 때 공항에서 아버지가 안아주신 기억이 나면서 죽더라도 그 품에 한번 안겨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약속대로 제게 새 힘을 주시면 전갈의 독을 이길 수 있습니다’라며 통화하면서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졌던 것입니다. 
새벽녘에 간호사가 병실을 순회하다 ‘아, 그 학생 지금 어떻게 됐지?’ 하며 병상에 있는 모니터를 봤습니다. 그런데 혈압이 점점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 이 환자는 벌써 죽었을 사람인데 혈압이 올라가네? 의사 선생님! 이리 와 보세요.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 환자의 혈압이 올라가고 있어요!” 의사가 뛰어왔습니다. “무슨 조치를 한 거야?”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해 뜰 무렵 요한이가 깨어났습니다. “형, 괜찮아?” “응, 괜찮아.”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형이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어.” 전갈에 쏘인 발은 독이 퍼져서 썩어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이 화면으로 보시는 것처럼 발이 이렇게 나았습니다. 현재 미국 LA에서 세 아이의 아빠가 됐고 IYF 일을 하면서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계

여러분, 사랑하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예수님, 저와 함께 계신 걸 믿습니다. 제게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삶에서 주님을 한 번, 두 번 경험하다 보면 주님이 역사하시는 걸 믿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과 우리 마음이 더 가까워지면 복음을 위해 살게 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죽어갈 때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살려주지 않은 것 때문에 섭섭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몰라서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을 때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걸어 나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거야’ 하며 예수님을 믿고 더 깊은 신앙의 세계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생각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우리 마음이 예수님과 점점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작은 예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도록 우리를 계속 이끌고 계십니다. 
- 2023. 2. 26. 주일 오전예배 설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