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특수로 열린 대한민국 부국강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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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특수로 열린 대한민국 부국강병의 길
기획 신년기획 | 기억해야 할 대한민국의 영웅들 ② - 새마을운동,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동건설 붐을 견인한 베트남전 파병의 진실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23.02.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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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편찬연구소 前 선임연구관 최용호 박사

6.25전쟁의 폐허 속에 가난으로 얼룩졌던 대한민국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며 2023년 현재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에 본지는 신년기획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근간을 이루었던 숨은 영웅들을 3회에 걸쳐 재조명하고자 한다.

Contents
      1.  파독근로자,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초석이다
 ▶  2. 베트남전 특수로 열린 대한민국 부국강병의 길
      3. 폭염과 모래바람 속 해외건설 신화 이룬 주역들


50억 달러의 이익 창출한 베트남전 파병 

1960년대 초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참혹했다.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에는 성장기반이 될 시설이나 자금, 그 무엇도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은 60~70달러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125개 국가 중 최하위에 속했다.
경제개발의 돌파구를 찾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3년 파독 광부·간호사와 같은 노동력의 해외송출을 시작으로 1965년 한·일간 기본조약을 체결, 일본으로부터 8억 달러를 제공받아 이듬해 12.2%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베트남전 파병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6개월간 진행되었다. 약 50억 달러의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며 비약적인 국가발전을 가능케 한 파병은 32만 파월장병 외에도 의료, 기술,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한 민간인 6만여명으로 이뤄졌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前 선임연구관 최용호(70) 박사는 “베트남전 파병에 의해 국내에 유입된 거액의 외화는 국가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되어 경제·사회발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며 “당시는 북한의 남침 위기설이 난무했다. 이런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은 한·미간 안보동맹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경제개발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한국군 파병을 먼저 미국에 제안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추구한 월남 파병의 세 가지 전략 ▲주한미군 2·7사단의 한반도 계속 주둔과 국방력 강화 ▲미국의 경제 개발 지원 ▲국론결집과 부국강병을 통한 5.16 군사정부의 집권명분 확보가 제대로 달성됐다”라고 말했다. 
 

월남파병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군 해외파병이었다 | 파월기간 중 GNP 변화

군(軍) 현대화 및 경제수준 北 추월 성과 달성 

최 박사는 “베트남에 가기 전까지 해외방문 혹은 해외여행 경험을 가진 국민은 극소수였다. 베트남전 특수로 인해 우리는 부국강병의 길에 들어섰을 뿐 아니라 국제적 안목이 넓어졌다”라고 전했다. 베트남전 파병은 군의 현대화와 경제발전에 상상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향토사단의 정규사단화, 육군과 해병사단 장비의 현대화로 북한의 무력통일 시도를 막을 수 있는 방위력을 키우게 됐다. 소총조차도 만들지 못하던 나라가 작금의 방산대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또한 국내 일반 노동자 월급의 15배를 받은 파월기술자들은 월급의 80%를 국내로 송금해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 ▲10대 재벌에 속하는 현대, 한진, 효성, 동아건설 등을 포함한 80여개의 기업은 미군해외발주사업에 참여해 세탁부터 군수물자 납품, 용역, 건설로 산업화의 밑천을 마련했다. 더불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반공동맹의 일원으로 세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기업들은 변변한 기술은 커녕 국제적 사업을 수행한 경험도 전무했기 때문에 사력을 다해 입지를 넓혀 나갔다. 한진상사(현 한진그룹)가 군수물자를 베트콩이 우글거리던 정글을 뚫고 트럭으로 직접 실어 날라 ‘해상수송’만을 고집했던 미군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결과, 1964년 북한의 70% 수준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69년에는 북한 194달러, 남한 210달러로 역전됐다. 1977년에는 마침내 1000달러를 돌파함으로써 북한의 2배에 가까운 소득을 달성할 수 있었다.

베트남전 사업경험과 네트워크 통해 중동 특수 견인

반면 베트남 파병으로 잃은 것도 많았다. 최 박사는 “5천여명의 사망자와 1만여명의 부상자, 그리고 오늘날까지 병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고엽제 환자 등은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다. 아울러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베트남 양민학살’ 및 ‘용병’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전쟁 상황과 여건을 명확히 이해하는 가운데 심도 깊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전쟁은 인간성이 말살되는 상황이다. 정상적인 생각으로 어떻게 사람에게 총칼을 들이댈 수 있겠나. 죽어가는 전우를 보면 적에 대한 적개심에 닥치는 대로 죽이고 살아남으면 영웅이 됐다. 그러나 PTSD로 현실 적응을 못해 결혼도 못하고 폐인이 되어 사망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다”라며 안타까워했다. 
1973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미군과 함께 우리 부대는 그해 3월 베트남 철수를 완료했다. 이후 우리기술자들은 베트남전의 사업 경험과 네트워크를 중동 사막으로 옮겨갔다. 중동 특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송미아 차장대우 miaso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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