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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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난 세리 「삭개오」
2007.4.29 주일 낮 설교 (요약) - 152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7.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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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태복음의 후반부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후반부에는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이야기, 불의한 청지기가 마음을 돌이키는 이야기, 문둥병에서 나은 열 명의 병자 중에 한 명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에 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돈만 있으면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특히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는데, 세리들이 세금을 걷어주겠다고 해서 로마의 승낙을 받으면 세리장이 되고, 그 세리장은 로마에 바칠 세금 중 얼마는 자기가 챙기고 그 나머지를 로마에 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세리를 매국노로 취급했습니다.
삭개오도 그렇게 해서 세리장이 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너희들은 욕해라! 욕 안 먹어 가면서 돈 벌 수 있나’ 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는 삭개오가 가졌던 마음의 세계를 아주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부모를 대신하였지만

한 번은 우리 교회의 총각 형제가 맞선을 보고 난 뒤 결혼을 하려고 가족끼리 상견례를 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그 자리에는 대체로 양가 부모님들이 오시는데, 신랑측에서는 부모님 대신 누님과 매형이 오셨습니다.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가 결혼식 장소를 신부측에서 정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갑자기 그 형제의 매형이 얼굴을 붉히더니  “목사님, 이 자리가 순수하게 결혼을 위한 겁니까, 아니면 어떤 정책을 펴는 자리입니까?”라고 해서 제가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싸늘해졌습니다. 그 후 결혼식이 진행되어 그 형제 부부가 잘 살고 있지만 그 상견례 자리가 제 기억에 오래도록 남게 되었습니다.
또 한 번은 신부가 남미에서 자랐고 부모님도 남미에 계시기 때문에 신부측 부모님이 한국의 상견례 자리에 올 수 없어서 신부의 작은 아버지가 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신부의 작은 아버지는 어떤 통신회사에서 굉장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고 신랑 아버지는 그 통신회사의 시골 지사 말단 직원인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결혼 이야기보다 통신회사의 상관과 부하 직원간의 대화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제가 아주 난처해졌습니다.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마음과 달라

이런 일을 몇 번 겪고 나니 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상견례 자리에 신랑 신부의 부모님이 왔을 때와 부모님 대신 다른 친척이 왔을 때의 분위기가 너무 달랐습니다. 양가 부모님이 왔을 때는 결혼 날짜나 장소를 정하는 것이 그분들 마음에 맞지 않아 서운해 하시겠다 싶어 제가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면 한결같이 “목사님, 괜찮습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러십니까? 좋은 며느리를 얻게 되어 좋습니다”라는 식으로 대답합니다.
하지만 오빠는 아버지보다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람이라도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아버지와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빠나 삼촌이 마음을 쏟아서 뒷받침해 주지만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내 자존심 좀 상하면 어떠냐. 둘이 잘 살면 되지’라는 마음으로 자식의 결혼을 뒷받침합니다. 부모에게는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부모만의 마음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이런 일에 부딪히면 그 마음이 나타납니다.
신앙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삼촌이나 오빠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고, 부모님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차이는 마음의 한계를 넘어가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로 드러납니다. 똑같이 기도하고, 성경 읽고, 연보하고, 봉사하지만 어떤 한계에 도달했을 때 오빠나 삼촌과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그것을 넘지 못합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키가 작아 놀림을 받는데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저 난쟁이 삭개오,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 올라갔구나” 하고 놀렸겠지요. 그런데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찾게 했습니까?
사도행전 8장에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관리하는 큰 권세 있는 내시가 나옵니다. 그는 굉장히 바쁜 사람이지만 70일이 넘게 휴가를 얻어 예루살렘에 다녀옵니다. 그래도 마음에 해답을 찾지 못해 돌아오는 길에 병거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내시가 그렇게까지 하면서 찾은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보통 돈 버는 재미, 승진하는 재미, 아들 딸 낳고 사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마음의 공허함이 찾아옵니다. 한 번씩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지, 정말 천국과 지옥은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의문들에 대해 해답을 찾으려 하다 보면 많은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때 진리를 찾고자 하는 목마름이 생깁니다.

아이들 중심으로 키우면

어느 날, 저는 오늘날 미국이 왜 이렇게 타락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분석한 글을 읽었습니다. 처음에 미국인들은 청교도 정신에 입각해서 자식을 아주 엄하게 키웠답니다. 아기들이 울면 엄마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젖을 물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미국인들은 젖 주는 시간을 정해 놓고 아기가 울어도 그 시간이 아니면 젖을 주지 않고 방에 눕혀 놓았답니다. 자식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막무가내로 하는 게 아니라 절제해 가면서 했습니다.
그런데 벤자민 스파크라는 소아과 의사가 1946년경에 「아이가 울면 젖을 물리라」는 책을 썼습니다. 스파크의 책이 나온 후로는 부모들이 그런 양육 방법을 버리고 아이들 중심의 양육 방법을 택했답니다. 그 책을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미국이 타락하고 망한다. 엄하고 강하게 키우던 그전의 방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자 1946년 이전에 자란 사람들과 이후에 자란 사람들에게서 아주 다른 양상이 나타났습니다. 그 후에 자란 사람들이 훨씬 범죄율이 높았고, 폭력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신앙의 세계도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과 계획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사단이 넣었듯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인간의 마음에 사단이 역사해서 그 마음을 이끌어가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자기 마음의 세계를 그대로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부서뜨리고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정말 형제 자매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 마음을 꺾고, 자기 생각을 부인하는 삶을 사니까 마음이 넓어지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루프스’라는 병은 몸속에 있는 항체가 외부의 병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과 싸우는 병이기 때문에 루프스 환자는 항체를 줄이는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 그처럼 사단도 여러분에게 악한 생각을 통해 충동과 유혹을 넣어주기 때문에 그 생각을 버리고 꺾어야 신앙의 기초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신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목사들은 교회에 신도가 많이 나오고 연보 많이 해서 교회가 커지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꺾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친절하게 “믿음 좋습니다. 신앙 좋습니다. 천국 갑니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진리를 향한 목마름을 주십니다.

영혼의 갈급함이 있어야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3~4) 삭개오는 돈이 많고 지위가 높으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부자가 되고 세리장이 됐지만 영혼에 대해선 얻은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보통 사람과 다른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주일에 설교 들으면 손해될 것 없고 가정이 화목해서 좋지’ 하는 식으로 신앙하는 사람이 삭개오와 같은 처지에 들어갔다면 ‘예수님 보러 왔는데 사람이 많아 안 되겠네. 예수님 보려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가야 해? 다음에 보지 뭐’라는 마음으로 물러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키 작은 삭개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가려고 했을 때 그에게도 자존심과 체면이 있었겠지만 그 마음이 너무나 갈급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도 단계를 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단계를 거치도록 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교회 다니고, 연보하고, 주일 예배 참석하고, 성경 몇 구절 알고, 십계명 지키면 천국 간다는 식의 관념적인 신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신도들이 진정한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형식적인 교인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 나오면 다 천국 간다고 믿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했습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발견한 ‘룻’

저는 지난 동남아 사역자 수련회에서 룻기 3장을 전했습니다. 룻의 시어머니가 어느 날 룻을 불러서 말했습니다.
“내가 너로 안식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너와 함께 이삭을 줍던 시녀를 둔 보아스가 우리 친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라. 그가 오늘 자기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너는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라. 가서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가 보아스가 어디에서 잠자는지 그 자리를 알아놓고 그가 잠이 들거든 밤중에 그 발치 이불 밑에 들어가서 누워라.” 그 말에 룻은 “내가 어머니의 말씀대로 다 준행하리이다”고 했습니다.
그 내용을 읽을 때 제 마음이 찡했습니다. 어떤 여자가 외간 남자가 자고 있는 이불 밑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일 룻이라면 “어머니, 다른 말씀은 다 순종하겠습니다만 이것만은 순종하기 어렵습니다. 그분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도저히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겁니다. 그러나 룻은 “예, 제가 어머니 말씀대로 다 준행하리이다”고 합니다.
여러분, 룻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다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나보다 못한 사람도 다 잘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안 되지? 운이 나빴던 거야’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을 계속 겪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인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영혼을 사모하면

삭개오는 사람이 많이 모여 있고 키가 작다는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그런 장애를 넘어 뽕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여러분도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은혜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곤고케 하시고 어렵게 하시며 많은 문제를 줍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들로 말미암아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마음을 낮추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모에게는 자식을 위해 자존심과 체면을 구기고 욕먹는 것도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처럼 내 영혼을 위할 때, ‘남이 나를 보고 욕 좀 하면 어때, 남들에게 멸시 좀 받으면 어때, 내 영혼이 살아야지!’라는 마음으로 뽕나무 위에 올라가게 됩니다. 아니 뽕나무보다 더 높은 나무 위라도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을 예수님은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지나가다가 돌아보시면서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안 되는 인간이구나’

제가 구원을 받을 때는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 제 앞에 있는 길을 다 막으셨습니다. 저는 제가 똑똑하고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느 날 제가 주변 사람들에게 말썽만 일으키는 진짜 바보 같고, 악하고, 더럽고, 형편없는 인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고장 난 자동차의 핸들과 브레이크가 조절이 안 되는 것처럼 저도 제 마음 하나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마음먹고 죄 안 지으려고 하면 안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죄를 지었습니다.
죄 속에 깊이 빠져있던 어느 날, ‘이건 너무 심하다.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의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도저히 조절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에게 속은 것이지요. 그때 ‘이제 내 생각대로 살면 망하겠구나!’ 하며 정확하게 자신을 발견하니까 갈급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서 죄를 고백하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또 죄 짓지 않게 해달라고 뉘우치고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또 죄를 짓는 저를 보면서 ‘나는 안 되는 인간’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변화된 삭개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한 말입니다.
지금까지 돈이 그 마음에 하나님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모셨습니다. 전에는 더 많은 돈을 모으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돈을 섬겼는데, 예수님을 만나 보니 돈 자체가 귀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은 자기를 부유하게 할 수 있고, 배부르게 할 수 있고,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옷을 살 수 있게 하지만 마음 중심의 참된 평안은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영혼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니까 이제는 돈이 하나님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습니다.” 이제는 돈 때문에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돈은 잃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삭개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시고, 여러분 자신으로 하여금 악하고 추하고 더러운 걸 깨닫게 하셔서 자신을 믿는 믿음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바꾸도록 쉬지 않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곤고할 즈음에 주님을 찾아야 하는데 사단에게 속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나를 비우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가능합니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과 예수님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 알면 나를 비우기가 쉽습니다. 내가 인생을 열심히 잘 사는 것과 예수님이 잘 살게 해주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를 정확하게 봐야 합니다. 천국 가는 것도 내가 선을 행해서 가는 것과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행해 주신 선으로 가는 것 중 어느 것이 좋은지를 발견하십시오.

장애도 넘고 마음도 꺾어야

성경을 읽으면서 저는 제 육신의 욕망을 조절하게 됩니다. 가끔 금식을 하면서 저를 돌아보면 제가 배부를 때 갖는 마음과 배고플 때 갖는 마음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배가 부르면 갖가지 욕망이 일어나지만 2~3일 배가 고프고 나면 그런 욕망이 제 마음에서 힘을 잃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제 마음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육체의 욕구를 다 들어주면서 참된 신앙을 갖기는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형식적인 신앙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려면 장애도 넘어야 하고 자기 마음도 꺾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삭개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분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고 우리 마음의 욕망을 내쫓아주셔서 밝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을 힘입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날 저는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나도 세상을 떠나겠지.’ 제가 죽어서 다른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제 영혼이 육체 밖으로 나와 누워있는 몸을 쳐다보는 걸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때 내 마음이 어떨까? 내가 흙이 될 몸을 섬기느라고 주님을 섭섭하게 했구나! 내가 주를 사랑하지도 않고 내 영혼도 소홀히 했구나!’라며 굉장히 후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잠시 입었다가 벗어버릴 이 육체만을 위해 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다가  ‘나는 너무 잘못된 종이구나!’라고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영혼의 갈급함 때문에 육체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나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도 그런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여러분이 육체의 욕구도 이기고 다스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평강과 은혜의 복을 넘치게 주실 줄 믿습니다.

- 2007.4.29 주일 낮 설교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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