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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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름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갈 때
2007. 3. 4 주일 낮 설교 요약 - 144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7.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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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느 날 제 자신을 보며 ‘내가 무슨 목사야?’ 하는 마음이 든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너무 나태하고 부족해서 하나님이 저를 꼭 버리실 것 같았습니다. 젊은 목사님들이 말씀을 잘 전하는 걸 보면 그 설교가 은혜롭고 기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전에는 일꾼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나를 쓰셨지만, 저런 좋은 일꾼이 나왔으니까 이제는 버리실 거야’ 하면서 섭섭한 마음도 있어 얼마 동안 시험에 들었습니다.
한번은 대전도집회를 앞두고 ‘주님, 제가 너무 부족한데 저를 버리지 않고 강사로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뒤에 또 ‘이번 대전도집회를 마치면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 안 쓰실 거야’ 하고 생각했는데 겨울수양회 때에도 하나님이 저를 강사로 써 주셨습니다. 이상하게 그 수양회를 마칠 때에도 ‘이게 내 생애 마지막일지 몰라. 하나님이 진짜 나 같은 인간은 버리실 거야. 나는 너무 나태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히브리서를 읽다가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 마음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를 버리실지 몰라’ 하는 제 생각이 다 쫓겨나고 ‘하나님이 나를 절대 안 버린다고 하셨네, 나를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셨네’ 하며 평안함을 얻었습니다.

‘얼어 죽겠다’는 두려움이

경남 거창 장팔리에서 사역하던 1964년, 그해 겨울은 정말 추웠습니다. 연탄 살 돈이 없어서 방에 불을 전혀 안 때고 겨울을 났습니다. 이불도 없었습니다. 저녁마다 형제 자매들이 모여 간증하고, 말씀 나누고, 찬송하고, 기도회 한 후 시간이 늦으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너무 춥다. 이러다 내가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즐겁게 지내다가도 잠자리에 들 때면 막 두려웠습니다.
그때 심선주라는 열여섯 살 된 자매가 있었는데, 한 번씩 그 자매의 어머니가 김치를 담가주면 교회에 가지고 와서 “전도사님” 하며 부엌에 갖다 놓곤 했습니다. 한번은 그 자매가 아침에 김치를 갖고 와서 “전도사님” 해도 인기척이 없자 방문을 열었을 때 제가 얼어 죽어 있는 걸 보고 우는 상상을 하니 너무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밤 11시까지 성경 읽고 교제하다가 헤어질 때면 집으로 돌아가려는 청년 형제들을 붙잡고, 제가 ‘자고 가라’고 자꾸 권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따뜻한 자기 집 놔두고 추운 예배당에서 자려고 하겠습니까? 한 명도 안 남고 다 가는 겁니다. ‘내가 이러다가 얼어 죽을지 몰라.’ 그런 두려움이 며칠간 제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물고기도 지키시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세수를 하려고 냇가에 갔는데 얼음장 밑으로 조그만 송사리 새끼들이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갑자기 ‘저 물고기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는데, 저 물고기도 얼음장 밑에서 얼어 죽지 않는데, 왜 내가 얼어 죽겠나! 그렇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면서 두려움이 다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제 안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제 마음의 주인이 없어서 고통이나 두려움, 근심, 욕망 등이 왕 노릇 하면서 제 마음을 다 지배했지만, 예수님이 제 안에 들어오시고 난 후에는 두려움이나 염려, 근심, 문제가 있어도 예수님이 다 내쫓아 주셨습니다. 또 전에는 돈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없으면 풀이 죽고, 남들이 인정해주면 신나고 남들이 인정 안 해주면 속상했는데, 예수님께서 제 마음 안에서 그런 추하고 악한 것을 제거하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예수 안에 살면서 주님은 저를 모든 것에서 진짜 자유케 하셨습니다.

마음 판에 죄가 기록되고

예레미야 17장의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이라는 말씀처럼 우리 죄는 우선 하나님의 제단 뿔에 기록되고 두 번째 우리 마음 판에 기록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어도 마치 문서가 레이저 프린터로 출력되듯이 여러분 마음 판에 ‘몇 년 몇 월 며칠 도둑질했음, 간음했음’이라고 정확하게 찍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게 나갈 때 제단을 지나는데, 제단 네 모퉁이 뿔에 사람의 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 하나님한테 나가려고 할 때마다 제단 뿔이 보여 죄가 드러나니까 마음에 자유를 잃어 ‘나는 믿음이 없어. 나는 부족해’ 하면서 그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하고 넘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형제님, 참 수고했습니다.” “자매님, 참 감사했습니다”라는 인사를 들으며 즐겁게 지내다가도 ‘내가 도둑질한 것, 거짓말한 게 발각되면 어쩌지?’ ‘혹시 내가 간음한 것 누가 본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이 마음의 기쁨이나 평안을 눌러 버리기 때문에 신앙에 자유가 없고 점점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아버지 ‘이삭’의 축복

오늘 읽은 창세기 27장은 제가 설교를 많이 했는데, 매우 신비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문제를 알고 그것을 치료하는 처방약으로 이 장을 기록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나타난 사실 몇 부분만 알면 신앙이 진짜 자유롭고 편안하며 즐거워집니다.
어느 날 이삭이 에서를 불렀습니다.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너는 전통과 활을 메고 가서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와라. 그러면 내가 먹고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리라.” 에서는 ‘드디어 때가 왔구나! 아버지가 나를 축복해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그 계보에 내가 들어가겠구나! 그 하나님의 영광의 복을 받겠구나!’ 하며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고는 ‘사냥 하면 나 외에 누구리요’ 하면서 활과 전통을 메고 들로 사냥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 야곱이 복을 받게 하고 싶었습니다. “야곱아, 빨리 와.” “예, 어머니.” “아버지가 형 에서에게 복을 준다고 하니 형이 사냥해 오기 전에 네가 아버지께 가서 복 받고 와라.” 야곱이 그 소리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지만 자신을 보니 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 안 돼. 아버지가 나이가 많아 앞은 못 보시지만 손을 만져보면 형 에서는 털이 많지만 나는 매끈매끈해서 금방 아실 거예요. 아버지를 속이려다 오히려 저주를 받으면 어떻게 해요? 안 돼요.”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아, 너에게 오는 그 저주는 내게 돌리고 넌 내 말만 좇고 가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가져 와” 하는 겁니다.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야곱과 에서가 복받는 이야기는 서로 너무 다릅니다. 에서가 활을 암만 잘 쏘아도 벌판의 짐승들이 그냥 “날 잡아 잡수시오” 하며 찾아오지 않잖아요. 그리고 활에 맞아도 죽기 전까지 짐승이 날뛰니까 잡기 힘들고, 잡으면 작아도 무게가 70~80㎏ 되는 짐승을 메고 오는 것도 힘듭니다.
반면 야곱은 우리에 있는 염소를 몰고 오기만 하면 엄마가 지지고, 볶고, 다지고, 구워서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줍니다. 또 아버지가 “이리 와 봐” 하고 가까이 부르실 것에 대비해서 염소 털을 손과 목에 붙이고 에서의 옷을 가져다 입혔습니다. 야곱이 봐도 자기가 형 에서하고 비슷한 겁니다.
이제 야곱은 어머니가 만든 별미를 들고 조심스럽게 이삭 앞으로 나갑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사냥한 고기를 가져 왔사오니 잡수시고 마음껏 축복해 주옵소서.” “네가 누구냐?” “아버지 맏아들 에서입니다.” “그래? 아니 벌써 사냥을 해왔느냐?”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하셨습니다.” “네가 진짜 에서 맞느냐? 내가 눈이 어두우니까 가까이 와라. 한번 만져보자.” 야곱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서 벌벌 떠는데, 이삭이 “거 참 이상하다. 분명히 야곱 목소리 같은데 손은 에서의 손이구나” 하면서 그 음식을 다 먹고 포도주를 마시더니 그에게 모든 축복을 내려줍니다.

내 이름으로 나가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은행에 10원 한푼 예금해 놓지 않아도 우리 교회 이형모 장로님이 10억 원을 예금해 놓고 저한테 인감도장과 통장을 주고,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면서 “목사님, 1억 꺼내 쓰세요” 하면, 제가 ‘이형모’가 아니라 ‘박옥수’라도 그 통장을 갖고 은행에 가서 청구할 수 있습니다. 예금주 ‘이형모’, 비밀번호 ‘0000’, 청구금액 ‘일억 원정’ 쓰고 인감도장 찍어 청구서를 창구에 내면, 내가 예금주가 아닐지라도 은행에서 돈을 내어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복 받을 때나 천국 갈 때도 여러분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기 때문에 여러분이 잘하고 못하는 건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가 이 장로님의 이름으로 돈을 꺼내려면 박옥수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예금되었느냐와 상관없이 이 장로님의 통장과 인감도장이 있고 비밀번호만 알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이 염소 털로 손의 매끈매끈한 곳과 목을 꾸미고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면서 에서의 이름으로 복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은 너무 추하고 더럽고 의가 없는 우리를 전부 다 예수님으로 꾸미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자기를 보고 나간다면 우리 가운데 자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간음 중에 잡힌 여자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셨을 때 그 여자를 돌로 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 중에 선하고 진실하게 보여 “법 없이도 산다”는 말을 듣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입니다.
우리 스스로 추하고 더러운 자신을 깨끗하게 하거나 죄를 적게 지어서 하나님께 나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하나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정리하고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겠나? 난 허물이 많은데, 난 부족한데’ 하면서 제가 목사지만 저 자신을 보면 너무 부족합니다. 그래서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이 교회를 주님이 이끌어 주십시오. 이 건물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십시오. 우리 교회 나오는 성도들을 믿음으로 이끌기에는 너무 부족하니 주님이 그들의 마음을 이끌어주셔서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그 마음에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갖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제가 너무 부족하니까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떳떳하고 담대하게

여러분도 주님 앞에 서려면 자신의 추하고, 더럽고, 악하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방탕한 죄들이 생각나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부끄러울 겁니다. 야곱이 자기가 잘해서는 절대 아버지 앞에 설 수 없는 것처럼, 추하고 더러운 자신을 바꾸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창세기 27장의 야곱이 자신의 이름이 아닌 형 에서처럼 꾸며주신 어머니를 믿는 믿음으로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하면서 에서의 이름으로 나가서 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자신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매우 쉽습니다.
내 죄의 모든 형벌을 받은 예수님이 나와 하나가 되셨기에 이제는 부족한 나를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 수 있도록

믿음을 갖지 못했을 때는 제가 조금만 연약하거나 부족해도 저 자신 속에 빠집니다. 그런데 아까 말했듯이 이 장로님이 자신의 돈을 내가 찾을 수 있도록 나에게 통장과 인감을 주시고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피를 흘려 내 죄를 사하시고 당신의 의(義), 당신의 거룩함,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뿐 아니라 당신의 이름까지 내게 주셔서 내가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작은 예수’로 살 수 있도록 모든 일을 갖추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더 이상 너는 없어. 너는 예수와 함께 죽었어. 이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 이제 너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거야’라고 말씀하실 때 ‘죄의 종으로 살던 나는 죽었구나. 이제 나는 옛날의 나에게서 벗어나 거듭나서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구나! 예수님이 당신의 의를 다 내게 주셨구나!’ 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마치 리브가가 염소 털로 야곱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부분을 꾸미고, 에서의 의복을 입혀 에서의 모양으로 만들고, 요리를 준비해 주셔서 에서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나가기만 하면 복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다 이루어 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우리 죄를 씻으시고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이름으로 살 수도 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육신의 죄악 속에 있는 우리를 당신에게 이끌어내려고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씻으시고 우리와 하나 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면서 우리가 예수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모든 걸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살면서 나를 좀 더 착하게, 좀더 거룩하게, 좀더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면 쓸수록 더 큰 죄를 짓게 되고, 더 많은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깨끗케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사단은 너무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예수님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죄도 예수님의 문제가 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해결한 거고, 또 내가 연약해서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이 그 유혹에서 이겨 주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여러분, 이처럼 신앙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이미 죽었고 이제 우리 마음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살아있다면 왜 거짓말하냐? 그리스도가 왜 죄를 짓냐?’ 그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서 이제 나를 의롭고 거룩하게 이끌어 가실 거야.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는 거룩하셔. 이제 행동만 남았는데 사랑하는 주님이 이 행동도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하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와 싸워서 죄를 짓지 않으려면 너무 어렵고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저를 의롭게 해서 저와 그리스도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이제 ‘박옥수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의 삶’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껍데기만 제 몸이지 제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건 제가 한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겁니다.

나를 통해 일하시며

예전에 시골에 있을 때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나무 밑에서 손수건에 싸인 500원짜리 지폐 뭉치를 주웠습니다. 한참 앞에 걸어가시는 할머니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할머니” 하고 부르며 그것을 흔들었습니다. 할머니가 깜짝 놀라서 오셨습니다. “누에고치 판 돈인데, 30원 하는 버스비 아끼려고 걸어가다 나무 그늘에서 좀 쉬었는데 놓고 갔나보네” 하시면서 너무 고마워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제 친구 중에 소매치기가 있어 시골 장에 가면 늘 할머니들 호주머니에서 돈 훔쳐서 맛있는 거 사먹고는 했는데 저도 따라다니면서 많이 얻어먹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저도 조금 더 발전하면 그 친구 단계까지 갔을 겁니다.
제가 할머니에게 “전 옛날에 남의 돈을 뺏을 수 있으면 빼앗을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뒤 제 마음이 변했습니다. 오늘 돈을 돌려주신 분은 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할머니도 예수님 믿으십시오” 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나를 ‘착한 젊은 선생’으로 알고 있지만 저는 절대 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말 주님이 하신 일이기에 돌아오면서 참 기뻤습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어

여러분 안에 예수님이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 수도 있고, 여러분의 이름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었다면 예수님 안에서 ‘나’라는 존재와 예수님은 같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예수님의 한 부분이 되었기에 이제는 예수님 당신의 거룩함이 전부 우리의 거룩함이 됩니다. 예수님의 선이 우리 선이 되고,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주님은 주님 당신의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넌 내 이름으로 살아라. 내가 책임질게. 너는 네 이름으로 살지 말고 내 이름으로 살아라.” 그래서 박옥수라는 제 삶은 끝이 났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앞에 나갔을 때 “네가 누구냐?” 하니까 그가 “아버지, 사실 저는 야곱인데 형의 흉내를 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당당하게 “네,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라고 말했기에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더러운 죄인으로 보지 않고 예수님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우리 죄를 처리해 주셔서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이므로 이제 우리 죄의 문제도 예수님의 것, 기쁨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김성훈 목사님이 사모님과 결혼하고 난 뒤에 한 달쯤 지나서 사모님이 김 목사님한테 “사실 제가 시집 오기 전에 진 빚이 얼마 있어요. 당신이 갚아 줄 거예요?”라고 물었답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는 한 몸이니까 사모님의 빚은 김 목사님의 빚이 되는 것입니다. 사모님과 김 목사님이 하나 된 겁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면 예수님이 주인이시니까 우리의 빚, 건강 문제 다 예수님께서 책임지셔야 하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게 시집 와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예수님께서 다 이끌어 해결하실 줄 믿고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이름으로 살면 많은 문제가 있지만 ‘나를 볼 때 어떠하든지 간에 예수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의롭고 거룩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으셨듯이 내 기도를 들으셔.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지키셔’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갈 때 여러분이 복을 받고 은혜를 입는 삶을 살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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