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받은 심판으로 내 모든 죄가 씻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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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받은 심판으로 내 모든 죄가 씻기고
2007. 1. 28  주일  낮  설교 요약- 139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7.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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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성경에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한 후 수습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너무 옹졸하고 유치하게 일을 이끌어 나가는 겁니다.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을 하고 난 뒤에 우리아의 아내가 잉태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것을 속이려고 전쟁터에 있던 우리아를 데려와서 아내와 동침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아가 거절하니까 그를 술에 취하게 해서 술김에 아내와 잠을 자게 하려고 했지만, 그것도 안 되니까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아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을 보니까 지금까지 관대하고 지혜롭고 넓은 다윗의 마음은 그의 본마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생각으로 일할 때는 더럽고 치사하고 간교하고 악하고 거짓되다는 것을 성경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보석보다 귀한 학생들

단기선교를 갔다 온 학생들 가운데 어젯밤 영상교제 시간에는 이한솔 학생과 인터뷰를 했고 그 전 주에는 박장용·임명철 학생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GNC(Goodnews Corps, 해외봉사단) 단원으로 아프리카에 갔다 와서 변화된 간증을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가 얼마나 지혜롭고 거룩하고 건전한지 ‘어떻게 이 아이들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국의 ‘버틀러’라는 사람은 하수도에서 나오는 탄산가스로 인조 다이아몬드를 만들어서 굉장히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하수도의 구린내 나는 탄산가스가 아름다운 인조 다이아몬드로 변하는 것처럼, 정말 형편없던 학생들이 어느 누구보다 귀한 학생들로 변해서 아름답게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 마음은 다이아몬드나 보석보다 귀하다’는 마음이 들면서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

여러분, 오늘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 아니면 자기를 믿고 자기 지혜와 방법으로 사느냐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길로 삼은 게 아니라,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진다는 뱀의 유혹을 받아들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아담이 죄를 지으면 마음에 죄의 가책을 느끼게 합니다. 개가 간음했다고 가책을 느끼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닭이 도둑질했다고 얼굴 붉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또 소가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워서 나무 뒤에 숨는 걸 봤습니까?
동물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않아 선악을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간음했다고, 도둑질했다고,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사람이 다른 악을 저지르도록 한 것이 아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 선과 악을 알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어 눈이 밝아지니까 ‘내가 벌거벗어서 부끄럽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선과 악을 모르면 양심에 가책이 없을 텐데, 양심에 가책이 온 겁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난 뒤부터는 부끄러움, 두려움, 죄의 가책이 생겼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생겨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 3:6~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은 후 부끄러움과 죄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장벽이 되었습니다. 8절에는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장벽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생긴 마음의 장벽으로 인해 그 후손인 우리도 죄의 가책과 두려움으로 인해 늘 주님 앞에 나가길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울면서 죄를 뉘우치고 고백합니다.

마음의 장벽

제 딸이 초등학교 다닐 때에 한번은 텔레비전을 사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 백 점 스무 번만 맞으면 텔레비전 사 줄게”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백 점을 받으면 대문에서부터 “아빠, 백 점! 백 점!” 하면서 뛰어 들어옵니다. 그런데 50점이나 60점 받을 때는 조용하게 아무 말 없이 들어오는 겁니다.
누가 어린 딸에게 50점이나 60점짜리는 숨기고 100점짜리는 자랑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까? 제 딸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은 아담의 후손이니까 부끄러움을 압니다. 그리고 죄를 지으면 양심의 가책도 느낍니다.
이렇게 부끄러움이나 가책이나 두려움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마음의 장벽을 쌓아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흐르지도 않고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역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있는 평안과 기쁨, 의와 소망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이 차단되었습니다. 이제 인간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쪽에서 기쁨과 평안을 구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 쪽에서 소망을 구하려고 안타깝게 찾는데 하나님밖에 소망이 없습니다.

복음이 임하면서

저는 이번에 GNC 6기 학생 700명을 훈련했습니다. 지금도 제 눈에 생생한 것이 첫날 훈련시간에 들어갔는데 학생 네 명이 늦게 들어왔습니다. 왜 시간을 어겼냐고 물었더니 화장실 갔다 왔다는 겁니다. 알고보니 훈련 받는 학생들 중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잘 모르지만 안 피우는 사람은 담배 냄새를 정확하게 압니다. 그들은 담배 피우고 나서 양치질했으니까 ‘냄새 안 나겠지’ 하고 들어오지만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너희, 담배 끊기 힘들지?” 학생들이 ‘저 목사가 어떻게 알았지?’라고 생각했겠지만 왜 모르겠습니까? 학생들에게 문제가 많았지만 700명한테 어떻게 일일이 “너, 담배 피우지 마. 지각하지 마. 착하게 살아. 그러면 안 돼”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런 학생들을 볼 때마다 어떻게 훈련해야 할지 몰라 암담했는데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면 대부분 ‘내가 이걸 받아들이면 처가에서 뭐라고 할까, 직장에서 뭐라고 할까, 상관이 어떻게 볼까, 형님이 뭐라고 할까?’ 하며 주위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러는 사이 정작 그들은 한마디도 못 알아듣고 지나가 버립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젊고 순수하기 때문에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가면서 그 삶이 변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서 하나님과 그들 사이에 막혀있던 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달라지는 것이 너무 신기했습니다.

캠프에서 만난 어떤 친구

초등학교 때 제 여자 동기생이 이번 태국 글로벌캠프에 왔는데 그 친구를 보면서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다닐 때 폐결핵에 걸렸는데 한의원에서 축농증으로 잘못 진단했답니다.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아서 몇 년을 지내는 동안 폐가 너무 약해지고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그 후의 삶을 들어봐도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폐결핵에 걸렸던  시기에 제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는 구원받은 후 어렵고 힘든 일을  많이 만났지만 예수님께서 제 안에 계셔서 저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환란이나 질병, 재앙을 예수 안에서 통과하는 사람과 예수 밖에서 통과하는 사람은 매우 다릅니다. 마치 홍수를 방주 안에서 통과하는 것과 방주 밖에서 통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저는 지난 4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저를 죄에서 자유케 해서 하나님과 제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해결했다는 사실을 믿은 것밖에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과 마음의 통로가 연결되면서 내가 절망스러울 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이 내 마음의 절망을 밟아 버렸습니다. 내가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안이 그 고통을 이기게 했습니다. 또 내가 죄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의 의가 내게 와서 나를 죄에서 건져서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내가 추할 때 하나님의 거룩함이, 내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내가 미련할 때 하나님의 지혜가 나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면 어떤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의 힘으로 다 해결됩니다. 두려운 일이 닥쳐도 하나님의 평안이 내 마음에 오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 마음에 오면,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에 오면 그때부터 나는 지혜로워지고 능력을 갖게 되는 겁니다.

말씀 없이 살 수 없어

고대 문명의 발생지는 전부 강을 끼고 있습니다. 애굽 문명은 나일강 유역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중국 문명은 황허강 유역에서 발생했습니다. 인간의 몸은 70%가 물이기 때문에 물을 떠나서는 인간이 살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산지에서 발생한 문명은 발달하다가 결국 망했고 강 유역에서 발생한 문명만 번성해서 고대 문명의 발생지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살기 어려운 것은 강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는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지는데 건기가 되면 모든 것이 사막화됩니다. 그러면 짐승들이 늪으로 물을 마시러 옵니다. 그 늪에는 악어가 있고 사자가 있어도 목이 마르니까 어쩔 수 없이 늪으로 오게 됩니다. 그러다 악어나 사자에게 잡아 먹혀 비참하게 죽는 짐승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도 짐승들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고 두려워 떨고 있는 동안에 인간은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심판하신 하나님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소리를 듣고 나무 그늘 사이에 숨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며 아담을 찾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숨었습니다. “예, 하나님. 제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동산 나무 그늘에 숨었나이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아담에게 벗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궁색한 변명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 말은 사단이 주는 마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냥 “내가 먹었습니다” 하는 게 아니라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 했고, 게다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게 하여 주신 여자”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하나님도 죄가 있는 것처럼 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나님이 뱀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고 그냥 심판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4~15) 하나님은 저주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아담을 사랑하셨기에

하나님은 여자도 심판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창 3:16) 그래서 여자들이 해산할 때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겁니다.
또 아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
여러분, 하나님은 아담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큰 병에 걸렸습니다. 이제 아담은 삶 속에 어둠이 오고 죄악이 올 때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점점 죄가 쌓이고 그 마음의 장벽에 가로막혀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 지혜와 능력을 맛보지 못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심판 뒤에는 자유가

여러분, ‘죄’라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회개하면 씻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해서 죄가 씻어질 것 같으면 뭐하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하나님께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었던 것은 죄는 반드시 심판을 거쳐야 처리되지 그냥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장벽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아담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야 아담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아버지께 맞을 짓을 많이 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저녁 먹으러 가야하는데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맞을까봐 겁나서 못 들어가는 겁니다. 저녁 때 아버지가 “옥수는 어디 갔냐?” 하고 찾으십니다. 그러면 동생이 고자질을 합니다. “형 밖에 있는데 안 들어와요.” “가서 오라고 그래라.” 동생이 나와서 아버지가 오라고 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집에 영원히 안 들어갈 수 있습니까? 들어가면 아버지가 회초리로 방바닥을 때리면서 야단을 치고는 “밥 먹고 자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심판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제 마음이 정말 자유로워집니다.

죄를 기억치 않으시고

한번은 제 아내가 잘못한 일이 있었서 제가 “당신, 왜 그랬냐?”고 나무라고는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또 “당신, 지난번에 이거 잘못했었잖아?” 하면 제 아내가 “아이고,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당신은 한 번 얘기했으면 됐지 또 그 얘기해요?” 합니다. 그러면 제가 “참, 그랬지. 내가 이제 다시 안 그럴게” 하고 약속을 하지만 얼마 지난 뒤에 또 “당신, 그렇게 했었잖아” 하는 겁니다. 제 아내가 한 번 잘못한 게 제 기억에 오래 남아 틈만 나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일단 죄를 심판하시고 나면 그 죄를 다시 기억치 않으십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기록에서 그 죄를 다 지워버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기억에서도 지워버리십니다.
우리는 남이 미운 것이나 잘못한 것은 끝까지 기억하고, 남이 잘한 것은 잘 잊어버립니다. 또 내가 잘한 건 오래 기억하면서 내가 잘못한 것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범하면 적당히 지나가시지 않고 꼭 심판을 하십니다.
그리고 일단 죄에 대한 심판이 끝나면 하나님은 그 죄를 다시 기억치 않으십니다. 우리도 ‘기억은 나지만 이미 심판으로 끝난 거야’ 하며 그 죄가 사해졌다고 믿으면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담대히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능력이 내 마음속에 흐르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끝난 심판

여러분, 다윗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됐을 때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담대함을 흘려받아 나라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이라는 죄를 저지르면서 하나님과 그의 사이에 장벽이 가로막히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흐르던 지혜나 능력, 담대함이나 평안함이 다윗 속에 안 오니까 다윗이 옹졸해 지고 두려워하고 불안해져서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담을 심판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은즉 저주를 받고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받아야할 그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심판은 십자가에서 끝났고, 십자가에서 우리에 대한 심판이 끝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판은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이런 주일학교 찬송이 있습니다. “심판이 나에겐 없네. 주의 피는 내 죄 가리네.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으니 심판이 나에겐 없네.” 내가 받아야할 모든 죄의 심판을 예수님이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끝을 내셨습니다.

“내 죄가 씻어졌구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고 허물과 부끄러움을 가리도록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아담과 하와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죄를 뉘우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의 말씀대로 그 죄의 심판이 끝났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 죄가 씻어졌다’는 것을 알고 죄에서 벗어나 밝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여러분 마음에 그 믿음이 들어오면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다시 마음의 통로가 형성됩니다. 그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 은혜가 들어가서 밝고 빛나고 지혜롭고 복되게 살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사단에게 속아서 오랫동안 죄 속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으신 그 심판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됐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가서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에 흘러서 하나님의 평안이,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들어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2007. 1. 28  주일  낮  설교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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