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이 주님의 말씀과 다를 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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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주님의 말씀과 다를 때에는…
2007.1.7 주일 낮 설교 요약 -136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7.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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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그라시아스 크리스마스 칸타타 때 재미있는 일이 참 많았는데, 그 중에 송일용 형제가 ‘Mary's boy child’라는 노래를 불러 많은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 노래의 가사를 보면 요셉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와서 방을 구했지만 머물 방이 없었습니다. 베들레헴에 굉장히 많은 방이 있었지만 아무도 아기 예수가 태어날 방을 빌려주지 않아서 결국 예수님은 차고 어두운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만 했다는 내용입니다. 송 형제가 그 가사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여러 번 울었다고 합니다.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종교의 대상으로 알고 숭배하지, 마음에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천 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와 똑같은 현상이 우리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요한복음 11장을 읽었는데 이 장은 신구약 66권 가운데 어느 성경보다도 그 부분을 가장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성경을 읽다가 너무 감탄스러운 것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누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적나라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고차원을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참 고독하셨을 것 같습니다. 역사에서도 항상 영웅은 고독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시험을 치면 공부를 제일 잘하는 상위 5%가 있고, 공부와 담 쌓고 사는 하위 5%가 있고, 나머지는 중간 그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 그룹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경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의 방향도 아주 뛰어난 생각을 하는 사람, 즉 보통 사람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고차원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나머지는 보통 사람이 가지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뛰어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위에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고 인정받기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유명한 발명왕인 토머스 에디슨은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없는 세계를 생각했습니다. 어릴 때, 사람의 뱃속에 가스를 넣어두면 그 가스 때문에 사람이 붕붕 날아갈 거라고 생각해 친구에게 가스로 만든 약을 먹이고는 “조금만 참아봐. 조금 있으면 날아갈 거야”라고 했답니다.
그의 생각을 보통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은 에디슨이 천재인 것을 모르고 퇴학시켜 버렸습니다. 모든 부분에서 보편적인 생각과 아주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은 항상 배척과 멸시를 당하고 다른 사람의 이해를 얻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사람의 생각을 넘어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와서 보통 사람은 빵조각이나 동전 몇 푼을 주겠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생각을 넘어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랐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돈을 빌려 포도주를 사오는 식으로 생각이 흘러가겠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법인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고 하셨습니다. 하인들이 물을 채웠더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말씀을 누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지극히 귀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세주시며 거룩한 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같지 않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늘 읽은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나사로의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우리 오빠가 죽어 가는데 좀 고쳐주십시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러면 우리 오빠가 죽지 않고 살겠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나사로가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17~21)
나사로가 죽은 지 사흘 뒤에 예수님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베다니에 오셨어요. 베다니 마을 입구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을 맞아야 하는데 그는 주님에 대한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오빠가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 달라고 했더니 죽은 뒤에 오시면 뭐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니까 그래도 예수님을 맞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해 너무 섭섭한 나머지 예수님이 보기도 싫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라야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니까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러면서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는 겁니다. 그 후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이 대화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르다의 마음에는 오빠 나사로가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 죽는다고 하셨지만 그가 본 오빠의 몸은 숨이 멎어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에는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능력의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계십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우리는 선악에 밝아진 눈으로 모든 사물을 봅니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 흐를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 욕망이나 주관, 생각을 견고하게 세워놓으면 하나님과 마음이 흐르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내 속에 일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다른 쪽에 있어도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예수님께 있었던 똑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음에서 죽어버린 오빠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요 11:21~22) 마르다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자기를 꾸며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재치있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의 마음에는 오빠 나사로가 죽어 있었고 예수님의 마음에는 나사로가 살아 있었습니다. 마르다는 마음에서 오빠가 죽어 있기 때문에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전부 “죽었다”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요 11:23) 반면 예수님의 마음에는 나사로가 살아 있기 때문에 “아니야. 다시 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보는 마르다가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슬퍼하며 곡을 하고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예수님처럼 ‘우리 오빠는 죽은 게 아니라 잠자고 있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거야. 우리 오빠는 곧 살아날 거야’라는 마음이 들면 울었겠습니까? “예수님, 참 감사합니다” 하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가 살았다고 믿는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살았으니 슬퍼하지 말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으셔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누가 예수님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 옮길 수 있습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그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마르다의 귀에는 그 말씀이 들렸지만 마음에서 자기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주 재미있게 설계하셨습니다. 우리 머리는 다른 두 가지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우리 마음은 두 가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종종 “그게 네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냐, 아니면 입으로만 하는 소리냐?”라는 질문을 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오빠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살았다는 것을 받아들이든지 둘 중 하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자기 생각을 받아들였습니다.

내 생각을 부인(否認)하면

오빠가 죽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니까 마르다는 굉장히 어렵고 난처한 가운데에 처했습니다. 그 말씀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보기에 오빠가 죽었는데 살았다고 할 수도 없으니까 나름대로의 지혜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줄을 내가 아나이다”라는 식으로 마음이 흘러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요한복음 11장을 읽으면서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이 보시는  눈과 우리가 보는 눈이 다르니까 예수님이 외로우시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네 생각을 버리고 너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나 자신을 신뢰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그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볼 땐 오빠가 죽은 것 같지만 예수님이 산다고 하시면 사는 거야’ 하고 내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가 여러분의 마음에 일어나게 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을 때 어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셨을 때 자기 생각이 올라왔습니다. “100세 된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습니까? 사라는 90세인데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니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해라.”
그때 아브라함은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왜 이리 미련하지? 내가 늙었지만 하나님이 아들을 낳는다고 하시면 낳는 거지. 내가 왜 이렇게 미련한 생각을 해?’ 거기서 마음을 바꾸고 “예, 아들을 주실 줄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8~21)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여

이 말씀을 읽어 보면 아브라함이 굉장히 믿음 있는 사람인 것 같아도 창세기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어오면서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기한이 이를 때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하셨을 때 사라는 웃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무슨 낙이 있으리요.” 하나님이 사라에게 “왜 웃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하셨더니 사라가 당황해서 “아닙니다. 내가 웃지 않았습니다”라고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곧 사라는 ‘나는 경수가 끊어져서 아기를 못 낳아’라는 마음을 비워버리고 ‘내가 인간적인 면으로만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어. 내가 늙어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다면 그렇게 되지’ 하며 아기를 낳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받아들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히 11:11~12)
사라가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깨뜨리고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꾸었을 때, 성령이 사라에게 잉태하는 힘을 주셔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한 ‘마르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에게 역사하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 속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나 이런저런 일을 통해 하나님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 마음을 미련하게 해서 ‘안 된다’는 마음을 굳히게 만듭니다.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4~26) 예수님은 계속해서 마르다의 마음을 바꾸려고 하셨습니다. “아니야, 네 오빠가 죽었지만 다시 살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야. 내가 하면 살아.”
마르다가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그래, 내가 볼 때는 죽었지만 예수님이 산다고 하셨으면 살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셔. 분명 죽은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살아’ 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오면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7) 자꾸 예수님이 이야기하시니까 마르다가 살짝 뒤로 빠지면서 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마리아에게 “선생님이 너를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언제 예수님이 마리아를 찾으셨습니까? 이렇게 재치가 많은 사람은 신앙생활하기가 참 어려워요. 재치로 다 둘러대면서 예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르다처럼 예수님과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생각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믿어야 하는데, 자기 생각이나 지식을 믿어버리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일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일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예수님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빛을 비추는 빛 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단은 늘 불신을 심어주고

예수님이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시니까 마르다가 말합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래, 냄새가 나잖아. 그러니까 내가 살리려고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는 거야.’ 예수님의 마음을 받지 못한 마르다는 ‘아이고, 썩어 냄새가 나는데 이제 와서 왜 무덤을 열려고 하실까? 얼마나 흉측할까? 그냥 기도나 해주고 가시지’ 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단은 이같이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생각을 강하게 정착시켜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합리적이면 마음에 받아들이고 옳다고 생각해요. 사단이 잘못된 것을 우리 생각에 합리적으로 느끼도록 만드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사단은 ‘이러니까 내가 옳고, 이러니까 안 되고, 이러니까 내 생각대로 살아야 돼’라는 마음을 줘서 예수님의 말씀과 다른 방향으로 우리 마음을 계속해서 이끌어갑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 사랑하는 주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살아서 능력으로 일하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속에 역사하시려면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마르다에게 ‘우리 오빠는 죽었어.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나?’ 하는 생각을 강하게 일으켜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안타까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겁니다.

성경을 주신 이유

여러분,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이 역사하시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한없이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 삶 속에 예수께서 살아서 능력으로 일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한 마르다처럼 적당히 넘겨버리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마지막 날이 아니라 지금을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아는 지식으로 적당히 정당화하지 말고 내 생각이 주님의 말씀과 다를 때 내 생각을 지워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우셨다”는 간증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서 죽은 땅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만들어진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이 어둡고 공허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새가 노래하고 나비가 춤추는 아름다운 낙원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들어오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막고 있는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내 생각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 2007.1.7 주일 낮 설교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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