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몬’의 약속을 굳게 믿은 ‘라합’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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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몬’의 약속을 굳게 믿은 ‘라합’처럼
2006.12.3 주일 낮 설교 요약 - 131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1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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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에 형제 자매들에게 신앙은 정말 쉬운 거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알고보면 신앙만큼 쉬운 게 없는데 사람들은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지난 목요일 새벽에 사역자 한 분이 사역을 하지만 뭘 해도 안 된다면서 신앙상담을 하고 싶다고 찾아왔습니다. 사역을 잘해보려고 기도도 하고, 금식도 하고, 성경도 읽어보고, 부지런히 심방도 하지만 자기가 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다 막으시는 걸 보면서 한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외가 “이제 사역을 그만 두고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자”고 의논하면서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막으셨는데, 농사를 짓는다고 잘 되겠냐?’는 생각을 했답니다. 다른 밭은 다 괜찮은데 자기 밭에만 벌레가 생겨 농작물을 다 뜯어먹어 흉년이 들 것 같은 생각이 드니까 두려워서 농사지으러 못 가겠더랍니다. 그냥 형제 자매도 아니고 사역자가 그런 생각을 했다니 너무 어리석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그래서 제가 아주 쉽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앙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회개는 ‘내가 도둑질했습니다. 간음했습니다. 거짓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추하고 더럽고 악한 인간인 걸 발견하고 ‘나’를 부인한 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분은 사역을 하면서 자기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단계까지는 왔지만 자기가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이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역사하신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번에 금식을 하면 될까? 기도하면 될까?’ 하면서 자기가 뭘 해보려고 애쓰고 발버둥치다가 결국엔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하면서 한계에 도달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네가 해서는 안 되니까 내가 해 줄게”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안 됩니다” 하며 주저하는 신앙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이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하나님인 내가 너를 보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내쫓고,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 하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겠다는데 모세는 “나는 입술이 둔한 자입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보다도 ‘나’라는 존재를 더 크게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하실 거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9장을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셔서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이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은 믿었지만 죽은 오빠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하나님이지만 이건 못하실 거야! 이 일은 안 돼!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니까 신앙을 굉장히 어렵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면

제가 제 성격을 들여다 보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신앙생활 하기에 굉장히 나쁜 성격의 소유자임을 느낍니다. 더더욱 목사가 되기 위한 조건을 열 가지 정도 꼽는다면 그 중에 하나도 갖추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고향 친구들은 다 웃으면서 “너희 교회에는 목사 할 만한 사람이 정말 없는가보다. 너희 교회는 너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될 수 있어?”라고 합니다. 지금은 제가 신문이나 잡지에도 나오니까 “그 어찌하다 목사가 돼서 신문에도 나오대”라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지요. 하나님은 목사와 가장 거리가 먼 사람을 목사로 만드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물었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예, 야곱입니다. 전 삐뚤어진 놈, 꼬부라진 놈, 뒤틀린 놈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너는 오늘부터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어”라고 하시면 그날부터 이스라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능지수가 아주 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지혜의 마음을 일으키시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병이 들어 하루 동안 건강하다가 사흘 동안 누워있고, 또 하루 반듯하다가 일주일 동안 누워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건강하게 하시면 아무 문제가 안됩니다.
절망과 어두움, 근심과 염려 속에 빠져있던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소망과 믿음을 불러 일으키면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변화의 근원되신 하나님

여러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읽어보면 성경은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깊은 흑암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땅에 변화를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기 시작하니까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고, 새가 노래하고, 물고기가 헤엄쳐 다니고, 나비가 춤추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변했습니다.
성경은 전부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아쉽게도 사람들은 “삶이 따분하다, 어렵다, 힘들다, 변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변화의 근본되신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변화 입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노력과 방법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감정이 배제된 성경

오늘은 여호수아 2장의 기생 라합에 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여러분, 소설 작가는 사건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감정을 넣어서 글로 만듭니다.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감정이 전달되어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쓰기 때문에 소설은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전혀 감정이 표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딱딱하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실 때 감정을 넣을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사실이라도 감정은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정확한 사실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종종 상상을 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다는 내용을 읽고 난 뒤에 세수나 이발이나 목욕을 하면서도 그 장면을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그림이 그려집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떡이 자꾸 나오니까 베드로가 신이 나서 “자, 이리 와요, 이리 와. 떡은 얼마든지 있어요.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내가 가져다 줄게요” 하며 떡을 나눠주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너무 재미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읽으라고 뼈대만 있습니다. 거기에 살을 붙여보면 정말 흥미롭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

성경은 기생 라합에 관한 이야기도 감정 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합은 굉장히 많은 남자들을 상대했던 기생이었습니다. 그는 남자들을 상대할 때마다 직업적으로 남자들이 좋아하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고, 한 번도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으로 여리고성에 왔던 살몬을 만나면서 처음으로 마음이 통했습니다. 마음의 세계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될 때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밖에서 “문 열어. 문 열어” 하고 두드릴 때 기생 라합은 깜짝 놀랐지만 그들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붕에 눕게 해서 삼대로 덮어놓았습니다. 이어 여리고 왕이 보낸 군인들이 라합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문 열어. 뭐해.” “오늘 영업 끝났어요.” “문 열어, 빨리.” “술도 떨어졌는데 내일 오세요.” “문 열어.” 라합이 문을 열었을 때 깜짝 놀라는 척 했습니다. “어휴, 군인들이 왔네요. 왜 그러세요? 영업 끝났는데요.” “여기 이상한 사람 둘이 왔지?” “아, 그 두 사람이요? 왔어요.” “어디 갔어?” “성문 닫을 때가 됐다면서 막 뛰어 갔어요. 빨리 따라가 봐요. 멀리 못 갔을 거예요.”

정탐꾼을 영접하고

삼대 아래 숨어 있던 청년 중 하나인 살몬이 그 상황을 듣고 있다가 ‘저 여자, 그냥 술만 팔고 몸만 파는 기생인 줄 알았는데 적인 우리 앞에서 어떻게 저리 결단성 있고 지혜롭고 담대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신들을 살려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보통 여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대담함과 재치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너무 놀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런 여자가 어쩌다가 기생이 되었을까? 이혼을 당한 걸까? 아니면 부모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나? 저 여자는 기생으로 살기엔 너무 아까운 여자야. 술을 팔지만 마음은 너무 분명한 여자야.’ 짧은 순간에 살몬은 기생 라합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라합, 당신은 내가 정탐꾼인 줄 알면서 어째서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어요? 군인들에게 적발되면 당신도 죽을 텐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걸었나요?” “나야 술파는 여자니까 죽어도 괜찮아요. 그러나 당신들은 살아야지요. 당신들이 아모리 왕 바산과 시혼을 죽인 것을 우리가 들었어요. 또 홍해가 마르고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다는 것도 들었어요. 그래서 당신들이 여리고에 쳐들어올 것을 알고 우리는 다 간담이 녹았어요. 내가 당신들을 살려준 것처럼 나와 내 아비 집을 살려주세요.”
그러면서 둘은 사랑을 했지만 그러한 내용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살몬이 떠날 때 라합이 “살몬 씨, 몸조심해요. 당신만 생각하면서 기다릴게요”라는 이야기라도 한마디 하지 않았겠습니까?

‘살몬’과 맺은 약속

그들은 여리고성이 멸망하는 날, 성벽에 낸 기생 라합의 창에 붉은 줄을 매면 라합과 그의 가족을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살몬과 라합은 결혼도 약속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그 약속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왜 나 같은 기생을 아내로 맞이하려고 할까? 아마 목숨을 부지하고 싶어서 그렇게 이야기했을 거야.’ 주변 사람들도 “라합, 김칫국 그만 마셔. 넌 기생이야. 누가 너 같은 기생을 아내로 삼겠니? 말도 안 돼. 그 사람이 좋아하더라도 그 부모가 허락 안 할 거야. 일찌감치 그만 둬”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은 거짓말을 많이 하기 때문에 약속을 믿는 마음이 아주 적습니다. 약속 그 자체보다 자기 생각 속 기준을 더 믿습니다. 약속한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자신이 먼저 판단해서 그 약속을 믿기도 하고 믿지 않기도 합니다.
신앙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도 내 기준과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셨든지 내가 볼 때 될 만한 일인가 아닌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비슷할 때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은데,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전혀 다를 때는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따라 갑니다.

약속을 믿은 라합

하나님은 우리 속에 일하시기 위해 많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단은 그 사실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게 하기 위하여 우리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어려운 쪽으로 틀어 놓았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은 하나님의 기준과 다르기 때문에 세상의 기준으로 될 만한 것을 믿는다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기생 라합이 자기 생각을 믿었다면 ‘그래, 맞아. 나는 기생이야. 나 같은 여자가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 될 그 집에 시집을 간단 말이야’ 하면서 술이나 마시고 신세 한탄이나 했을 것입니다. ‘이 붉은 줄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 놈이 나를 이용해서 살아남으려고 거짓말한 거야. 붉은 줄 다 떼어 버릴 거야. 나는 안 돼’ 하는 식으로 라합의 마음이 흘러갔다면 그는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기생으로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합은 살몬의 약속을 믿기 전에 그와 마음이 먼저 만났습니다. ‘살몬이 나에게 한 약속은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저분의 마음이 담긴 말이야. 난 많은 남자를 만나봤지만 저분은 진실해 보여. 저 눈빛은 진실한 거야.’ 그 말만 아니라 그 마음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보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여러분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확실한 믿음이 서게 됩니다. 저는 때때로 기도하다보면 제 마음이 하나님의 이끌림, 즉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건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신앙생활하면서 ‘나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면 자기를 불신하게 되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제 계획으로 살아 온 삶과 하나님이 도와주신 삶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잘 될 것 같은 기대를 가지고 해 보지만 결국은 다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하는 일은 안 될 것 같지만 그 결과가 아름답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 그러니까 안 돼’라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 마음에만 머물지 말고 ‘나는 지금까지 믿음이 없었어. 그러나 이제는 내 생각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할 거야’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입니다. ‘나는 믿음이 없어. 큰일이야’ 하지 말고 ‘나는 믿음이 없어. 그러나 이젠 믿을 거야’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내 생각에는 죄가 있는 거 같아. 나는 죄를 지었어. 그러나 성경엔 뭐라고 되어 있지? 하나님이 죄가 없다고 하시면 난 죄가 없어. 난 내 생각을 안 믿고 말씀을 믿을 거야. 하나님이 내 죄와 내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어.”

인간의 생각은

제 아내와 살다보면 서로에게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내가 실수하면 “당신이 이번에 이렇게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고 지적을 합니다. 그러면 제 아내가 “잘못했다”고 인정을 합니다. 그러고 난 뒤에 아내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당신, 전에 그렇게 해서 잘못했잖아. 이번에 이렇게 하면 또 그렇게 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 아내는 “여보, 그거 예전에 한 번 얘기했으면 됐지 또 얘기해요?”라며 싫어합니다. 제가 “그만 얘기할게” 하고는 다음에 또 얘기하면 “당신은 그만 한다고 해 놓고…” 하면서 서로 다투게 됩니다. 저는 입으로는 “알았어. 그만 얘기할게” 하지만 마음에서는 안 지워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이 또 잘못할 거 같은데…’ 하는 마음이 듭니다.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니”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저와 다르십니다. 하나님이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 10:17)고 말씀하셨다면 그 분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신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기억 속에 들어가도 박옥수 목사가 곶감 훔쳐 먹은 것, 땅콩 서리한 허물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컴퓨터를 제일 잘 다루는 전문가가 아무리 ‘하나님의 기억’이라는 메모리 속에 들어가서 죄를 더듬어 찾아봐도 그 어디에서도 우리의 허물과 죄는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난 뒤에 하나님은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래도 우리 죄를 기억할 거야’라는 것은 여러분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게 믿음입니다.

허물을 수용하는 마음

신앙은 너무 쉽습니다. 부부 간에도 아내나 남편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나 남편이 그 약점을 수용할 만한 능력이 없을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저나 제 아내가 어떤 실수를 할 때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만 가지면 잘못이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제가 아내를 수용하는 폭이 더 크면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나는 잘못이 없나? 저 사람이 날 위해 얼마나 수고했는데. 저 사람이 능력이 없어 그런 거지, 악한 마음을 갖고 그런 게 아닌데 내가 그걸 이야기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까 싸움을 하지 않게 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큰 잘못을 해도 문제가 안 된다는 마음으로 수용하고 감사할 수 있지만, 사랑이 적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도 용납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용납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사랑보다 천만 배, 우주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허물을 범했을 때 사랑이 적은 우리가 보는 눈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떤 허물이든지 용납할 수 있는 넓은 사랑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지워 버리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우리의 생각과 판단으로 이러쿵저러쿵 판단한다면 그건 정말 악한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내 생각, 내 판단을 다 벗어 버리고 그냥 주의 말씀을 그대로 받을 수 있을 때 신앙은 너무 쉬워집니다.
기생 라합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랑받을 수 없는 여자였지만 사랑을 받았습니다. ‘살몬’이라는 사람의 사랑이 컸기 때문에 기생인 자기를 아내로 받아 주는 그 사랑을 라합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몬은 우리 주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추하고 더러워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우리를 받으시고 사랑하셔서 그의 사람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십시오.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지 말고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나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될 줄 믿습니다.

- 2006.12.3 주일 낮 설교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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