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과 절망 중 과연 어느 것을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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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과 절망 중 과연 어느 것을 바라볼 것인가?
[열왕기하 7장 1절 ~ 8절] 2012. 8.1. IYF 케냐 월드캠프 마인드 강연 중에서-423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2.08.1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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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사람들의 춤을 보며

IYF 월드캠프에 참가한 여러분이 정말 행복해 하는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한국에는 ‘아리랑’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고 부르는데, 한국 사람들은 마음에 있는 한이나 슬픔을 이렇게 노래로 부르면서 풀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사람들은 슬픔이나 근심이 있을 때 춤을 추면서 다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춤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발 아래에 있는 잔디가 “여러분이 즐거우면 나는 밟혀도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1994년에 처음으로 케냐에 왔었습니다. 그 당시 제가 아는 분의 딸이 대학을 다니면서 합창단을 만들었는데, 제가 케냐를 방문했다고 제가 묵던 호텔로 노래를 들려주려고 왔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그냥 노래를 부르는데, 케냐 사람들은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합창단장이 저더러 춤을 추라고 해서 한 번도 스텝을 밟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냥 춤을 췄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것을 카메라로 찍었는데, 나중에 제 아내가 그걸 보더니 스텝이 하나도 안 맞다고 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우리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말씀이 주는 힘

이번 월드캠프 기간 동안 여러분이 성경을 많이 배우지는 못하지만, 여러분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이 정확하게 자리를 잡으면 이젠 여러분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힘이 여러분을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서 어둠과 슬픔, 죄를 이겼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저에게 IYF 학생들은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밝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어서 그 말씀이 그들에게 기쁨과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내일 이맘때에”

저는 전 세계를 다니며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되었는데 케냐에도 여러 명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처럼 성경 말씀 중에도 저와 참 친한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열왕기하 7장 말씀이 그렇습니다.
한번은 미국에 있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아들의 문제를 상담한 결과, 그 친구의 아들이 한국으로 와 우리 집에 머물면서 저랑 상담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제가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 아들이 어떠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때 저는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아들이 저희 집에 온 지 좀 됐는데도 변화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내일 이맘때쯤 되면 변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Tomorrow About This Time’이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 아들뿐만 아니라 제가 당면한 많은 문제 앞에서 저는 그 상황을 해결할 만한 능력이 없고 잘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Tomorrow About This Time’이라는 이 말씀이 제게 소망이 되었습니다.

절망적인 사마리아 성

열왕기하 7장을 보면 아람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을 에워쌌습니다. 일본 사람은 성을 쌓을 때 왕궁만 쌓고, 한국 사람은 도시 전체를 쌓고, 중국 사람은 나라 전체를 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는 ‘만리장성’이라는 유명한 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한국 사람처럼 성을 쌓을 때 도시 전체를 둘러쌓았나 봅니다. 그래서 아람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을 때 사마리아 성문을 닫아 방어를 했습니다. 도시는 성을 쌓아 방어할 수 있었지만, 성 밖에 나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굶주리기 시작했고, 기근이 심한 나머지 여자들이 심지어 자기 아기를 삶아 먹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사마리아 성에는 점점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소망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들은 절망 속에서 한 명씩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이 “내일 이맘때에” 하며 소망을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된 하나님의 종은 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이 성경이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전하다

제가 우리 교회 성도들과 신앙 상담을 하다 보면 형제자매들이 자신의 이런저런 문제를 심각하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분이 가진 절망이 제 마음에 자꾸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아, 이거 정말 안 되겠네. 이 문제를 어떻게 하지’ 하며 암담해집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면 ‘이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실까? 이럴 때 예수님도 이 문제를 해결하시지 못해 절망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절대 그러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저에게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과 같이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절망스럽거나 낙심되는 말씀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소망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려면 저도 소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소망이 있는 말씀을 제 마음에 기억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사마리아 성이 기근으로 다 죽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종도 힘없이 절망적인 죽음을 이야기했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왕하 7:1)고 말했습니다.

사단의 음성을 들으면

여러분, 어떤 사람이 절망하고 자살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게 되면 어떤 형편이든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심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이 우리 마음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단은 우리에게 ‘넌, 안 될 거야, 이 병은 낫지 않을 거야, 넌 실패할 수밖에 없어’ 하는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그런 사단의 음성을 듣다 보면 ‘이 문제는 기도해도 안 되겠다. 예수님이 도와주셔도 안 되겠네’ 하며 절망 속에 빠지게 됩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그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셨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빠는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어?’ 하며 자기 생각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나사로가 있는 무덤에 가셨는데, 큰 돌이 무덤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자 마르다는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소망을 말씀하시지만 마르다는 절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40)고 하셨습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을 가지고 예수님의 소망을 엄습하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전기가 전선을 통해 흘러가듯

어느 날, 저는 “목사님, 김 형젠데요. 암이 굉장히 심해 전북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아요”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광주로 내려가는 길에 전주에 들러 김 형제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제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 병실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어머니는 침대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그 아내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김 형제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그들의 마음에 임한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제 마음을 눌러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저는 만일 이 시간에 예수님이 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 형제를 보셨다면 분명히 이 형제를 고치셨을 거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가서 소리쳤습니다. “김 형제, 내 목소리 들려요? 눈 좀 떠서  나를 쳐다보고 대답을 좀 해봐요.” 그러자 그 형제가 눈을 떠 저를 보았습니다. 저는 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형제는 온몸에 암이 퍼져 2,3일 안에 죽을 수도 있대요. 그러나 이것은 형편에 불과해요. 만일 예수님이 여기 계신다면 틀림없이 형제를 고쳤을 거예요. 예수님이 형제를 고치실 것을 믿어요? 전기가 전선을 통해 흘러가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마음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형제 마음에 형제를 일으키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임하면 그 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제, 빨리 일어나요.”
열흘 후에 김 형제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다 죽어가던 목소리가 힘이 넘쳤습니다. “목사님, 저 오늘 퇴원해요. 암이 깨끗이 나았대요. 의사가 퇴원하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그 형제를 깨끗하게 고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망과 사단의 절망

여러분, 오늘 읽은 이 말씀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면 얼마나 놀라운 소망이 그 마음에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왕의 장관이 뭐라고 말합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망을 본 사람들은 소망 속에 살고 사단의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살게 됩니다. 성경 속에는 수많은 소망이 담겨 있지만, 오늘날 참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도 소망이 아닌, 절망 속에 살고 있습니다.

무엇을 볼 것인가?

저는 케냐에 와서 케냐에 있는 사파리인 마사이마라에 가보았습니다. 사파리에는 얼룩말이나 임팔라와 같은 초식동물도 있고 사자나 하이에나와 같은 육식동물도 있는데, 초식동물은 절대 고기를 먹지 않고 육식동물은 절대 풀을 먹지 않습니다.
사자가 사냥할 때는 여러 마리의 사자가 먹잇감을 포위해서 사냥하는데, 서열 1위에 있던 사자도 나이가 들어 사냥을 잘하지 못하면 젊은 사자의 도전을 받아 서열 싸움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싸움에서 지면 무리에서 쫓겨나 비참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냥도 잘할 수 없다 보니 며칠씩 굶게 됩니다. 그럴 때 사자가 풀을 뜯어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만약 사자 학교가 있다면 사자를 불러다 놓고 사냥을 못할 때를 대비해서 풀 먹는 것을 연습 시키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절대 풀을 먹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도 절망을 보는 사람과 희망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망을 보는 사람은 소망이 보여도 그것을 쳐다보지 않고 절망만 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소망을 보는 사람들은 아무리 절망스러운 것이 보여도 그것을 보지 않고 소망만 바라보고 삽니다.

벤허와 메살라

제가 한번은 ‘벤허’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일 가는 유대 귀족인 벤허와 메살라는 친구였는데, 메살라가 후에 장성해서 신임 총독의 사령관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 후부터 그들은 이념적으로 대립하여 원수가 됩니다. 메살라는 로마의 권력을 믿었고 벤허는 하나님의 소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메살라는 친구 벤허를 처벌함으로 로마의 위대한 장군임을 나타내려고 벤허에게 누명을 씌워 노예선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거기서 로마 함대의 사령관인 아리우스를 전쟁에서 구하게 됩니다. 아리우스는 서열이 아주 높은 집정관이었는데, 자기 생명을 구해준 벤허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인장반지를 벤허에게 끼워주며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이제 벤허가 메살라를 찾아 로마에서 이스라엘로 옵니다. 메살라가 벤허를 보면 죽이려고 하겠지만, 벤허의 손가락에는 아리우스의 반지가 끼어져 있었습니다. 벤허는 메살라를 만나기 전에 그에게 “아리우스의 아들로부터”라고 적힌 칼을 선물로 보냅니다.

아들을 나타내는 증표

메살라가 선물을 받고는 ‘아리우스의 아들은 오래 전에 죽었잖아. 최근에 양아들을 얻었다더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벤허가 나타납니다. “메살라, 나다.” 메살라가 깜짝 놀랍니다. “네가 어떤 요술로 아리우스의 아들이 됐지?” “요술의 주인공은 너야. 네가 나를 노예선으로 보냈어. 내가 노예선에서 아리우스를 구했다. 이 반지의 표시가 무엇인지 알지?”
벤허는 인장반지를 찍어 메살라에게 보여줬습니다. 그 반지를 끼고 온 벤허는 옛날의 벤허가 아니라 아리우스의 아들인 것입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내 어머니와 누이동생의 소식을 알려 달라. 그러면 괴로이 노 젖던 일을 잊겠다.” 메살라는 그 반지를 보고 기가 죽어 가족을 찾으려면 총독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벤허가 말합니다. “허가를 받아내! 내일 다시 오겠다.”
벤허가 아리우스의 반지를 꼈지만 그 반지의 힘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감히 메살라 앞에 서겠습니까? 그는 아리우스 반지의 위력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메살라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말씀의 위력

저는 사단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사단아, 나다.” “네가 무슨 수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어?” “요술의 주인공은 너다. 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 그 피로 죄 사함을 받았어. 성경의 약속을 알겠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라고 하면 사단이 꼼짝 못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는 선지자의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내일 이맘때에 정확하게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생각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코트디부아르에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저는 피곤하지만 굉장히 행복합니다. 여러분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아프리카 월드캠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 속에 하나님이 일하는 것을 많이 봤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일 때

사단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마음을 넣었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의 마음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오늘밤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는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100세에 어떻게 자식을 낳아?” 하고 그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게 속아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능력으로 일하셨습니다. 내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은 하나님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속에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네 명의 문둥이들처럼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명이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 하나가 그들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왕하 7:3~4)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그 마음을 따라 아람 진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문둥이고 굶었고 병들었기 때문에 아람 진으로 가는 걸음은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구든지 여러분의 생각을 버리고 네 명의 문둥이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으면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이 힘 있게 일하실 것입니다.          

- 2012. 8.1. IYF 케냐 월드캠프 마인드 강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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