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6.25! 백마고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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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6.25! 백마고지를 찾아서…
연재 현장탐방③- 백마고지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1.06.1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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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오늘날 대한민국. 하지만 그 바탕에는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희생이 있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백마고지 전적지(철원군 대마리)를 찾아가 보았다.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처절한 혈전(血戰)

2011년! 6?25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 상태이다. 6?25전쟁 당시 남북의 전략적 요충지인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 동안 불과 395m밖에 되지 않는 고지를 빼앗기 위해, 국군 제9보병사단과 모택동으로부터 ‘만세군’ 칭호까지 받은 중공군 정예 제38군 3개 사단이 12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전투이다.
전투 기간 중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처절했던 혈전이었고, 이 전투로 인해 중공군 1만여 명이 사상 또는 포로가 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에도 총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는 고지의 모습이 백마의 모습은 아니지만, 피아간(彼我間)에 30여만 발의 포탄이 떨어지면서 처절한 산의 형상이 백마의 와상(臥床)같아서 ‘백마고지’라고 불렸다.

수많은 젊은이들 희생돼

현재 백마고지 전적지는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와 조국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 5월 건립된 전적기념관과 이외에도 위령비ㆍ전적비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기념관에는 당시 백마고지의 전투 영웅인 제9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사진과 유품이 있다. 또한 백마고지 10차 전투시 적의 기관총 화력으로 혼전만 거듭할 때 양손에 수류탄을 지닌 채 적의 기관총 진지를 박살내고 산화한 ‘백마3용사’의 銅부조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전적지 끝쪽에서는 DMZ 내에 있는 백마고지를 볼 수 있는데, 지금은 평화로워 보이는 철원평야이지만 무수히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사라져 간, 전쟁의 비참함이 생생히 그려지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날 가족과 함께 전적지를 찾은 심동섭(46세, 男, 서울 신당동) 씨는 “동족끼리 싸웠다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요즈음 세대들이 국가관이나 애국심이 부족한데, 평상시에도 학생들이 선열들의 희생정신과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다양한 안보체험 교육이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 없어야

백마고지전투 참전용사인 박명호(백마고지참전전우회) 회장은 “당시 포탄의 무차별적인 발사로 인해 시신이 갈기갈기 찢긴 전우를 흙마대에 넣어 후방으로 보낸 아픈 기억이 있다. 요즈음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이 어떻게라도 될까 봐 나라 걱정으로 마음에 병이 들 정도”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들꽃처럼 사라진 젊디젊은 장병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호국영령들의 희생정신이 헛되지 않도록, 그리고 다시는 비참한 전쟁이 이 땅에 일어나지 않도록 온 국민이 먼저 북한의 실체를 바로 알고 그들에 맞서야 되지 않을까.

이미경 기자 mk1777@good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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