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종교 개혁의 역사_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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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 개혁의 역사_ 3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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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이 붙었다. 당시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교황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항목들이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모든 대학과 종교중심지는 흥분으로 야단법석이었다. 이 역사적인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해 내건 사람은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이자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였다.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교황이 아닌 성경에 신앙의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확신 때문에 그는 개혁자가 되었다.

루터의 구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38-1546)는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튀링켄 지역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슈토테른하임 마을 근방에서 벼락을 맞아 질겁한 나머지 수도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 후 사제가 되었고, 1512년에 신학박사가 되었으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 연구 교수가 되었다.
루터는 최선을 다해 거룩의 길을 좇았다.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는 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빠짐없이 실천하기로 결심했다. 사흘 동안 빵조각 하나도 입에 대지 않고 굶기도 했고, 규칙에 정해진 이상으로 고행과 기도에 전념했다.
“나는 참으로 경건한 수도사였고 엄격하게 수도원 규칙을 지켰다. 만약 수도원 생활로 수도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 점은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수도사들이 증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무슨 수를 써도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애태우고 있었다. 순례나 미사도 구원의 확신을 주기는커녕 더 큰 갈등과 좌절만 안겨주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어떤 때는 내리 여섯 시간을 고해하곤 했다. 고해도 소용없었다.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이었다. 말할 수 없는 불안이 그를 사로잡았고 영혼의 공포가 엄습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가르쳤는데 성경을 연구하면서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거듭남을 이렇게 간증했다.
“로마서를 이해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 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이 큰 장애였다. 나는 그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미워했다. 내가 스승들에게 배운 바로는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의’로 죄인들과 의롭지 못한 자들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로마서 1장의 그 말씀에 끈질기게 매달렸고 바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에 대해서 밤낮 생각하던 어느 날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는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데, 바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 나타나며, 그 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거듭났고 천국의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느꼈다.”(루터의 라틴어 저작 서문 중에서, 1545)

카톨릭 교회의 부패

콘스탄틴이 밀라노 칙령(서기 1313년)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형성되었다. 그는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지하교회를 공인하였지만, 공인된 교회는 성경적이지 않았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무리들은 카톨릭에 흡수되지 않았다. 그 후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인 중세에 카톨릭이 유럽을 지배했다. 인쇄술이 보급되지 않았던 그때에 성경은 필사본으로 전해졌다.
당시의 교회와 신앙은 성경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언어인 독일어나 영어, 프랑스어로 된 성경이 있지도 않았다. 헬라어, 히브리어로 된 성경은 몇몇 성경학자들이나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카톨릭은 성경과 다른 교회를 교인들에게 가르쳤지만, 누구도 로마 교황청과 카톨릭을 대항하지 못했다. 신앙의 수준은 미신과 다를 바 없었다. 과학이나 학문의 발전이 없었던 이 시대에 인간의 이성은 마비되었으며, 영적 어둠이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중세 교회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일정한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보상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죄인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써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는 구원의 근원이나 기초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에 대한 열매인 것이다. 이 중세교회의 공덕개념대로라면 인간은 결국 자기 행위가 실질적인 거룩함에 도달했을 때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은혜가 아닌 보상이요, 대가가 되는 것이다.
루터가 살았던 16세기에는 교황 이하 카톨릭 성직자들의 비리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위해 교황 레오 10세는 면죄부 판매를 계획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카톨릭 교회가 세부적으로 묘사한 연옥에서의 형벌 기간에 대해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면죄부 판매자들은 면죄부를 사는 즉시 구입한 당사자의 죄가 용서되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을 떠나 연옥에 있는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도 연옥을 벗어나 낙원으로 간다고 가르쳤다.
면죄부 판매는 특히 독일에서 성행했다. 마인츠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대주교직을 교황에게 사들이면서 교황과 합의하에 독일에서 면죄부를 판매할 독점권을 얻었다. 판매 수익의 절반은 교황에게, 나머지 절반은 자신에게 배분하였던 것이다. 1517년,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 촉진을 위해 수도사 테첼을 설교사로 파견했다. 그는 “연보궤에 돈이 ‘쟁그랑’ 떨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 오른다.”고 설교했다.

종교개혁

면죄부 판매에 분개한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95개조 반박문’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교황은 처음에 루터의 행동에 대해 수도사들끼리의 논쟁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루터의 영향이 의외로 확대되자 교황은 루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519년 루터는 변사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설전을 벌였다. 에크는 교묘한 화술로 “루터가 이단자 후스의 의견을 옹호한다.”고 몰아세웠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로마 교황의 지상권을 부정했고 이단으로 화형에 처해진 후스의 논제를 지지한다는 점을 밝혔다. 얀 후스는 14세기 말 성직 매매 등 카톨릭 교회의 부패와 잘못된 제도를 지적하면서 성경 중심의 믿음을 강조한 존 위클리프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파하여 이단으로 판정된 사람이다. 그때 비로소 루터는 자신의 신앙이 카톨릭 교회와 교황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해야 성립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1520년, 카톨릭의 부정부패를 비난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하는 논문을 발표했고 그의 논문들은 널리 읽혀졌다.
루터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교황은 마침내 1520년에 파문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루터는 파문교서를 불태워 버렸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전 개혁자들의 시도와 달리 강력하고 지속적인 파장을 일으켰다. 카톨릭의 분열과 교황권에 대한 불신 고조, 르네상스(문예부흥운동)로 인한 이성적인 사고의 성장, 15세기 중반에 발명된 활판인쇄술 등에 힘입어 개혁사상은 당대 지식인 사회에 빠르게 전파되었다.
사태가 점차 악화되자 황제인 카를 5세는 1521년 보름스 의회로 루터를 소환했다. 과감히 보름스로 달려간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황제의 요구를 면전에서 거부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므로, 내 양심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올바르거나 유익하다고 증명되지 않는 한 결코 내 생각을 철회하지 않겠거니와 또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카를 5세는 루터를 제거하려 했으나 프리드리히의 도움으로 그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루터는 한적한 바르트부르크에서 기사 게오르게라는 이름으로 9개월간 은신하면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다. 이후 구약성경 번역까지 루터는 평생 성경의 번역과 교정작업에 매달렸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했고 이를 통해서 사람들은 루터의 주장이 참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터는 또한 카톨릭 교회와 토론했던 논쟁 내용을 그대로 발간했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의 주장들을 판단할 수 있었다.
1529년에 카를 5세가 루터의 운동을 강제로 제거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의 몇몇 제후들이 ‘항의’하면서 일어났다. 여기서 ‘항의자’라는 의미의 ‘프로테스탄트’가 신교도들을 뜻하는 말로 굳어졌다. 1531년 루터파 제후들이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확고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면서부터 구교파와 신교파가 치열한 싸움을 했다. 그 후 30년 전쟁 등 많은 전쟁과 희생이 치러진 후에야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루터는 1546년, 고향인 아이슬레벤에서 63세에 병으로 사망했으나 그의 신앙은 북부 독일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 뿌리를 내렸다.

기독교는 복음의 회복과 타락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 교회의 부패상과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모습이 놀랍도록 닮았다. 성경에서 멀어진 교회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고, 목회자들의 타락과 부정이 극에 달하고 있다. 성경을 알지 못하고 타락할 대로 타락한 카톨릭 교리를 믿었던 중세 사람들과 현대 기독교인들도 다르지 않다. 구원으로 이끄는 인도자를 만나지 못해 죄로 인해 고통하며, 거듭나기 전의 루터처럼 헛된 노력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루터 시대의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루터의 개혁사상과 그를 막으려는 기존 세력간의 논쟁을 보면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성경이지만 가장 읽히지 않는 책 또한 성경이다. 중세를 지배한 정통교회였던 카톨릭의 이단논쟁과 마녀사냥처럼 지금도 이단시비가 횡행하고 있다. 진리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진리를 가리는 잣대가 되어야 하는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비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제대로 듣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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