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한나가 되고 사무엘이 되어 사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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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한나가 되고 사무엘이 되어 사는 삶
[사무엘상 2장 18절 ~ 26절] - 2019. 6. 23. 오전 주일예배 설교 - 768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9.06.28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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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나라 태국에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어제 저는 태국에서 헌당예배를 드렸습니다. 큰 예배당에 사람들이 가득찬 모습을 보며 “더 이상 태국은 불교국가가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늘나라 국민이 사는 나라다”라고 말했습니다. 태국의 김학철 선교사 부부는 어떻게 보면 바보스러울 정도로 단순합니다. 몇 년 전에 김 선교사에게 태국에서 IYF월드캠프를 한번 하자고 했더니 기절할 듯이 당황해하셨습니다. 원래 태국은 불교국가라서 그동안 전도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김 선교사님이 태국에서 월드캠프 개최를 위해 대학교를 찾아다니며 섭외를 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지금은 태국에서 해마다 월드캠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천여 명의 태국 대학생들이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통해 교회를 돕고 있습니다. 김 선교사님은 예수님만 사랑하시니까 60세의 나이에도 천진난만했습니다. 그런 김 선교사님을 보며 태국 교회 형제자매들이 정말 행복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들은 김 선교사님을 닮아서 아주 순수하고 얼굴에서는 기쁨이 넘쳤습니다. 

복음 전하며 지낸 군 생활 

저는 1962년에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후 압곡동과 장팔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군에 입대했습니다. 대구 50사단에서 신병교육을 마치고 원주 통신훈련소에서 3년간 군 생활을 하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새로 들어오는 신병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기독교인을 파악한 후 주일에는 군목이 없는 우리 부대에서 제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예배당이 없어 산골짜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교육 장교님이 보시고 깜짝 놀라면서 교실을 마련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부대로 옮기지 않고 계속 복무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군 생활 3년 동안 외출 외박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매주 일요일 오전에 예배를 마치면 보통 20명가량의 병사들이 남아있는데 그들과 개인 신앙상담을 하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배도 고프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지만 구원받기 전 세상에서 더럽고 악했던 나같은 사람을 통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거듭났을 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장갑을 잃어버렸을 때

한번은 부대에서 장갑을 잃어버렸을 때 즉시 ‘나도 장갑 한 켤레 훔쳐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장갑을 훔칠 수 없었던 것은 마치 주님이 제게 ‘네가 장갑 훔쳐도 들키지 않을 수 있어. 그런데 만일 장갑을 훔치다가 들키면 앞으로 내무반에서 복음을 어떻게 전할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도둑놈이 무슨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도둑질하는 그날, 복음 전하는 일은 끝나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가진다 해도 복음을 전해서 한 사람이 구원받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아찔한데 그 당시 만일 제가 장갑을 훔치다가 들켰다면 제 3년의 군 생활은 너무나 비참했을 것입니다. 
1968년, 제대할 무렵에는 김신조 사건이 일어나서 병사들의 제대가 연장되었습니다. 그 후 육군본부에서 제대 특명을 내렸습니다. 보통 5일이나 1주일 단위로 ‘몇 월 며칠 입대한 사람부터 몇 월 며칠 입대한 사람까지 제대’라고 공문이 내려오는데, 저는 53일 특명을 받았고 53일 째가 저의 입대 날짜여서 다른 병사들에 비해 50일 가까이 빨리 제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대에서 제 별명은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였고, 부대장교들은 저에게 ‘너는 제대할 때까지 복 받고 간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제대하면서 통신훈련소 정문을 나설 때 ‘이러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면 내가 사하라 사막이나 남극에 혼자 가 있어도 얼마든지 살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나의 기도

오늘 아침에 읽은 사무엘상 2장은 ‘한나’라는 여자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엘가나’에게는 ‘한나’와 ‘브닌나’라는 아내가 있는데, 그는 두 아내 중에서 한나를 더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브닌나는 남편의 사랑을 못 받아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브닌나는 늘 한나에게 “네가 남편의 사랑을 받아도 소용없어. 나중에 우리 아들이 크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하는 식으로 한나의 마음을 격동시켰습니다. 
한나가 늘 울고 있으면 남편이 “여보, 왜 그렇게 울어? 내가 열 아들보다 낫지 않아?” 하며 위로했습니다. 그런 남편의 위로에도 한나는 괴로우니까 어느 날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했습니다. 매년 제를 드릴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즐겁게 제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한나는 그냥 앉아서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저 여자가 포도주에 취해서 저렇게 아침부터 중얼거리며 앉아 있나?’ 하며 한나에게 “포도주를 끊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나는 “내 주여, 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심이 아니라 제 마음에 원통함이 있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며 계속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사무엘’을 얻은 후

여러분, 한나가 ‘하나님, 만일 제게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사무엘’입니다. “그 사람 엘가나와 그 온 집이 여호와께 매년제와 그 서원제를 드리러 올라갈 때에.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뵈게 하고 거기 영영히 있게 하리이다”(삼상 1:21~22) 하며 한나는 여러 해 동안 아기를 갖지 못해 고생하다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젖을 떼면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한나의 아들이 젖을 뗀 시기가 성경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진 않습니다. 대략 다섯 살쯤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나가 두 벌 정도의 옷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내가 여호와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한나가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아들을 드리기 위해 성전에 남겨 놓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누가 밥을 먹여 줄까? 누가 목욕시켜 줄까?’ 하며 자신이 좀 더 키우고 싶고 보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그런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셨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

사무엘은 성전에서 제사장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와 같이 자랐습니다. 엘리 대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일 높으니까 그 아들들이 무슨 일을 해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이지만 회막에서 제사드릴 때 제사드릴 고기를 탐내어 아직 제단에 올리지도 않은 고기를 가져다 구워먹으려 하고 또 회막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한 채 육신의 욕망을 따랐는데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신의 두 아들을 제사장으로 선임해 놓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전에서 일할 사람으로 키우지 않아,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고 또 엘리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인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원래 제사장이 나가서 법궤를 맞이하고, 성전으로 모셔 놓고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삼상 6:19) 하며 궤 안을 쳐다본 벧세메스 사람들이 죽게 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사무엘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해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정돈하면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가 사울이 타락하니까 사울을 폐하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하나님의 일을 하며 이스라엘을 이끌었습니다. 
한나의 영적인 측면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나의 영적인 측면을 살펴봐야 합니다. 한나는 ‘아들아, 보고 싶다. 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다. 좋은 옷을 입히고 네가 재롱부리는 걸 보고 싶다’라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다 버리고 하나님에게만 이끌렸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성전에 보내 놓고 얼마나 보고 싶었겠어요? 그는 아들이 보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직접 아들을 돌봐주지 못했기에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대제사장인 아버지 엘리 제사장의 손길을 받고 자란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똑같은 성전에서 사무엘도 자랐지만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태만하며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하여 같은 날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아들이 죽고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앉아있던 의자에서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장팔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어느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습니다. 며칠 전 명품 핸드백 쇼핑몰을 경영하는 분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이 이야기하시길 핸드백 한 개에 천만 원이 넘는 것을 색깔별로 열 개 이상 구매해 자랑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맛으로 산다고 합니다. 저는 ‘세상에 자랑할 게 그렇게 없나? 예수님을 자랑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제 곁에 계시면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복음을 전했을 때 처음으로 구원받은 손을순 자매님을 생각하면 ‘내가 복음을 전해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네’라며 기뻐했던 기억에 지금도 행복합니다. 처음으로 자매님이 구원받고 장팔리에서 있던 1년 반 동안 40여 명이 구원받았는데, 그 당시 가난하고 춥고 배고팠지만 제게는 정말 행복했다는 기억밖에 없습니다. 

‘곰실’에서 화재가 났을 때

예전에 우리 교회 맞은편 산골에는 ‘곰실’이란 동네가 있었는데 그 동네에 17살쯤 된 소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소년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제가 열 마디해도 대답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소년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 오라고 하니까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네 한 어른의 꼴머슴살이로 주일에 예배드리러 올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소년에게 형편이 그렇다고 주일에 교회 안 와도 된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우리 기도하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실 거야”라고 이야기했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싶었습니다. 
어느 해 겨울에 그 동네에서 불이 났습니다. 제가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가서 소방서에 연락해 소방차가 출동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입구 약 500m 앞에서 소방차가 고장 나서 마을로 못 올라가게 되어 저 혼자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추운 겨울 시골집에서는 솔가지를 꺾어서 채처럼 쌓아 놓는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불이 나니까 온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 울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이 ‘이 추운 겨울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리면 동네 사람들에게 양식이 없겠다’ 싶어서 아무 집이나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쌀자루를 끌어냈습니다. 

꼴머슴 형제의 집주인

어느 집에 들어갔더니 한 젊은 부인이 “오빠, 오빠, 방에 아기! 아기!” 하며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제가 용기를 내서 불이 붙은 방으로 들어가 보니 다행히 누가 아기를 데려갔는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집에서는 오십대 중반의 어른이 완전히 혼이 나가서 “물, 물, 물” 하고만 있었습니다. 제가 그 집의 곳간 문을 여니까 벼가 잔뜩 들어있는 가마니들이 높이 쌓여 있었습니다. “아저씨, 빨리 와요. 이거 같이 들어요” 하고 전부 마당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날 저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는데 이 동네 화재 소식이 당시 신문에 났습니다. 
그 후 동네 아저씨 한 분이 고맙다며 ‘파랑새’ 담배 두 갑을 사가지고 교회로 오셔서 제게 “아저씨, 담배 피워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담배 안 피웁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것 피세요” 하며 굳이 주셨습니다. 여러분, 정말 놀랍게도 그 아저씨는 얼마 전에 구원받은 형제가 꼴머슴으로 지내는 집주인이셨습니다. 제가 “아저씨, 농사철에는 꼴머슴에게 일 시키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좀 보내주십시오”라고 하니까 그 아저씨는 “그래요” 하며 그 소년 형제가 교회에 올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신기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한나는 아들을 낳지 못해서 여러 해 브닌나로부터 격동되었습니다. 그런 한나에게 하나님께서 사무엘이란 아들을 주셨을 때 한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이라며 그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나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우리 사무엘을 하나님이 쓰시는 귀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저는 하나님께 제 아들을 드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아들을 가진 부인 자매님들이 많습니다. ‘주님, 정말 이 아들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일에 써 주십시오. 저를 사랑해서 아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이 아들을 드립니다. 제가 엄마지만 이제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한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절제하고, 자기 기쁨의 문을 닫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의 문을 넓게 열었습니다. 매년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가서 아들을 잠깐 보고 돌아올 때마다 섭섭했지만 눈물을 닦고 “사무엘, 잘 있어. 엄마가 내년에 또 올게. 건강하게 지내. 엘리 제사장님 말씀을 잘 들어. 엄마가 기도할게!”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을 누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에만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한나를 아시고 사무엘을 축복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가지 세계 속에서

여러분, 아담과 하와 때부터 수천 년 동안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마귀가 우리를 이끌어서 우리의 관념이나 지식, 경험 등 모든 것을 물질적으로 해석하는 세계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것을 이루는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 1:1~3)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그 말씀을 이룰 만한 능력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신 말씀을 믿기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해’ 하며 인간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1962년, 제가 했던 모든 일이 실패하면서 내 생각을 따라가면 실패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놀랍게 예수님께서 제 마음속에 살아서 일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제력과 믿음을 가르쳐야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과 귀, 손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지면서 그 귀함과 아름다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것, 손으로 만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 눈을 감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쁨과 은혜를 한나처럼 감사해하며 살아봅시다. 하나님은 사무엘이 태어난 후 한나에게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귀하고 영광스럽게 이끌어 가십니다. 
여러분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다면 맹목적으로 위하지만 마십시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아들이었지만 자신의 욕망을 따라 흘러가서 범죄하고,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을 받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자기 욕구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자제력과 믿음을 가르친다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사무엘이 태어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 확실히 믿습니다. 

이 시대의 ‘한나’가 된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한나를 격동시켰던 브닌나, 즉 눈에 보이는 것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과 부딪쳐서 하나님이 우리 속에 일하시게끔 하는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한나가 브닌나와 싸우는 동안에는 슬픔에 젖은 채 아들도 낳지 못하고 노년을 맞이했을 겁니다. 한나는 그런 싸움을 싸우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사니까 그의 아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세우는 귀한 일꾼이 되었고, 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얻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요즘 우리시대 젊은이들은 생각하지 않아 문제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구원한 주님을 찬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삽시다. 그럼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계와 전혀 다른 아름다운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 앞에 열릴 겁니다. 또한 우리가 이 시대의 한나가 되고 사무엘이 되어서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욕망의 세계가 아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 2019. 6. 23. 오전 주일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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