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영국 1703~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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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영국 1703~1791)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04.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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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과 개혁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이면에는 보편적인 종교의 흐름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한 복음으로 돌아가 개혁의 흐름을 주도한 믿음의 선진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본지에서는 그 대표적인 인물 중 마틴 루터, 요한 웨슬리, D.L 무디가 걸었던 복음의 발자취를 살펴봄으로써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소년 시절

영국 잉글랜드 링컨셔에서 태어난 요한 웨슬리는 소년시절, 자기를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비해 그리 악한 사람이 아니고 종교심이 두터우며,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고, 기도생활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만 잘 지키면 구원받는 줄 알았고, 자신의 선한 행실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그의 종교심이 남달리 두터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 아들 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청년 시절

웨슬리는 청년이 되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했다. 그러면 어디다 소망을 두었길래 그랬던가? 웨슬리 자신의 대답을 들어보자.

“나는 매주 한 두시간씩 꼭꼭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힘써 지켰다. 매주 성찬식에 참석했다. 말이나 행실에 단 한 번이라도 실수가 있을까 하여 언제나 조심하였다. 속사람의 성결을 위하여 언제나 기도하였다.”

그리스도를 모르고, 신뢰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웨슬리의 선한 행실은 계속되었다.
나이가 들자 웨슬리는 교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명문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과에 들어가 오직 행함, 자신의 선행만으로 스스로를 가린 채 모든 선행을 하고서도 여전히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년 뒤 웨슬리는 병들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행을 하고도 죽음의 문전에 이른 웨슬리에게는 하나도 평안한 것이 없었다. 이대로 죽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실 것 같지가 않았다. 도저히 그런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봉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모든 것이 헛되었다. 안심하고 소망을 걸어볼  데가 없었다.

마침내 웨슬리는 옥스퍼드에서 전 과정을 수료하고 성직자로 임명되었다. 목사가 된 웨슬리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향했다. 아메리카에 있는 인디언들에게 전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면서 그 지루한 항해 중에도 웨슬리는 자기의 종교생활의 연마에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항해 중에 그는 다음과 같은 일과표를 만들어 놓고 힘써 행했다.

4:00~5:00 명상과 기도  
5:00~7:00 성경통독    
8:00~9:00 기도회
9:00~12:00 성경연구  
12:00~13:00 간증시간    
14:00~16:00 전도
16:00~17:00 저녁기도회  
17:00~18:00 명상과 기도
18:00~19:00 성경통독
19:00~20:00 저녁예배    
20:00~21:00 설교

그의 열심에 누가 탄복하지 않겠는가? 쟁쟁한 옥스퍼드 신학부 졸업에다 모든 악조건을 무릅쓰고 언어와 풍속과 생활습관이 다른 이방인에게 선교할 수 있는 여건과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성공회의 사역자가 되었을 망정 정작 그리스도인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정리/ 고갑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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