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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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신 것처럼
누가복음 5장 7절 ~ 26절 - 2018. 8. 12. 주일 오전예배 설교 - 72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8.08.1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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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어보면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일들이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그 역사들이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는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에 사는 과부를 찾아와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물만 말고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여자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어서 아들과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그 여자에게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왕상 17:14)라고 말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이런 상황에당면할 때가 참 많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렇지만 인간적인 면으로 본다면 ‘어떻게 통의 가루가 계속 채워져?’ 하며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빈 가루통이 가득 채워져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시지만 할 수 없는 일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여자가 이제 떡을 만듭니다. “엄마, 배고파요. 저도 떡 먹고 싶어요.” “아들아, 조금만 기다려. 이건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거야. 그러면 가루통의 가루가 가득 차게 될 거야. 엄마가 이제 떡 실컷 먹게 해 줄게.”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떡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막 달려가 가루통을 보았습니다. 분명 비어 있어야 할 가루통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믿음 하나만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역사했던 그대로

제가 1962년 구원받았을 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하나 아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너무나 어둡고 악하게 살았구나. 지금껏 내 생각대로 한 것은 다 실패였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내 생각을 따라가면 망한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말씀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것은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믿었을 때 그 당시 역사했던 그대로 오늘도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이사야 40장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아, 내가 힘이 없을 때 병들었을 때 하나님을 앙망하면 새 힘이 난다고 약속하셨네.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 안 하시니 하나님을 앙망하면 새 힘이 나겠구나!’ 그날 저녁 갑자기 아프리카 라이베리아 선교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선교사님이 울면서 그곳에 단기선교사로 간 최요한 학생이 전갈에 쏘여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한이가 밤에 자다가 전갈에 쏘였는데 낮까지 전갈에 쏘인 줄 몰랐어요.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가보니 의사들이 이미 온몸에 독이 퍼져 늦었다고 합니다.” 

전갈에 물려 죽어가는 한 학생

제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최요한 학생의 심장이 멎어 심폐소생술로 겨우 다시 뛰게 했지만 의사가 앞으로 두세 시간밖에 못 살 거라고 한 상태였습니다. 요한이도 ‘아, 내가 죽겠구나. 너무 괴롭다.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아버지 얼굴 한 번 봤으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최요한 학생과 통화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가능하다고 해서 바꿔달라고 했습니다. “요한아! 내 목소리 들려?” “예, 목…사…님…” “너는 아프리카 전갈에 쏘였대. 너는 죽어가고 있대. 지금부터 내 목소리 잘 들어. 요한아, 나는 오늘 아침에 이사야 40장 31절을 읽었어. 거기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요한아!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안 하셔. 요한이 네가 하나님을 앙망해야 해. 하나님을 바라봐!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대로 새 힘을 주실 거야. 그러면 네가 전갈의 독을 이길 수 있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야!” 

씨가 땅에 심겨졌을 때

신구약 66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며 씨앗과 같습니다. 벼나 보리를 가마니에 넣어서 창고에 놔두면 움직이지도 않고 변화도 없고 아무리 봐도 산 것 같지 않습니다. 씨가 땅에 심겨졌을 때에야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성경책에 덮여져 책장에 꽂혀 있을 때는 백년이 가도 천년이 가도 변화가 없습니다. 씨가 땅에 심겨지듯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닿아서 믿어졌을 때 누구든지를 불문하고 반드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최요한 학생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녘에 최요한 학생 의 병실을 지나가던 간호사가 깜짝 놀랐습니다. 최요한 학생의 혈압이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 겁니다. “의사 선생님! 여기 와 보세요.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 환자 혈압이 다시 올라가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말씀은 어떤 종교 예식을 하기 위해서나 목사가 좋은 설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그 말씀이 여러분 마음에 믿어졌을 때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십일조 잘 내고, 율법 잘 지키고, 뭘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중풍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오늘 읽은 누가복음 5장을 보면 예수님이 한 집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침상에 중풍병자를 실어서 그곳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 도저히 들어갈 방법이 없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 친구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지?” 한 친구가 의견을 냈습니다. “야! 우리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친구를 달아내리자!” “지금 상황이 안되면 예수님을 다음에 만나면 되지 뭐하러 지붕까지 벗기려고 해. 집 주인이 물어 내라고 하면 어떡하려고?” 여기까지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하는 게 부담스럽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환자를 메고 지붕에 올라가는 것도 쉽지 않고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는 것도 쉽지 않고 더욱이 중풍병자를 달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중풍병자인 친구를 고칠 수만 있다면 지붕 벗기는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했는데 예수님이 병을 못고치신다면…’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중풍병자를 메고 온 친구들이 지붕의 기와를 벗기는 상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붕의 기와를 한참 벗기는데 주인이 왔습니다. 주인이 사다리를 흔들며 말합니다. “거기서 뭐하시오! 빨리 내려와요. 왜 남의 집 지붕을 다 뜯어요!” “잠깐만요. 이왕 뜯은 거 우리가 새 것으로 깨끗하게 고쳐 줄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발 좀 기다려 주세요.” “그래도 안돼요! 빨리 내려와요!” 하지만 친구가 확실히 나아서 걸을 수만 있다면 욕 좀 얻어 먹어도 괜찮고 돈 좀 들어도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말씀이 ‘우리 마음에 믿어졌는가? 안 믿어졌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갖다 주면 가루통에 가루가 생길 것인가? 안 생길 것인가?’ 하며 그 마음에서 모든 게 결정 나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말대로 가루통의 가루가 계속 생긴다면 사르밧 과부가 무엇인들 못 주겠습니까? 반대로 엘리야 선지자의 말을 믿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게 떡을 가져다주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 걸린 친구의 병을 확실히 고친다는 믿음 없이는 지붕의 기와를 벗기기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친구가 병에서 낫고 가루통에 가루가 생기고 내가 변하고 자식이 달라진다는 믿음이 있다면 남들에게 욕을 먹고 멸시받고 천대받는 게 뭐가 문제가 되며, 예배당 먼 것이, 좀 날씨가 더운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믿음의 결과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진 것과 그냥 막연하게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헌금 드리는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아들을 출산할 즈음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을 때가 언제였는가 이야기한다면 아내가 아들을 낳을 때입니다. 당시 대구 파동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멀리서 한 분이 복음을 들으러 오셔서 그날 저녁 내내 복음을 전했습니다. 거의 밤 열시 가까이 되었을 때 그분은 죄 사함을 받고 무척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대문 앞까지 배웅하고 기뻐하며 들어오는데 아내가 “무슨 복음을 전하는데 얘기를 그렇게 길게 해요”라며 갑자기 화를 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복음을 전하는 동안 진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편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자신이 배가 아프다고 하면 상담이 중단될 것 같아서 안간힘을 다해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너무나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막한 것은 그날 우리는 점심과 저녁도 굶었고 돈이 십 원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음에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택시를 불러서 사정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시켜 놓은 다음에 해결할까? 아니면 교회 성도들에게 전화할까?’ 그런데 제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사람에게 제 필요를 구하는 것이 용납이 안되었습니다. 저는 구원받고 난 뒤 어려운 일을 만날 때 한 번도 사람에게 부족하다 필요하다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실망시키지 않아

그날 제 마음에 싸움이 되었습니다. ‘이러다 아기가 나오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마음 한 쪽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셔, 분명히 나를 못 본 체 하지 않으실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이 밤을 새웠습니다. 먼동이 터오는데 며칠 전 구원받은 자매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분명 무슨 일로 찾아왔을 텐데 아내가 진통하는 것을 보고 “사모님, 저는 부산 일신병원 산부인과에서 근무했습니다. 조산원 자격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막 뛰어 나가서 가방을 들고 왔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않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자매님이 부엌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또 뛰어나가서 소고기, 쌀, 미역 등을 사와 우리 모두 식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안 돕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방법이 막 떠오릅니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사실 한 가지는 제가 믿는 하나님은 한 번도 저를 실망시킨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 안에 살아 일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분을 위해 제 생명을 다 바쳐도 저 자신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봉사할 때, 헌금할 때, 주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책임지고 이끌어 주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한 주먹 남은 떡 하나 드리는 게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가루통의 가루가 가득찰 것을 분명히 아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내게 역사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주를 위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물질적인 면도 인색하고 자신을 드리는 것에도 인색하고 그 외 모든 일을 형식적으로 체면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날 때부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의 지혜와 경험, 우리 자신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안 될 거야, 떡 갖다 줬다가 가루가 안 생기면 떡만 뺏기는 거잖아, 차라리 내 방법으로 하자’라는 사단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 앞에 인색해져 우리 자신을 위해 살고 지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충 알기 때문에 자기 경험과 생각을 따라 삽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펴 놓고 하나하나 시험해 보면 하나님이 살아 일하시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색해지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세상에서는 일을 하면 그 댓가로 정해진 날짜에 월급을 꼬박꼬박 주는데 하나님은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해도 언제 복을 주겠다는 연락이 없고 눈앞에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구원받고 지난 5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어려울 때 곤고할 때 힘들 때 연약할 때 가난할 때 하나님이 저를 도우시는 것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마음이 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동일하게 약속하시고 그대로 역사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무엇과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확실치 않을 때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인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는 것이 아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여러분 마음이 하나가 되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제가 부족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저는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연약하지 않고, 저는 지혜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마음을 제 것으로 받아 살 때 하나님이 저를 복되게 이끌어주시는 것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저게 되겠나? 안 돼.’ 예, 우리 생각으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믿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세계에 도전해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받는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수양회 가서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보다 영어 단어 더 외우는 게 낫지, 그 시간에 일을 하면 얼마를 더 벌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금보다 귀한 이 믿음을 가지면 여러분 삶을 예수님이 이끌어 가시고 재앙을 물리치시고 두려움을 없애 주시고 밝고 복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벗기고 침상에 줄을 달아 내립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도 낫게 해야 하지만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니까 ‘참람하다, 자기가 뭔데 죄를 사했다고 그래’ 하며 비난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분이 예수님이시니 예수님만이 죄를 사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중풍병자는 “네게 이르노니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어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됐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우리가 마음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뜨여진다면 우리 가운데 부끄러울 분들이 참 많을 겁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인색하며 육신의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이 비춰진다면 정말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명백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친구가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만나면 틀림없이 주님은 이 병을 고치실거야. 친구 다리가 나아서 걸어 다닐 거야’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이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줄 뿐 아니라 먼저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습니다. 중풍병자는 늘 ‘나는 죄가 많아. 그래서 하나님께 천벌을 받아 중풍병자가 되었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병자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병자는 이 말씀을 듣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우리 생각을 믿지 말아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 마음에 아무리 작은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보시고 일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한마음이 되면 여러분 마음속에 예수님의 지혜, 평안, 사랑, 기쁨이 가득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에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어떻게 가루통의 가루가 채워져? 어떻게 중풍병자가 일어나?’ 하는 우리의 생각을 믿지 말고 성경 한 절 한 절을 읽으면서 우리가 볼 때 이해가 안 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러분 속에 역사하셔서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고 여러분의 가족을, 여러분의 사업을, 여러분의 노후를 가장 복되고 영광스럽게 하실 줄 믿습니다.
- 2018. 8. 12.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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