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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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를 만나다
특집 6.25특집 - ① 혈서 쓰고 전쟁 위해 자원입대한 학도병 부태삼 씨의 증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8.06.15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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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성공률 5000분의 1. 한국전쟁 발발 3개월만에 전세를 뒤엎고 승리를 이끌어낸 인천상륙작전. 3학도병으로 지원하여 3년간 치열하게 싸운 전투 가운데 인천상륙작전 참전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태삼(85, 9.15 인천상륙작전참전기념사업회 회장) 씨를 만나 당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Contents
  ▶ 1. 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를 만나다
     2. 귀신 잡는 해병’이 탄생한 통영상륙작전 


오직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우리는 17살이었지만 나는 키가 너무 작다고, 친구 네 명은 학력미달이라고 입대를 거절당했다. 다음날 무명지(無名指, 넷째 손가락)를 깨물어 혈서(血書)를 써서 들고 갔다. ‘爲國願死’(위국원사).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태삼 회장은 제주도 학도병 해병 4기로 입대했다. 당시 부산공업학교(6년제) 4학년이었던 그는 전쟁이 나자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도에 들어왔다가 8월 30일 자원입대 한 것이다. 전세가 급박한 탓에 그날 바로 부산으로 향하는 상륙작전용 함정(LST)에 올랐다. 제주도의 여중생과 여교사로 이루어진 여군 1개 중대는 진해의 해군통제부에 내렸다. 학생, 시민 너나없이 모두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일념뿐이었다. 
부산항에서 UN군 美해병 1사단에 배속되자 미군보급품이 지급되었다. M1소총을 비롯하여 철모와 군복, 군화에 이르기까지 완전 신품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임시수도가 된 부산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군인들로 북적대 좁은 부두에서의 훈련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출동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다가 드디어 9월 12일 미군함정에 승선했다.

8개국 261척 함정 7만여 병력으로 상륙작전 개시

부 회장은 “배에 오르기 전 흑인병사들은 한국군에게 이와 빈대가 들끓는다며 디디티(DDT)를 흠뻑 뿌렸다. 배 두 척이 부산항을 출항했는데 갈수록 수십 척의 배가 따라붙으며 망망대해로 향하길래 미군병사에게 지금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동지나해(동중국해)까지 가서 각 나라에서 출동한 함정과 함께 인천으로 다시 북진한다고 했다”고 말했다.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에 8개국 261척의 함정이 집결, 7만여 병력 규모로 인천상륙이 시작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10m인 인천 해안에서 아침 6시엔 美해병대가 밀물과 함께 월미도에 들어갔고 한국군은 저녁 6시 밀물을 타고 만석동 해변을 통해 인천 시가지로 향했다. 
3일 전부터 시작된 함포사격과 새까맣게 하늘을 덮은 전투기의 폭격으로 인천은 이미 불바다였다. 연기가 자욱해 2m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인민군은 저항할 힘을 잃은 상태였다. 전쟁은 비참했다. 총살당한 흰 저고리차림의 민간인들, 살상력이 큰 네이팜탄에 온몸이 새까맣게 타죽은 중학생 정도의 어린 인민군들, 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을 피해 적진을 향해 달려야만 했던 날들의 참상을 얘기하는 동안 부태삼 회장은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자주 말문이 막혔다.  
24시간 만에 인천 해안 교두보를 확보한 UN군은 서울탈환을 위해 전진하여 결국 9월 27일 새벽 6시,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다.

전쟁에서 죽은 대원들 생각할 때 가슴 아파

연희고지 전투에선 부태삼 회장도 머리에 파편을 맞아 죽을 뻔했다. 하지만 그 아픔은 전투 중 죽어간 대원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비할 바 아니었다.
“104고지 탈취 때 척후병으로 보냈던 문은수 씨가 적으로 오인 받아 총을 맞았다. 전쟁 후 문 씨의 부인과 딸이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는데 차마 만날 수가 없었다. 전방 관측소에 보냈던 이북 출신 학도병도 잊을 수 없다. 중공군이 만월공세(보름달이 뜨면 피리 불고 북을 치며 공격)를 펼치며 포탄을 퍼붓던 밤. 관측소(OP) 벙커가 무너졌다. 그 대원과 병사 셋이 껴안고 압사(壓死)한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그 부모님은 자식을 어떻게 찾을지….” 부 회장은 빨간 해병모를 깊이 눌러쓰며 눈물을 감췄다. 탈영한 분대원이 총살 당하는 모습도 지켜봐야만 했던 부 회장은 ‘전쟁 중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라고 말했다. 그 와중에도 추운 겨울에 1인용 침낭에서 동료와 함께 자고 C-레이숀(전투식량)을 얻는 기쁨이 있었다. 
부태삼 회장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 우리나라 청년들의 생각도 그때와 많이 다르다. 그러나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안보다. 국방력을 기반으로 철저한 안보의식이 있어야만 우리가 당했던 고통이 되풀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6.25전쟁 발발일 일주일을 앞두고 참전노병의 생생한 증언이 전후세대인 기자의 마음을 숙연케 하였다.
송미아 기자 miasong@igood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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