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십자가에서 거룩하게 한 사실을 믿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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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십자가에서 거룩하게 한 사실을 믿어야
로마서 10장 1절 ~ 15절 - 2018. 6. 3. 주일 오전예배 설교 - 71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8.06.0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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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 보면

여러분,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모든 일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으로 나타낸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정확히 알면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은 우리가 특별하게 어떤 경지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권에 이르는 성경 전체를 다 알고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제 경우에는 성경을 대략 열 번 정도 읽었을 때 성경의 전체적인 의미를 알게 되었고 30번, 40번 계속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성실하거나 열심히 하나님을 섬겨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제 마음이 같아졌을 때 하나님이 제게 일하는 걸 보고 너무나 놀라웠습니다. 

암으로 입원한 형제를 만나서

한번은 전주교회의 목사님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김충환 형제가 전북대 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며칠 더 못살 것 같다고 합니다.” 마침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 전주에 가 있어서 병원을 한번 다녀와서 연락해 달라고 했는데 가보니 앞으로 이삼일 넘기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전해왔습니다. 다음 날, 제가 광주에 갈 일이 있어서 아내와 함께 한 시간 정도 일찍 출발해 전북대 병원에 있는 김충환 형제를 찾아갔습니다. 
제가 병원에 도착하여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 안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형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인기척도 없고, 형제의 어머니는 침대 앞에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침대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의 가족들 마음에는 이미 형제가 죽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 분위기에 압도되는 걸 느꼈는데 ‘만약 이곳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그 형제를 살리시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여러분,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 무덤 앞으로 가시기 전에 먼저 마리아와 마르다를 만났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돼 썩어 냄새가 나는데 그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를 만나서 “네 오빠가 다시 산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울면서 “마지막 날에 부활해서 살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니까 아주 쉽게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지만 마리아와 마르다의 마음에서 죽어 있는 나사로를 살리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서 죽어 있는 오빠 나사로를 살리고 싶었습니다. 
성경에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막 11:24)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병을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을 당시에는 우리의 병이 나을지 안 나을지 모르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병을 낫게 하시겠구나’라고 믿을 때, 우리 마음에 ‘내 병이 다 나았다’라는 마음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있는 믿음을 따라 일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이 해결하신다고 믿었을 때 그 믿음대로 하나님이 일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 병 아무것도 아니야’

여러분, 예수님은 김충환 형제의 병을 고치실 수 있기 때문에 먼저 김 형제가 ‘예수님이 나를 고치신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 형제에게 성경을 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설명했습니다. “김 형제, 눈 좀 떠봐. 일어나봐!” “예, 목사님….” “의사는 자네가 이삼일밖에 못 살고 죽는다고 했어. 우리 모두 다 그렇게 알고 있어. 만일 여기에 박옥수 목사가 아니라 예수님이 오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봤어. 지금까지 예수님은 병자를 보고 한 번도 못 본 척 하신 적이 없어. 이 병실에 예수님이 오셨다면 말씀도 전해주고 여러가지 얘기도 하셨겠지만 반드시 자네 몸을 고치실 거야. 그렇겠지?” “네.” “그러면 자네 마음이 어떻게 예수님 마음하고 한 마음이 되지? ‘눈에 안 보이는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시는데 나를 고치시길 원하시는구나’ 하며 예수님께서 내 병을 고치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해. 그러면 ‘예수님이 내 병을 고치시겠구나!’ 하며 믿음이 생기는데 우리가 믿기만 하면 우리 병을 고치시는 예수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는 거야. 그러면 이 병 아무것도 아니야. 내 말 알겠어?” 

우리 죄를 자백하는 이유

우리가 죄를 사함 받는 것도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내 죄가 사해졌다’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의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란 ‘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고 내 죄를 사했구나. 그러면 내 죄가 씻어졌네. 내가 도둑질, 거짓말, 간음, 살인이든 어떤 죄를 지었든지 불문하고 내 죄를 사하셨네’라고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라는 말씀처럼 사람들은 매일 자백을 합니다. 그렇게 자백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 죄인인 걸 고백했을 때 주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 그대로 ‘나를 깨끗하게 하셨다’라고 믿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매일 죄를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신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도 믿어야

한번은 제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에티오피아 대학교 총장님이 전화를 했습니다. “박 목사님, 에티오피아에 도착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승용차로 8시간 후면 도착하는데 저를 만나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꼭 뵙고 싶습니다.” 저는 그분을 만나서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총장님이 웃으시면서 “이 말씀은 제가 옛날에 다 외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24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아무 한 일이 없지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도 믿어야 하지만 24절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어

제가 총장님께 “로마서 3장 2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그분이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면 의롭게 됩니다”라고 너무나 엉뚱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닌데요. 총장님,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와 전혀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어, 더러운 양말이나 속옷은 스스로 씻는 게 아니라 세탁기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세탁기가 씻어주는 겁니다. 세탁조 안에서 세제가 나와 더러운 오염물을 빼내고 물로 헹구고 드라이까지 되어서 나오는 겁니다. 빨래가 깨끗해지는 것은 세탁기가 하는 일이지 더러운 양말이 스스로 깨끗케 하는 건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더러운 빨래 같은 사람인데 예수님이라는 세탁기가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신앙생활이란 우리가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하느냐,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다니느냐와 전혀 상관없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얼 하셨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 사람보다 내가 착하게 살았어.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 내가 헌금을 많이 했어. 그러니까 내 신앙이 좋아질 거야. 나는 철야기도를 했어. 나는 구제를 많이 했어. 그랬기 때문에 내 죄가 사해질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노력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며 은혜라는 것은 아무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약 20년 전에 LA 사시는 분이 제게 손목시계를 선물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얼마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만약 백만 원짜리 시계를 선물로 받았을 때 만 원이라도 지불했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값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도 대가가 전혀 없는 공짜입니다. 

인생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돈이 필요합니까? 어떤 사회적 지위가 필요합니까? 명예가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돕고 역사하시기 위해 우리 죄를 사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죄를 사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면 죄를 사하신 것이구나. 그러면 내 모든 죄가 이미 십자가에서 사해졌구나’ 하며 우리가 죄에서 자유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속에 일을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병에서 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기는 전선을 통해 흘러갑니다. 전선만 연결되면 전기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의 집,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의 집을 가리지 않고 들어갑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 마음이 연결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서 일을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병자를 고치시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이 내 병을 고치시겠구나’라고 믿으면 우리 병을 고치시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두 가지 의(義)

여러분, 제가 암에 걸렸던 김 형제에게 이렇게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이야기한 후 기도하고 병실을 나왔습니다. 한 열흘쯤 지났는데 아침식사 시간에 김 형제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 김충환입니다.” 다 죽어가던 사람의 목소리에 힘이 있었습니다. “자네 건강한가?” “예! 건강합니다. 며칠 전에 검사했는데 제 몸 어디에도 암세포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 감사하네.” “오늘 아침에 퇴원합니다. 그래서 전화했습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그를 암에서 깨끗이 고쳐주신 간증도 듣고 공도 같이 차고 했는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10장에는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하며 우리의 의와 하나님의 의라는 두 가지 의(義)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율법(십계명)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다 지켰다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십계명 중 하나라도 어겼으면 우리가 저주를 받고 멸망을 당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선한 일도 하지만 미워하고 거짓말하는 사람이라 우리의 의를 가지고 하늘나라에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겐 선(善)이 없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준비하셨는데 그건 바로 예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거나 헌금하거나 하나님께 충성한 것과 전혀 상관없는 예수님 당신의 의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 하시며 우리에게 선이 없고 악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죄를 전부 예수님께 돌리고 예수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의로는 천국 갈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예수님 당신의 완벽한 의를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가 예수님만큼 의롭게 되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착하게 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내가 남을 위해 얼마나 많이 구제했는데.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왔는데. 내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라는 우리의 의를 버립시다. 우리의 의는 흠이 많고, 문제투성이고, 더럽고, 불완전합니다. 

도금한 목걸이처럼

예전에 미국 시카고에서 집회를 마치고 가려는데 액세서리를 판매하는 한 자매님이 제게 도금한 목걸이를 한 움큼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꺼내놓고 왔는데 누가 제 가방에 도로 넣었는지 인천공항에서 나오다가 세관에 걸렸습니다. 세관에 미리 물품 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제가 세관원에게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금목걸이가 아닙니다. 도금한 것입니다”라고 했더니 세관 직원이 “저는 순금인지 아닌지 구분 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혹시 칼을 가지고 있다면 칼로 한번 긁어보세요.” “제가 긁어 봐도 괜찮습니까?” 하더니 그가 칼로 목걸이를 긁었습니다. 표면은 금인데 속에서 다른 금속이 나오니까 세관원이 빙그레 웃었습니다. 
여러분, 순금목걸이나 순금반지는 칼로 긁어도 끝까지 금이 나옵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말할 때는 악이 없이 선만 행해야 선한 사람인데 그러지 못하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은 도금한 목걸이나 반지처럼 전부 가짜 선입니다. 

안식일의 주인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안식일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금요일 저녁 해질 때부터 토요일 저녁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인데, 보통 노예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꼭대기를 오르내리다가 금요일 저녁 서산에 해가 딱 지면 “안식일이다!” 하며 모든 짐을 벗어놓았습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에 아무 짐도 지지 마라”라고 하셨고, 신약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라고 말씀하셨듯이 안식일의 주인이 예수님이고 예수님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든 짐을 내려놓습니다. 성경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6~17) 하듯이 구약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오실 예표였습니다. 구약시대에 양을 잡아 속죄제사를 드려 죄 사함을 받았던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는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불뱀에 물렸을 때 놋뱀을 장대 위에 달고 “쳐다본즉 살더라”는 말씀을 주신 것도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을 볼 때 ‘내 죄가 끝났구나’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안식일에는 모든 짐을 벗는 것처럼,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 짐을 벗는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냥 안식일만 지키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릴 온전하게

로마서 10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나라 가도록 예수님의 의를 주셨는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깨끗케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 전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은 우리가 잘 뛰고 못 뛰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대표선수가 일등을 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금메달입니다. 나이 많은 할머니도 ‘아이고, 허리야’ 하시면서 “우리가 금메달 땄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릴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음이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의(義)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잘하는 것 모두 버립시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를 정말 싫어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릴 온전케 거룩하게 하신 사실만을 믿는 것이 진리이고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달려 나간다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축복해 주실 줄 확실히 믿습니다. 
 - 2018. 6. 3. 주일 오전예배 설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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