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과 성경이 다를 때 말씀을 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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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과 성경이 다를 때 말씀을 믿는다면
요한복음 2장 1절 ~ 11절 - 2018. 3. 25. 주일 오전예배 말씀 - 705호
  • 주간기쁜소식
  • 승인 2018.03.30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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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의 특징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다른 종교와 달리 이단 시비가 많았습니다. 베드로도 이단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예수님에게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죽으신 후에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말에 정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그들은 이단이야.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부활해? 누가 그런 얘기를 믿을 것 같아? 그들은 선량한 시민들을 미혹하는 악한 집단들이야. 그런 집단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 돼’ 하며 핍박하게 되었습니다. 
실제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 속으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십니다. 저는 주님 안에 56년 동안 살면서 저 자신이나 우리 선교회에 일어난 정말 믿을 수 없는 일들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척수염으로 거의 죽어가다가 살아난 최수현 자매는 대소변을 정상적으로 볼 수 없어서 대변을 보려면 약을 먹고 엄마가 딸의 배를 밀어서 대변을 빼야하고, 기계로 소변을 뽑아내야 했던 사람인데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며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 얘기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 한번은 그 자매에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전문(電文)을 보냈다고 합니다.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예전에 제가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대학 총장님 한 분이 제게 전화를 해서 “목사님, 제가 차를 타고 가면 8시간 쯤 걸리지만 목사님을 잠깐 뵙고 싶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전화하시는 분을 만나지 않을 수 없어서 시간을 내서 만났습니다. 제가 총장님을 만나서 로마서 3장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말씀을 읽자, “저는 이 말씀을 어려서부터 외우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24절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을 읽고 “이 말씀을 아세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총장님은 “예, 열심히 노력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제가 “다시 24절 말씀을 좀 자세히 보세요” 하며 “Being justified(의롭게 됐다)”라고 말하니까 그분이 깜짝 놀라셨습니다.

‘은혜’의 뜻은

총장님께서는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기록되었는데도 자기 생각으로 성경을 보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죄 사함 받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 대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로마서 4장 4절에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고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회개나 자복해서 죄 사함을 얻는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행위에 속합니다. 그래서 5절에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착한 일을 해서 의롭다 하면 믿기 쉬운데, 우리는 경건치 않은데 의롭다고 하니까 믿기 어려운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하셨듯이 영어성경에는 “Being justified(의롭게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며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관념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이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과 같이 되므로 하나님이 못 먹게 속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한 결과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았습니다.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아야만 먹을 수 있는 겁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은 후손들이 되었습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우리도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능력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희 죄를 씻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의 지혜가 우리 속에 작용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희 죄를 기억지도 않는다”라고 말씀하셔도, 우리 생각은 ‘그렇지만 나는 죄인이야. 또 죄를 지었잖아’ 하며 말씀을 불신하는 쪽으로 이끌린다는 것입니다. 

홍콩 CLF에서 만난 목사님

작년 10월 홍콩 CLF(세계기독교지도자대회)에서 동남아 지역과 중국 지역에 있는 목회자 1150명을 초청하여 강연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제 설교를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그리고 구원론은 유명한 신학자들도 전부 난해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 죄를 사했다는 것은 전혀 난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론을 난해하다고 이야기할까요? 사단은 오랫동안 인간에게 자기 생각을 주어 예수님의 마음이나 능력을 알만한 눈을 가리니까 성경을 읽지만 무슨 뜻인지 모르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칫집에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여섯 개의 돌 항아리에 물을 갖다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인들은 분명히 물을 갖다 부었는데 예수님은 그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이것이 포도주라고? 해도 해도 너무 한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연회장에게 떠다 준 하인들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더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정말 어렵습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얼마나 자신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인 줄 아느냐’에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고 악을 행해도 ‘내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양관에서 어떤 할머니는 

예전에 수양관에서 어느 연세 많으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할머니, 지금 죄인이십니까?” “그럼, 죄인이지. 죄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제가 이사야서 53장을 펴서 읽어 보시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그리고 다시 그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죄가 있습니까?” “죄 있다니까!” “왜 성경을 안 믿으세요?” “내가 왜 안 믿어! 당신들이나 안 믿지.” “그럼, 이 성경을 다시 읽어 보셔요.” 성경을 읽은 후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죄 있으세요?” “죄 있다니까! 참 답답하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면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이 당연한데, 성경을 몇 번씩 읽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그 할머니에게 세 번째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성경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좀 보시고 이야기하세요. 이사야 53장에서 할머니에게 죄가 있다고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께로 옮겨졌다고 말씀합니까?” 그제서야 할머니가 깜짝 놀라시며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즘 많은 기독교인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189장)” 하며 이렇게 찬송을 부르고 난 다음 기도할 때는 “오!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금방 속죄함 받았다고 하다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실 때 얼마나 안타까워하실까요? 사단이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마음을 지배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히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죄 사함 받았다’라고 하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자기 생각으로 보면 ‘의롭다’라는 말씀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상대방은 그른 사람이 되니까 점차 그 사람과 교류가 줄어들고 혼자 외롭게 지내게 되는데 그러면 악한 영이 그를 끌고 다니게 되고, 결국 정신병을 앓게 됩니다. 그러나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자세가 보통 사람들과는 약간 다릅니다.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넌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네 이야기 한번 들어보자” 하며 의견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도 들어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상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아담의 후손으로서 악한 영의 이끌림을 받았고 사단의 종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룟 유다도 사단에게 속아서 예수님을 팔았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 판 값의 일부를 감추었을 때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하며 책망했습니다. 사단이 우리를 속이면 우리 자신이 옳아 보이니까 예수님이나 또는 목사님이 틀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좀 더 높은 차원의 마음의 세계를 소유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볼 땐 말도 안 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예수님의 말씀이 맞지. 내 생각을 비워야 돼’라는 생각을 하므로 신앙을 정상적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배척한다면, 절대 진리에 설 수 없습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종종 기독교인들 가운데 우리 선교회에 대해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대화를 한다면 무척 좋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잖아. 그런데 의인이라는 것이 맞아?” “죄 사함 받았잖아.” “죄 사함 받았지만 매일 죄를 짓는데 어떻게 의인이야. 한번 설명을 해봐.” 
히브리서에는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1~12)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었고, 하늘나라 성전은 손으로 짓지 않은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하늘나라 성소를 가리킵니다. 구약시대는 염소와 송아지 피로 죄를 씻지만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으로 오셔서 구약의 제사장과 달리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예수님 당신의 피로 직접 이 땅에 있는 손으로 만든 성전이 아닌 하늘나라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두 종류의 제사장

여러분, 히브리서 9장 1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 9:12)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는 말씀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오늘 우리의 죄도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성막에서 양이나 소를 잡아 드렸던 속죄 제사로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을 보면 두 종류의 제사장이 나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1~14) 
구약의 제사장이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려도 죄가 씻어졌습니다. 그러나 시간계에 속한 이 제사는 시간이 흐르니까 과거로 가버립니다. 우리는 현재에 있기 때문에 과거로 간 그 제사가 현재 우리의 죄를 사할 수는 없으므로 다시 죄를 지을 때마다 짐승을 잡고 또 다시 짐승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피를 이 땅에 있는 제단으로 가져간 게 아니라 하늘나라 성전에 있는 제단에다 피를 뿌림으로써 하늘나라 모든 문서에 있는 죄의 기록을 지워버렸습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영원하기 때문에 지금도 2천 년 전에 뿌려진 그 피가 있어서 우리 죄를 사하는 능력이 그대로 역사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든 말든 그때 예수님이 흘리신 피의 능력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우리의 행위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우리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진 것입니다. 

‘나는 틀린 인간이구나’

우리는 사단의 종으로 살아오면서 우리 생각은 예수님의 말씀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다 사했다고 하는데도 죄인이라고 하고, 예수님께서 죄를 기억지 않는다고 하시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정말 틀린 인간이구나’ 하며 자신을 정확히 발견한 사람을 찾습니다. 1962년도에 저는 그전까지 저 자신이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가 성경 속에서 너무나 더럽고 추하며 형편없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내 생각을 따라가면 망하겠구나. 내가 악하구나. 내가 더럽구나’ 하며 제 마음을 전부 비우고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면 의롭다.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하시면 거룩하다. 하나님이 죄를 씻었다고 하시면 죄가 씻어진 것이다’라며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원수

히브리서 10장 13절의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히 10:13)에서 예수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다 사해서 깨끗한데도 죄가 남아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14절에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바쳐서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면 되는데 사람들은 ‘그럼 죄를 막 지어도 되겠네?’ 하며 우리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대충 죄를 씻는다면 우리는 모두 지옥을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믿지 못하셔서 당신이 직접 우리 죄를 흰 눈보다 더 희게 깨끗하게 씻으시고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다음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우리 죄를 담당하시려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는데 여전히 죄인으로 남는다면 그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경멸하는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눈처럼 희게 씻어 놓았는데도 죄가 그냥 남아있다고 말하는 죄인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우리는 겸비하게 우리 생각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더없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앙에서 가장 위험합니다. 우리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지라도 ‘너는 왜 내 생각과 다른지 이야기 한번 들어보자. 나는 죄를 지었는데 왜 성경은 나를 의롭다고 하셨지? 왜 내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셨지?’ 하며 대화해야 합니다. 이제 성경과 내 생각이 다를지라도 말씀을 믿는다면 예수님과 우리 마음이 하나가 되고 그때부터 성령이 우리와 한마음으로 역사해서 우리가 밝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2018. 3. 25. 주일 오전예배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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